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건축의 5대 거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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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우하우스의 교사를 옮기면서 워크숍, 스튜디오, 오피스, 카페테리아, 오디토리엄, 스튜던트하우스 그리고 그로피우스의 개인 사무실까지 포함해 서로 브리지로 연결된 복합 건물이 그의 지도하에 탄생하였다. 20세기 현대 건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바우하우스가 세상에 형상을 드러낸 것이다.
그로피우스라면 누구나 바우하우스를 떠올린다. 바우하우스가 현대 디자인과 현대 건축에 끼친 영향을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처음으로 미술이 건축을 중심으로 종합되는 계기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산업혁명 이후 도래한 시민 중심 사회에서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가야 할 큰 길을 연 바우하우스를 만들고 키운 중심인물이 그로피우스다. 당대 최고의 미술가들을 바우하우스라는 건축 중심 학교에 끌어들여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건축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폭넓은 이해와 지지를 얻고 있었던 그로피우스만이 가능했던 일이었다.
바우하우스에는 에콜 드 보자르의 옛 건축 교육 대신 20세기 산업사회에 부응하는 새로운 전인교육을 선보인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의 설계에서부터 바우하우스의 커리큘럼, 교수 초빙 등 거의 모든 일을 해낸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어느 누구도 그를 독단적이라 하지 않았다. 그는 바우하우스라는 교향악단을 세계 최고로 키운 위대한 지휘자였다. 그와 함께 일한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그로피우스와의 교감을 통해 전체와 하나가 되어가는 공동체적 일체감을 느꼈다. 그로피우스가 지나가는 일만으로도 바우하우스의 학생들은 영감을 얻었다.
그로피우스는 항상 저소득층을 위해 빛과 녹지가 가득한 어반 스케일의 건축에 큰 관심을 가졌다. 지멘스슈타트 베를린블록은 그런 그의 노력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그가 1927년에 제안한 가변하는 토털 시어터(Total Teatre)는 아직도 건축가들이 꿈꾸는 이상적 극장이다. 1928년 바우하우스를 떠난 후 1934년 영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그로피우스는 베를린에 사무실을 차린다. 영국에서 그는 맥스웰 프라이와 캠브리지 근교에 임핑턴빌리지대학(Impington Village College)을 설계한다. 그리고 1937년 하버드대학으로 초빙되면서 마르셀 브로이어와 함께 인상적인 현대 주택의 모델을 발표하며 뉴욕 세계박람회에 펜실베니아관을 설계한다.
후반기 그로피우스의 주요 작품은 1946년 설립된 건축가 협동체 TAC(The Architect Collaborative)과 함께 이루어졌다. TAC는 맨해튼 파크 에비뉴 한가운데 우아하면서도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많은 뉴요커로부터 파크 에비뉴의 사카이라인을 차단하였다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 1949년 TAC과 그로피우스는 하버드대학원 센터를 설계했다. 그는 하버드에 과거 건축에 몰두하는 에콜 데 보자르의 전통을 버리게 하고 사회적 가치와 공학에 근거한 새로운 건축을 심고자 하였다. 그가 하버드 건축대학원장에 취임하자 옛 교육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이러한 신사고는 미국 전역으로 번져갔다. 하버드에서 그로피우스는 일주일에 두 번 꼭 학생들의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그는 말이 드물고 더군다나 그리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모든 학생들은 그의 가르침대로 움직였다.
1952년 하버드 건축대학원을 허드넷에게 넘기고 그로피우스는 모든 사람들이 은퇴할 나이에 새로운 건축 세계로 나간다. 1953년에 로드아일랜드의 주거단지를, 1954년에는 일본을 방문하고, 1957년에는 당시 세계 최대의 항공사였던 펜암 항공사 사옥을 설계한다.
1956년 그는 개선장군과도 같이 독일로 돌아간다. 베를린에 그의 이름을 딴 오십만 가구를 위한 주거도시 그로피우스슈타트를 설계한다. 동시에 바우하우스 아카이브를 베를린에 세운다. 이어 미국 보스턴에 JFK연방사무국 건물을, 클리블랜드에 타워이스트를, 헌팅턴에 헌팅턴갤러리를 세웠다. 1967년에는 바우하우스 대(大)회고전이 대성공을 거둔다. 1969년 7월 5일 그가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전세계의 건축계가 그를 20세기의 가장 큰 일을 이룬 지도적 건축가로 애도했다.
그로피우스는 20세 때부터 영면할 때까지 66년동안 쉬지않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건축가로서의 임무에 헌신하였다. 그는 혼자 이루기보다 모든 사람과 함께 이루는 진정한 의미의 리더였다. 그는 천재는 아니었지만 어떠한 천재보다 더 위대한 것을 이룬 20세기 건축의 진정한 지도자였다.
그로피우스의 카리스마는 남을 추종하게 만드는 힘이 아니라 잠재력을 일깨우는 힘이었다. 그와 함께 일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와 함께 일하던 때를 가장 좋았던 때로 회상한다. 그로피우스는 건축가란 단지 자기분야의 전문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개혁하고 역사의 바른 흐름에 참여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믿고 그런 삶을 살았다. 그는 베를린의 주거 문제에 대해 쉬운 비판 대신 당장 실현 가능한 현실적이며 이상적인 대안을 제안하였다. 그가 미국으로 영구 이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에 그로피우스슈타트가 만들어진 것은 비판을 통한 수동적 현실참여가 아닌 대안 제시를 통한 능동적 현실 참여를 해온 그를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피우스는 나치를 싫어했고 나치도 그를 싫어했다. 독일 최고의 건축가가 독일을 떠난 것을 섭섭해하는 사람도 많았으나 건축가에게 집을 지을 기회와 가르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경우 스피노자와 같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수는 없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렌즈가 건축가에게 있어서는 프로젝트이고 캔버스이기 때문이다. 그는 유언으로 “나의 장례식이 축제가 되도록 하라”로 말했으며 유언대로 그의 장례식은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의 아름다운 축제가 되었다. 대부분의 천재는 문제인이기 십상인데 그는 비범한 재능과 범상한 인격을 지닌 대인이었다. 그는 대건축가가 해야 할 모든 일을 다 한 사람이었다.
파구스 구두공장(왼쪽), 유리 커튼월(오른쪽)
위의 사진 둘다 현대야 흔하지만 당시에는 파격적인 모습이였다.
발터 그로피우스작 Mounment to the March Dead(1921)
1923년 Gareth Steele 지원하에, 그는 20세기 디자인의 아이콘이며 바우하우스 가장영향력있는 디자인중 하나인 그의 유명한 손잡이를 디자인한다.
  • 가격6,000
  • 페이지수35페이지
  • 등록일2011.07.17
  • 저작시기201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9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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