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을 전후한 한중일 삼국의 사회경제변화 대응전략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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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머 리 말 >


<개항 전 삼국> -한국의 개항 전 모습
-중국의 개항 전 모습
-일본의 개항 전 모습


<개항 후 삼국 > -한국의 개항 후 모습
-중국의 개항 후 모습
-일본의 개항 후 모습


<종 합 비 교 >

본문내용

양국에게 커다란 인적, 물적 희생을 가져왔다. 일본의 경우, 예상을 넘어선 군사력 소실로 인해 전쟁 막바지에는 군사적 한계에 달해 있었다. 일본정부도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정하면서 상당한 희생이 따를 것임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한 예상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시작되었다. 러일전쟁의 특징은 위로부터의 전쟁이면서 동시에 아래로부터의 전쟁이기도 했다. 청일전쟁의 결정과정이 정부에 의해 주도되었던 데 비해 러일전쟁은 대외팽창과 대러강경책을 주장하는 사회적 여론이 크게 작용했다. 일본국민의 제국의식이 러일전쟁의 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런 국민의 지지하에 일본은 러일 전쟁을 승리로 끝냈고 본격적인 제국주의로의 길을 걷게 된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해외 식민지를 크게 확대하였다. 대만과 함께 조선을 식민지화 했으며 만주에의 세력확장 발판을 마련했다.
이 두 차례의 전쟁을 통해 일본은 산업혁명, 독점자본주의의 성립과 같은 자본주의적 발전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산업 발전의 주요 사항을 살펴보면 첫째는 면방적업의 성장이다. 둘째 무역 규모와 구조의 성장이다. 기계, 철강 등의 중공업제품의 수입이 더 큰 폭으로 증가했기 때문에 무역액이 크게 성장했고 적자폭이 차츰 확대되었다. 셋째 금본위제의 수립이다. 그리고 러일 전쟁 이후로 중공업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제철관련 산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예를 들면 야하따 제철소를 들수 있다. 조선업 부분에서도 일본 최초의 증기터번 생산에 성공해 일본의 조선기술이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음을 증명했다. 산업화는 일본에게 양지만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나 사회 한 구석 음지에서는 불만이 쌓여갔다. 산업화에 따라 노동자수가 급증했지만 이들의 노동조건은 열악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1901년 사회민주당이 결성되면서 사회주의 운동이 구체성을 띠기 시작했다. 이런 현실에 일본 정부는 대응책으로 일정한 유화책을 추진했다. 여러 가지 산업 진흥책과 공장법 제정을 통해 노동자를 보호하였다.
- 종합비교 -
지금까지 개항 전후의 삼국의 사회/경제의 변화 모습과 대응전략의 차이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삼국의 대응 차이가 난 이유를 생각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응전략의 차이가 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앞에서 계속 말했던 선행학습 그리고 현실의 심각성 인지 이 두 가지로 생각됩니다. 물론 지정학적 위치, 그리고 개항 전 국가 경쟁력 등도 중요하지만 삼국의 근대화 모습을 살펴봤을 땐 선행학습과 현실의 심각성 인지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보입니다. 또한 위의 두 가지 요소는 서로 결합된 요소라고도 생각합니다. 중국은 삼국 중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고 또한 지정학적 위치상 유럽과 가장 가까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항 전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서양과 많은 교류가 있었습니다. 이런 유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비하여 중국이 근대화를 실패한 이유는 바로 현실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 하고 방관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서양과의 전쟁을 새로운 세계관에서 문명 충돌로 보기 보다는 중국 역사 2000년 동안 흔히 있는 변방의 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 문물에 관해 학습하기 시작했고 중국의 아편전쟁을 보면서 현실의 심각성을 인지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그들은 미국과 개항 시기에도 불필요한 저항보다는 개화를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입니다. 물론 일본에서도 개화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조선과 중국에 비해서는 그 정도가 많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조선은 선행학습과 현실의 심각성 인지 이 두 가지가 모두 결핍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개항 시 거의 모든 사건과 현실 흐름을 중국을 통해 그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입니다. 그 정보들은 중화중심에서 서술된 것이였기 때문에 조선은 현실에 제대로 파악 할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조선 역사 500년 동안 조선은 중국과 마찬가지고 세상을 중국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에 변화하는 사회에 대해 인지를 못 했을 것입니다.
선행학습과 현실의 심각성 인지가 서로 결합된 요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게도 선행학습이 없으면 현실의 심각성을 인지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역으로도 생각 해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서구화의 현실의 심각성을 인지하였기 때문에 많은 유학생을 외국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그 중 대부분이 군사기술과, 군수시설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보낸 것이지만 이를 통해 일본은 이를 통해 경제/법률/건설 면에서 앞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산업혁명으로 성공 하였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일본보다 더 빠른 선행학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심각성을 인지 하지 못 하였기 때문에 일본에 뒤처지게 되었고 청일 전쟁의 패배를 기점으로 동아시아 최강 자리를 일본에 넘겨주게 됩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모두 결핍 된 조선은 보다 빠른 선행학습을 통한 일본에게 식민지화가 되면서 경제적, 군사적으로 착취 당하며 근대화에 가장 뒤처지게 됩니다. 누가 더 빠르게 학습을 하는가 이것이 20세기 일본과 조선의 위치를 정한 중요한 원인이였던 것 같습니다.
21세기 삼국은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역사를 통해 지금 현실의 상황에 대처해 나가기 위해 배우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20세기가 산업 근대화 , 부국강병 , 전쟁을 통한 경쟁이였다면 현재 21세기는 국가 경제력, 산업 기술, 무역, 금융 자본력에 의해 경쟁 되는 사회입니다. 그 내용만 달라졌을 뿐이지 1세기 만에 한국은 중국과 일본이라는 거대한 두 국가 사이에서 경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처참한 결과를 다시 한번 겪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근대의 역사를 교훈 삼아 현실을 헤쳐나가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20세기 근대화에서도 선행학습과 현실 심각성 인지 이 두 가지 요소가 중요하다고 말했었는데 지금 현실 역시도 마찬가지로 생각됩니다. 국가 경쟁력의 바탕이 되는 기술력과 국가간 경쟁력은 그것을 발전 시켜야겠다는 인지와 학습이 있어야만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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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3페이지
  • 등록일2011.08.05
  • 저작시기2011.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93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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