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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유학사상][탈주자학적 유학사상][신라시대 유학사상][고려시대 유학사상][조선시대 유학사상]유학사상의 의미, 탈주자학적 유학사상, 신라시대의 유학사상, 고려시대의 유학사상, 조선시대의 유학사상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유학사상의 의미

Ⅱ. 탈주자학적 유학사상

Ⅲ. 신라시대의 유학사상

Ⅳ. 고려시대의 유학사상

Ⅴ. 조선시대의 유학사상

참고문헌

본문내용

였을 뿐만 아니라 사대부들과 친구가 되어 고아담백한 생활 속에 소탈한 풍류를 누렸다. 이와 함께 사대부들 사이에 선열의 기풍이 성행하였다. 예를 들면 북송의 양억장방평주돈이장상영과 남송의 장구성진덕수 등은 모두 선종의 거사신도이거나 선종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학자들이다. 구양수 같은 사람도 《본론》을 써서 불교와 노장을 반대하였지만, 여산 동림사의 조인선사와 한 번 얘기를 나눈 후로는 숙연히 마음에 감복되어 날마다 사문들과 교유하면서 호를 육일거사라 이름 하기도 하였다. 전통적 유교문화를 굳게 지킨 북송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였던 사마광 역시 《해선게》 여섯 수를 써서 유교와 선의 같은 점을 지적하였으며, 당시 사대부 사회의 영수로서 문단을 이끌었던 소식은 일찍이 《단경을 읽고》라는 글을 써서 혜능의 《육조단경》의 삼신설에 대하여 해석과 보충을 하였다. 심지어 남송의 주희 또한 송대의 선승 대혜의 《어록》을 가장 즐겨 읽었으며, 또 “현재 선학을 하지 않는 사람은 단지 그가 그 깊은 곳에 가보지 못한 것 뿐이며, 그 깊은 곳에 도달하고 나면 반드시 선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처럼 송대의 사대부들의 생활, 사상에 선불교의 기풍을 포함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송대 선종의 흥기는 당시 사대부들에게 새로운 문화의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이렇게 새로운 문화의 토양으로서의 선종사상을 흡수소화함으로써 경력 연간 이후에 일어났던 새로운 유학부흥운동인 신유학의 발흥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Ⅴ. 조선시대의 유학사상
조선후기의 유학은 퇴계와 율곡의 학설을 계승하여 전개되어 가는데 퇴계의 이기불상잡의 강조, 사단칠정의 이기호발이라는 입장과 율곡의 이기혼륜무간 사단칠정의 기발이승일도의 입장이 각각 그들의 문도로 이어져 크게 보면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라는 두개의 학파가 양립하면서 조선후기의 유학을 이끌어간다고 볼 수도 있다. 퇴계학파와 율곡학파가 남인과 서인이라는 당색과 결부됨으로해서 이 두 학파간의 논쟁은 단순히 상대방의 학설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는데 머물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되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부터 조선성리학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주자학에 집착하게 되고 주자학이 아닌 다른 모든 학문적 경향은 이단사설로 배척된다. 교조적 주자학자들의 완강한 배척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중세사회 해체의 조짐과 함께 새로운 학문경향이 싹트게 되는데 한학적 경향과 양명학이 그것이다. 양명학은 명대의 중국사회를 반영한 자유주의적 사유로 주자학적 명분론을 비판하고 나온 근대적 사유의 맹아라는 성격을 지녔고 한학풍의 유학은 얼핏 복고주의 같지만 사실은 고식화된 주자학의 공소성을 비판하고 유학의 실천적 기풍을 되살리기 위하여 주자보다 더 큰 권위를 빌어 온 것으로 실증주의적 경전해석이라는 근대적 사유의 싹을 보이고 있다. 이들 사상이 중세사회 붕괴의 조짐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후에 근대적 사유로 향한 성호학파와 북학파의 사상이 이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로도 어느 정도는 증명된다고 생각한다.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정통을 이어받은 유학자들은 사설을 굳건히 지키면서 주자학이 자신들의 학설과 일치함을 논증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는데 퇴계와 율곡의 주장을 각자 확대적용하다 보니 극단적인 데로 사상이 경도되는 경향이 있었다. 퇴계학파의 학봉계와 서애계의 학자들은 율곡의 주기적 경향을 비판하다보니 이선기후의 주리설이 극단화되어 이활론, 이동론으로 까지 주장하게 되었다. 미수 허목으로 부터 시작되는 기호남인은 퇴계학파 내에서 조금 색다른 성향을 띠게 되는데 이는 후에 성호학파로 연결되고 다시 다산의 수사학으로 연결된다. 율곡학파는 우암때 노론계와 소론계로 나뉘는데 소론계는 율곡학파의 정통성과 멀어지면서 퇴율절충론으로 기울기도하고 양명학과 연결되기도 한다.
조선후기 유학의 전개에서 가장 큰 전환점의 계기가 되는 사건은 율곡학파 내부에서 일어난 호락논쟁이다. 중세사회를 온존하려는 당시의 유학자일반의 의식은 주자학적 명분론 봉건적 윤리규범의 절대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론적으로는 성즉리라는 성리학적 대전제를 모든 이론체계에 관철시키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율곡학파에서는 이러한 이념적 요청과 율곡학의 주기적 성격사이에 괴리가 생기게 되고 이 때문에 율곡 우암의 사설을 굳게 지키려는 수암 남당과 성리학의 이념적 당위성을 실현하려는 외암 사이에 인물성동이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논쟁에는 율곡학파에 속한 대부분의 학자들이 참여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성리학을 다시 정리하게 되었다. 호락논쟁은 조선후기의 성리학이 재정립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하겠다. 호락논쟁이후 율곡학파의 유학자들도 호론을 계승한 유학자와 낙론을 계승한 유학자로 나뉘게 된다. 이 중 녹문 임성주는 호락논쟁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율곡의 이통기국론을 비판하고 장재, 서경덕류의 유기론적 사상을 재천명하게 된다. 낙론을 계승한 유학자들은 녹문의 유기론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발전할 소지가 있는 율곡의 이기심성론을 비판하고 퇴계적인 성리설을 전개하게 된다. 그것이 화서나 노사에서는 퇴계학파의 한주와 거의 차이가 없는 극단적인 이존설로까지 이르게 된다.
이상에서 조선후기 유학의 변천을 간단하게 요약해보았다. 조선후기 유학의 흐름을 이렇게 보면 유학파간의 갈등은 퇴계학파와 율곡학파 간의 사단칠정론 해석을 둘러싼 논변부터 시작해서 순정주자학고수와 탈주자학적 학문경향간의 갈등, 도학과 실학의 갈등보다 세부적으로는 호론과 낙론의 갈등, 유기론과 유리론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하겠다.
참고문헌
▷ 김한식(1995), 조선조 유학 정치이념의 재조명, 한국정치학회보, 제29집 3호
▷ 구본명(1996), 유학사상의 이해, 서울 : 집문당
▷ 성균관대학교 유학과 교재편찬위원회(1996), 유학사상, 서울 :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 이태진(1989), 조선유교사회사론, 지식산업사
▷ 이황·이이, 유정동등 역(1989), 한국의 유학사상, 삼성출판사
▷ 장가삼·당군의·모종삼·서복관(1958), 중국학의 재평가와 중국문화의 재건을 위한 선언문
▷ Chang Carsun, 이진표 옮김(1997), 신유학 사상의 전개 II, 서울 : 형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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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4.07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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