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0월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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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사건의 배경
1) 친일파들과 미군정의 태도에 대한 반감.
2) 항쟁 당시 대구의 경제 상황.
3) 대구의 식량의 부족
4) 당시 사회의 여러 문제
5) 대구 9월 노동자 총파업

2. 항쟁의 전개

3. 항쟁의 피해

4. 항쟁에 대한 당시의 평가

5. 항쟁의 의의

본문내용

동과 일반 건물 6동이 불에 타 전소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체포된 사람은 수천 명에 이르렀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구미지역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고 사망하였다.----넣을까????
4. 항쟁에 대한 당시의 평가
박헌영은 이 사건을 "'10월 인민항쟁'으로 부르며, '동학농민운동 , 3.1 운동과 함께 조선의 3대 위대한 인민항쟁'이라 평가했다. 실제로 조선공산당은 공식적으로 시위를 선동한 적이 없지만, 지역의 공산당원들은 읍면마다 자생적으로 터진 폭동의 맨 선두에 서서 싸우다가 죽거나 감옥으로 끌려갔다.[11]
한편, 우익세력들은 일제히 이 사건을 격렬히 비판했는데, 특히 한국민주당세력에서는 '이번 파업투쟁은 박헌영 일파의 모략 선동에 기인한 것'이라며 일제히 맹비난했다.
좌익 내부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조선공산당을 제외한 좌익계열 9개 정당 대표들은 긴급 회동을 갖고 이번 싸움이 '박헌영의 공산당이 벌인 모험주의'라며 격렬히 비난했다.[11]
좌우합작 세력에서는 양비론을 내세웠는데, 여운형과 김규식은 10월말 미군정청 브라운 소장과의 회담에서 "‘10·1 사건’이 경찰에 대한 반감, 군정 내 친일파의 존재, 일부 한국인 관리의 부패, 파괴분자들의 선동 탓에 일어났다."고 군정청에 비난을 했다. 이어서 "‘10·1사건’이 미군정의 정책파탄에 따른 한국 민중의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사태를 살육과 파괴로 몰고 간 책임은 ‘신전술’로 과격한 투쟁 노선으로 기울어 잘못된 정책을 채택한 조선공산당에 있다."고 주장했다.[12]
5. 항쟁의 의의
대구 10.1 사건 참가자의 시각에서 이 사건은 전국적인 규모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한 대중 운동이다. 주도 세력은 조선공산당이며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조직이 활용되었으나, 당시 공산당 고참 간부들은 사태를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 몰라 뒷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기만 했었다.[8][13] 10월 사건의 근본원인은 일제 강점기의 지배 체제가 그대로 유지된 미군정과 군정청의 식량정책 실패, 가혹한 수매, 미군정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좌익 사냥,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의 권력 복귀 등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하게 된 대한 민중들의 분노에 있었다.[14]
이 사건으로 인해 좌파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9월 총파업에 이은 대구 10.1 사건으로 좌파에 대한 검거는 가속화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거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풍부한 현장의 투쟁 경험을 얻게 되었고, 경찰과 우파의 탄압를 받게 되면서 좌파의 단결력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도 낳았다.
오늘날, 이 사건을 동학 농민 운동, 3·1 운동과 더불어 한국 역사상 3대 민중 항쟁으로 규정하는 시각도 있다.[1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극도의 정치적 무권리와 민족적 불행,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하는 미제의 야만적인 식민지파쑈통치에 여기저기에서 반기를 들고 나선 남조선인민들의 항쟁"으로 보고 있다.[16]
[참고자료]
대구역사교사모임, 『선생님이 들려주는 근현대 대구 이야기』, 대구, 영한, 2010

키워드

대구,   10월,   항쟁,   10.1,   사건,   노동운동,   노동,   해방,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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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3.18
  • 저작시기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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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57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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