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에서 패전까지 근대일본의 전쟁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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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근대 일본의 전쟁 배경
1) 당시 국제 상황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인식
2) 일본 내부에서의 상황

2. 일본의 전쟁 의도 분석
1) 청일 전쟁 ~ 러일전쟁
2) 만주 사변 ~ 태평양 전쟁

3. 정리
1) 아시아 유일의 열강으로서의 일본
2) 필자 견해

본문내용

합병하고 만다. 이것은 일본이 마침내 조선에서 다른 경쟁국들을 물리치고 지배적인 위치를 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또한 조선의 집요한 독립 운동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조선을 합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신생 열강국에서 벗어나 발전하기 시작한 일본의 자본주의 경제가 더 이상 일본 내의 자체적인 자원만으로는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었다는 현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2) 중일 전쟁
중국에서는 국공내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갈수록 격렬해져가는 내전 속에서 일본은 중국에 확보한 이권의 수호와 본국으로 부터의 새로운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조선을 발판으로 하여 마침내 1930년 만주 사변을 시작으로 대륙 침공을 계시한다. 다행히 북방의 러시아는 사회 주의 혁명에 휩싸여 그 힘을 잃고 동아시아에 거의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러한 때에 벌어진 일본의 대륙 침공은 일본의 범아시아적 논리와 함께 그 속에 태생적으로 원료와 자원의 부족을 면치 못했던 일본 자본주의의 암울한 사정이 들어있다. 경제 발전 혹은 현상 유지를 위해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자원과 생산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근대 자본주의 시장에서 일본은 자원적인 면에서 마침내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예상은 빗나가 일본의 전면적인 대륙 침공은 국민당과 공산당 양쪽을 자극하여 제2차 국공합작을 이끌어내게 된다. 일본이 마침내 중일 전쟁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순간이었다.
(3) 일본 국내의 상황
중일 전쟁에 임하여 일본은 전체적으로 국가주의적 체제를 강화한다. 군부를 중심으로한 사상의 탄압이 일본 국내에서도 벌어졌고. 식민지 조선에도 그 통치의 강도를 높이며 일본은 국가를 총동원 태세로 몰아간다. 이전의 전쟁과는 다르게 일본 자체의 재정상황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전쟁이었기 때문에 그 전쟁에 의의를 부여하는데 정부는 총력을 다한다. 이미 국내에서 신격화되어 완벽하게 부활한 천황제를 기반으로 ‘대동아 전쟁’이라는 개념이 이때에 등장하게 된다.
(4) 태평양 전쟁
페리 제독의 내항 이후로 미국과 일본은 그다지 서로를 의식하지 않는 관계 내에서 수교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강국으로 성장한 미국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동아시아를 자신의 체제안으로 재편하기 시작하는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1940년대에 이르러 양국의 외교 대립은 극에 달한다. 미국은 일본의 중국 침공과 동아시아 침공에 대항해 일본에 대한 원유수출을 차단하게 되고 그것은 곧바로 일본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이 되어 돌아왔다. 이미 중일 전쟁으로 그 힘에 한계에 달해있던 일본은 최악의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마침내 진주만 습격을 통해 미국을 향한 마지막 반격에 돌입하게 된다. 전쟁은 결국 태생적으로 그 한계점이 명확했던 일본 ‘대본영’의 패배로 돌아가게 되고. 1945년 마침내 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열강국 일본은 미국에 무릎을 꿇는다.
3. 정리
1) 아시아 유일의 열강으로서의 일본
* 일본의 근대화
일본은 19세기 서양 열강의 대대적인 발호 속에서 국가의 자주성을 지키고 근대화된 국가로 다시 태어난 당시 아시아 유일의 열강국이라 해도 좋다. 일본이 이토록 빠르고 착실하게 근대화의 길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에도 시대에 쌓아온 일본의 근세 문화의 덕택이라고 볼 수 도 있다. 지방의 몇 개 번에 불과했던 조슈, 사츠마 등의 지사들이 막부를 뒤엎고 이뤄낸 메이지 유신같은 드라마틱한 근대화 과정을 빼고라도 구태의연한 구 체제에 매달려있던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서 비교적 서양 국가들과의 접촉이 잦았고 새로운 문화의 유입에 크게 반감을 가지지 않았던 일본은 아주 독특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 제국주의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으로서의 일본은 그 전쟁의 수행과 준비에 있어서 아주 철저했던 국가였다. 국민의 뜻을 모으기 위해 대규모의 선전 정책이 이루어졌고, 그러한 선전 정책 속에는 일본 국민의 머릿속에 주입되는 천황제 국가주의 체제와 범아시아적 선도 국가로서의 일본의 이미지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천황제 신화와 국가적 이데올로기가 거의 10년 단위로 전쟁을 치루었던 일본 국민들의 사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본 정부의 치밀한 사전 준비의 힘이었다.
2) 필자 견해
기존에 우리가 군국주의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은 ‘섬나라 오랑캐가 어쩌다 운이 좋아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그 힘을 이용해서 동아시아 전체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갔다.’ 정도 였다. 그러나 이 시기 일본은 명백한 국가의지로 움직이고 있는 근대 국가였고. 그 정치나 국민의 수준을 봐도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차이는 명백했다. 또한 일본이 거쳐온 여러 전쟁들은 단순히 일본의 진출 욕에 의한 침공이 아니라 자본주의 신생국 일본의 단점을 품은 전쟁들이었다. 근대적 자본주의에 대한 아무런 인프라가 갖추어 지지 않은 아시아에서 홀로 살아남기 위해서 벌인 신생일본자본주의의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태생적으로 그 한계가 분명했던 일본의 대본영은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에서 필연적인 패배를 맞는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났음에도 일본의 옛 망령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군국주의 일본의 가장 핵심이었던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일본 안에서 멀쩡하게 살아남아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21세기에 다시금 군의 부활을 꿈꾸고 우경화를 향해서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다.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은 주변 아시아 국가들을 자극하여 현재 아시아는 사실상 전세계의 화약고나 다름 없는 상태다. 우리 나라만 하더라도 인구 4500만의 소규모 국가가 현대전 무기로 무장한 정규병력만 80만에 예비병력 200만 가량이라는 사상 초유의 비정상 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고, 중국, 러시아 등도 그 군사력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안팎으로 나라를 정비하고 동아시아적인 연대체제를 이룩하여 일본을 견제하고 일본을 연구하는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서로간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화해와 이해의 분위기를 만들어 일본을 동아시아체제에 진정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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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8.19
  • 저작시기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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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96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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