목차
目 次
서론.
본론.
1. 기만적 문화 정치와 경제 수탈의 확대
(1) 민족을 이간질하는 문화 정치
(2) 산미증식계획과 식민지 지주제의 강화
(3) 일본 자본 진출을 위한 회사령 폐지
2. 전시 수탈 경제 체제와 민족 말살 정책
(1) 군국주의를 불러온 세계 대공황
(2) 침략 전쟁에 나선 군국주의 파시즘 세력
(3)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고?
(4) 경제 개발의 탈을 쓴 병참기지화
(5) 숟가락까지 빼앗아 가는 일제의 수탈 정책
결론.
참고문헌.
서론.
본론.
1. 기만적 문화 정치와 경제 수탈의 확대
(1) 민족을 이간질하는 문화 정치
(2) 산미증식계획과 식민지 지주제의 강화
(3) 일본 자본 진출을 위한 회사령 폐지
2. 전시 수탈 경제 체제와 민족 말살 정책
(1) 군국주의를 불러온 세계 대공황
(2) 침략 전쟁에 나선 군국주의 파시즘 세력
(3)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고?
(4) 경제 개발의 탈을 쓴 병참기지화
(5) 숟가락까지 빼앗아 가는 일제의 수탈 정책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본들입니다. 이들의 투자는 전력화학기계금속 등 중화학 공업과 철석탄알루미늄마그네슘 등 광업 부분에 집중되었습니다. 대부분이 침략전쟁의 수향을 위한 군수 산업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1930년대 이후에는 경공업에 비하여 중화학 공업이 기형적으로 확대됩니다. 이러한 변화를 두고 일본과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지배가 수탈만 한 것이 아니고 개발도 하였으며,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1960-1970년대에 이룩한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도 일제가 식민지배를 통해 지도한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5) 숟가락까지 빼앗아 가는 일제의 수탈 정책
중일 전쟁 이후 일제의 인력과 물자 수탈은 더욱 직접적이고 강제적인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전쟁터가 계속 확장됨에 따라 일본 내의 인력과 자원만으로는 침략 전쟁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무기를 주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조선 청년들은 군사력으로 직접 동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지원병 제도를 실시합니다. 피폐해진 농촌에서 먹고 살길이 막막한 청년들이 일제의 꼬임에 빠져 일본 군대에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학도지원병제와 징병제도 실시합니다. 학도지원병은 전문학교나 대학교의 학생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는 것이었죠. 이때 끌려간 학병들 중에는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한국광복군이나 조선의용군에 가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징병제는 1944년에 실시되었는데 일제의 패망까지 불과 1년 남짓 동안 약 20만 명의 조선 청년들이 침략 전쟁터로 끌려갔습니다.
노동력의 강제 동원도 잔악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의 실시로 생활 기반을 잃고 농촌에서 쫓겨나 실업 상태에 있는 조선인들을 일제는 ‘모집’이라는 이름으로 광산이나 토목 공사장에 강제 동원하였습니다. 중일 전쟁 이후에는 국민 징용령을 내려 일제 패망 때까지 10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하였습니다. 이들은 군대식 규율로 통제되는 수용소에서 최악의 생활 조건으로 살아가야 했고, 공사가 끝난 이후에는 기밀 누설을 방지하기 위해 집단 학살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러시아의 사할린에 사는 동포들은 대부분 이때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과 그 후손들입니다.
전쟁 물자에 대한 직접적인 수탈도 이른바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중일 전쟁 직후 국민총동원법에 따라 미곡에 대한 강제 공출과 식량배급제가 실시됩니다. 또한, 무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쇠붙이를 공출하였는데, 절이나 교회의 종은 물론이고 가정에서 쓰는 놋그릇과 숟가락까지도 빼앗아 갔습니다. 또 대체 연료를 만들기 위해 소나무의 뿌리를 캐도록 어린 학생들을 온종일 동원하기도 하였습니다.
결론.
침략 잰쟁을 일으킨 일제는 수많은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성 노예나 다름없는 군대 위안부로 삼는 반인륜적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성의 순결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여성의 낮은 사회적 지위로 인하여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그 진상은 드러나지 않았다. 1965년의 한일 협정에서도 전혀 언급이 안 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야 한 여자 대학 교수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그 실체가 밝혀지기 시작하였고 1990년대에는 여성단체들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되었다. 군대 위안부 문제는 크게 일제 강점기 민족 수난사라는 측면과 여성의 인권과 지위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민족 수난사의 측면에서 군대 위안부는 일제 식민 지배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일본 정부는 강제 동원 사실을 부인하고 피해자들의 배상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한일 협정의 체결로 모든 대일 청구권은 소멸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들의 과거 침략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반성과 사죄를 거부하는 일본의 태도와 관련이 깊다.
여성의 인권과 지위라는 측면에서 군대 위안부는 과거 오랜 시간 동안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과 폭력의 가장 잔혹한 유형을 보여 준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 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인권을 확보하고, 정의로운 인류 사회를 열어가기 위해 명백히 밝히고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결국 군대 위안부 문제는 우리 민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도 불평등한 처지에 놓여 있는 전 세계 여성의 문제이며 인류 사회의 정의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한국근현대사 (두리미디어) 김인기, 조왕호 지음
(5) 숟가락까지 빼앗아 가는 일제의 수탈 정책
중일 전쟁 이후 일제의 인력과 물자 수탈은 더욱 직접적이고 강제적인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전쟁터가 계속 확장됨에 따라 일본 내의 인력과 자원만으로는 침략 전쟁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무기를 주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조선 청년들은 군사력으로 직접 동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지원병 제도를 실시합니다. 피폐해진 농촌에서 먹고 살길이 막막한 청년들이 일제의 꼬임에 빠져 일본 군대에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학도지원병제와 징병제도 실시합니다. 학도지원병은 전문학교나 대학교의 학생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는 것이었죠. 이때 끌려간 학병들 중에는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한국광복군이나 조선의용군에 가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징병제는 1944년에 실시되었는데 일제의 패망까지 불과 1년 남짓 동안 약 20만 명의 조선 청년들이 침략 전쟁터로 끌려갔습니다.
노동력의 강제 동원도 잔악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의 실시로 생활 기반을 잃고 농촌에서 쫓겨나 실업 상태에 있는 조선인들을 일제는 ‘모집’이라는 이름으로 광산이나 토목 공사장에 강제 동원하였습니다. 중일 전쟁 이후에는 국민 징용령을 내려 일제 패망 때까지 10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하였습니다. 이들은 군대식 규율로 통제되는 수용소에서 최악의 생활 조건으로 살아가야 했고, 공사가 끝난 이후에는 기밀 누설을 방지하기 위해 집단 학살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러시아의 사할린에 사는 동포들은 대부분 이때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과 그 후손들입니다.
전쟁 물자에 대한 직접적인 수탈도 이른바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중일 전쟁 직후 국민총동원법에 따라 미곡에 대한 강제 공출과 식량배급제가 실시됩니다. 또한, 무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쇠붙이를 공출하였는데, 절이나 교회의 종은 물론이고 가정에서 쓰는 놋그릇과 숟가락까지도 빼앗아 갔습니다. 또 대체 연료를 만들기 위해 소나무의 뿌리를 캐도록 어린 학생들을 온종일 동원하기도 하였습니다.
결론.
침략 잰쟁을 일으킨 일제는 수많은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성 노예나 다름없는 군대 위안부로 삼는 반인륜적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성의 순결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여성의 낮은 사회적 지위로 인하여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그 진상은 드러나지 않았다. 1965년의 한일 협정에서도 전혀 언급이 안 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야 한 여자 대학 교수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그 실체가 밝혀지기 시작하였고 1990년대에는 여성단체들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되었다. 군대 위안부 문제는 크게 일제 강점기 민족 수난사라는 측면과 여성의 인권과 지위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민족 수난사의 측면에서 군대 위안부는 일제 식민 지배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일본 정부는 강제 동원 사실을 부인하고 피해자들의 배상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한일 협정의 체결로 모든 대일 청구권은 소멸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들의 과거 침략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반성과 사죄를 거부하는 일본의 태도와 관련이 깊다.
여성의 인권과 지위라는 측면에서 군대 위안부는 과거 오랜 시간 동안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과 폭력의 가장 잔혹한 유형을 보여 준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 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인권을 확보하고, 정의로운 인류 사회를 열어가기 위해 명백히 밝히고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결국 군대 위안부 문제는 우리 민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도 불평등한 처지에 놓여 있는 전 세계 여성의 문제이며 인류 사회의 정의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한국근현대사 (두리미디어) 김인기, 조왕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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