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화와 예술복합 신문 삽화를 통해 살펴본 한국의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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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예술복합으로서의 삽화

2. 삽화, 한국의 근대를 읽다

2.1 근대적 연애 이미지와
2.2 민족적 근대의식과 근대적 주체성
2.3 상업 광고

3. 나가며

참고문헌

본문내용

그 안에는 주체적 근대성의 염원이 자리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이 개전한 이후부터는 민족언론과 출판사들이 강제 폐간되었고, 우리 땅의 병참기지화가 진행됨과 더불어 공업이 장려되었다. 이로 인해 민족자본은 몰락하고 반대로 일제자본은 우리 사회에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민중 착취와 수탈이 가시화되고 독자적 근대성은 일소되었으며, 따라서 근대 지식인들은 그보다 깊을 수 없는 좌절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인한 자기혐오는 결국 일제와 사상적으로 타협하거나 보다 극단적으로는 정현웅의 예에서처럼 스스로 천황의 신민이 되기를 자처하기까지 하였다.
지금까지의 발표를 정리하자면, 먼저 당대의 거대media였던 인쇄매체의 예술복합으로서 가장 혁혁한 역할을 수행한 삽화의 특성과 역사적 의의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그 자체가 수입된 근대 출판기술을 통해 탄생한 것이니만큼 모더니티의 효과적 도구로서 빛을 발했던 삽화는 대한제국 시절부터 애국계몽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식민지 현실의 당대 지식인들의 정신적 투쟁의 무기이자 독자적 근대성의 확립을 위한 대중소통 수단으로서 활용되었다. 서구의 새로운 예술사조의 수용, 새로운 여성의 입지 확립 등 ‘모던’이라는 것은 당대 우리사회를 휩쓸었던 서구적 국가개조론의 핵심 가치였다. 하지만 지식을 통한 국가수호 및 건설의 중한 책임을 떠맡았던 당대 지식인들은 서구문물의 이식에는 반발하는 모습을 보였고, 독자적 근대성에 대한 그들의 높은 염원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끝내 이러한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부분의 저명한 삽화가들이 훼절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절망이 불러일으킨 광적 히스테리의 결과로 보여지는 이들의 훼절은, 일제가 그들의 일방적 힘을 이용해 현 사회를 상업적으로 속물화시켜버림으로써 대중저항의식이 약화된 데에 기인한다고 보여지며, 이는 관료와 지식층들이 앞다퉈 사회의 속물화를 부르짖는 작금의 현실에 근본적 물음을 던지는 추론적 귀결이라 보여진다.
2.3. 상업성
서구 근대성과 자본, 그리고 산업은 불가분의 관계임이 분명하다. 근대적 자본주의의 형성은 주체적 역사담론에 의거하여 조선말 무렵 우리나라에서도 미약하나마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적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자본을 통한 상거래와 산업발전이 사회의 주요 동력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치하 시기로 봄이 맞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다양하고 많은 삽화광고가 등장하여 대중의 구매욕을 자극하였다. 광고에는 책과 화장품, 서양식 의복에서 심지어는 자동차까지 등장하였다. 모두가 나라 밖으로부터 유입된 소위 신문물이라고 하는 것들이었다.
김복진이 광고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해 전문적인 소견을 남긴 만큼, 당시 광고의 파급력이라는 것은 대단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민중이 실질적으로 접할 수 있는 당대 대중매체는 일제에 의해 상당부분 장악된 상태였고 그 당시 일제는 우리 사회에 속물적 상업성을 정책적으로 부추겼다. 특히 광고라는 신매체를 활용하여 물질적 풍요를 홍보하고 일제야말로 우리 땅을 문명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외양적 풍요로움과 달리 우리나라 민중들의 삶은 모진 수탈로 인해 무척이나 피폐해져있었고 빈부차도 극심해졌다. 근대성이라는 개념과는 뗄 수 없는 관계인 상업성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나라에는 무척이나 퇴행적이고 작위적이며 강압적인 속성을 띠었고, 단순한 서구와 일본 제도의 이식에 불과했다. 이 와중에 삽화광고는 효과적인 선전 매체로서 큰 역할을 맡았다.
삽화광고는 서구식 근대화가 이 땅에 뿌리내리는 데에 필수 요소로서의 상업성을 강화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역할을 긍정적 기여라고는 볼 수 없다는 역사적 한계성을 갖고 있다. 일제는 이 땅의 산업적 발전에는 하등의 관심조차 가지지 않은 채, 정책적 선동수단으로 삽화광고를 이용, 신문물 전파에 기여한다는 인상을 대중에 심기를 원했다.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소비중심의 상거래가 지속되다 보니, 일제의 수탈까지 겹치며 자연히 민중 생활은 피폐해졌다. 이처럼 삽화광고를 통해 그 이용 측면에서 우리 근대 지식인들과 일제의 대립 양상을 알아볼 수 있으며, 일방적인 힘의 불균형을 이용해 사회의 말초적 부분을 자극함으로써 정책적 야욕만을 챙긴 일제의 침탈 행위에 대하여서도 알아볼 수 있다.
3. 나가며
대개 한국의 근대형성기의 문화사적 연구를 위한 텍스트는 문자매체에 한정지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1910~30년대에 신문 지면에 등장했던 삽화는 통속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텍스트에 종속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본조는 지금껏 보조적 매체로 인식된 삽화에서 종전의 연구보다 다양한 근대적 논의들을 이끌어 낼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삽화는 당대의 주요 미디어였던 인쇄매체의 예술복합적 산물로서, 신문연재소설에서는 사회문화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균일적인 대중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시사만평 삽화는 식민지 현실에서 당대 지식인들이 독자적 근대성을 확립하기 위한 대중소통의 수단으로 활용된 측면이 있었다. 한편으로 상업광고에서는 단순한 근대적 상업성의 발현이 아닌, 일제의 정책적 야욕으로서 삽화가 이용된 부정적인 모습도 살펴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의 역할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삽화 당대 사회적 흐름을 반영하는 명경(明鏡)이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당시 삽화는 단순히 판매부수 향상을 위한 미끼로서 텍스트를 보조한 데에 그친 게 아니라, 나름의 근대적 맹아를 품고 한국의 근대문화 형성에 기여함과 동시에, 식민지 근대성의 한계를 넘기 위한 당대 지식인들의 메시지 전달 통로, 일제의 통치전략을 위한 무의식적인 식민근대성의 주입 통로로 다양하게 역할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삽화’라는 언어가 갖는 종속적이고 수동적인 이미지를 뛰어넘어 용어 자체에 천착한다면, 삽화(揷畵)의 ‘揷(꽂을 삽)’자 자체가 어떤 텍스트에 ‘끼워질 수밖에 없는’ 삽화의 한계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간과되었던 삽화의 사료로서의 의의를 밝히고 그것의 위상을 재고해본 데에서 본 발표의 의의를 찾고자 한다.
참고문헌
권보드래, 『연애의 시대』, 현실문화연구, 2004.
오인문, 「신문연재소설의 변천」,『신문연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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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8.20
  • 저작시기2011.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96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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