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근대 조각가 정관 김복진의 일생
Ⅲ. 근대 조각가 정관 김복진의 한국근대문예운동
Ⅳ. 근대 조각가 정관 김복진의 비평활동
Ⅴ. 근대 조각가 정관 김복진의 생활예술론
참고문헌
Ⅱ. 근대 조각가 정관 김복진의 일생
Ⅲ. 근대 조각가 정관 김복진의 한국근대문예운동
Ⅳ. 근대 조각가 정관 김복진의 비평활동
Ⅴ. 근대 조각가 정관 김복진의 생활예술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을 자세히 설명한 다음 그것은 <생활에서 유리된 예술>이기 때문에 부정(否定)할 수밖에 없음을 밝히고 자기 나름대로의 생활예술론을 내세우면서 파스큘라의 의의와 문예운동사에서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예술, 이것이 그리도 존엄할 것이 없다. 하부구조인 생활에 조그마한 지동(地動)이라도 있으면 상부구조의 하나인 예술에는 몇 배 더 큰 영향이 있는 것이다.
존엄한 예술에 대한 부정, 이로부터 김복진의 예술론은 출발했다. 이 때의 존엄한 예술이란 1920년대 초의 병적 낭만주의와 유미주의를 포함하는 예술지상주의를 가리킨다. 예술지상주의의 존엄한 예술과 상징의 예술을 부정하고 소박한 생활 예술을 주장한 것을 보면 이미 그 때 마르크스 예술론에 상당히 다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예술과 사회(삶)의 일원론적 관점에 서 있었음을 말하며 동시에 반유심론자였음을 말해 주는 중대한 단서(端緖)이다.
그렇다면 김복진은 언제부터 이러한 반유심론과 역사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을까? 아우 김기진에 의하면 형 김복진은 1924,5년경 급작스럽게 사회주의 사상으로 기울어 갔다. 그렇지만 1921년 동경미술학교 재학시절의 행적(行蹟)은 전혀 다른 단서를 보여준다. 1920년 6월 동경에 도착한 김복진은 9월 조각과 선과생(鮮科生)으로 입학했고 1921년 서울청년회 회원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이영(李英) 김사국(金思國) 등이 중심이었던 서울청년회는 다른 사회주의 단체인 북풍회나 화요회와 대립 관계에 놓여 있었다. 김복진이 서울청년회를 통해서 급진적 사회주의 운동에 깊이 빠져들어 간 것은 혈기왕성한 20세 초반이라는 나이와도 관계가 있겠고 또 열정적인 그의 성격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일본 유학생 시절이던 1922년, 문예단체 토월회를 구성하는데 앞장 선 김복진은 1923년 9월, 카프의 모태가 된 파스큘라를 조직했다. ①삼일운동 - ②서울청년회 - ③토월회 - ④파스큘라로 이어지는 역정(歷程)에서 우리는 일관된 하나의 맥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최종 목표였던 반제 민족해방이라는 역사적 전망이다. 그 반제(反帝) 항일(抗日)의 양상은 ①삼일운동에서는 실천 행위로, ②서울청년회에서는 사상적 탐색으로, ③토월회에서는 미자각적인 문예운동으로, ④파스큘라에서는 자각적인 조직운동으로 각각 드러난다. 이후 그는 ⑤고려공산청년회19) - ⑥ML당, 조선공산당 - ⑦투옥으로 이어지는 식민지 문예운동가의 전형적인 길을 걸어갔다.
그의 사회주의적 실천력은 조직 부분에서 가장 빛났다. 그는 항상 예술을 운동으로 이해하고자 했으며 예술가들을 모아 단체를 조직하는데 앞장섰다. 그의 예술은 조직 속에서 성장했고 그는 끊임없이 조직에 간여했다. 그는 조직을 단체(團體)로 이해하지 않고 생활 그 자체로 이해했으며 예술이 생활로부터 격리되면 안 되는 것처럼 예술가가 조직으로부터 격리(隔離)되면 안 된다는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생래적인 조직주의자처럼 보이는 것은 그의 역사유물론적인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예술과 생활과 조직을 정확한 등가(等價)로 인식한 점, 이것이야말로 김복진이 가지는 문예운동사에서의 의의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기진(1941) : 고 김복진 반생기, 춘추
김기진(1958) : 우리가 걸어 온 길 30년, 사상계
윤용이·유홍준·이태호 공저(1997) : 한국미술사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 도서출판 학고재
임두빈(1998) : 한국미술사 101장면, 서울 : 가람기획
최석태(1997) : 선구이면서 거봉인 존재 김복진의 예술과 세계, 김복진 추모 미술제 서문
최우석 : 김복진군의 미전 인상기를 보고, 동아일보(1925, 6, 13)
예술, 이것이 그리도 존엄할 것이 없다. 하부구조인 생활에 조그마한 지동(地動)이라도 있으면 상부구조의 하나인 예술에는 몇 배 더 큰 영향이 있는 것이다.
존엄한 예술에 대한 부정, 이로부터 김복진의 예술론은 출발했다. 이 때의 존엄한 예술이란 1920년대 초의 병적 낭만주의와 유미주의를 포함하는 예술지상주의를 가리킨다. 예술지상주의의 존엄한 예술과 상징의 예술을 부정하고 소박한 생활 예술을 주장한 것을 보면 이미 그 때 마르크스 예술론에 상당히 다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예술과 사회(삶)의 일원론적 관점에 서 있었음을 말하며 동시에 반유심론자였음을 말해 주는 중대한 단서(端緖)이다.
그렇다면 김복진은 언제부터 이러한 반유심론과 역사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을까? 아우 김기진에 의하면 형 김복진은 1924,5년경 급작스럽게 사회주의 사상으로 기울어 갔다. 그렇지만 1921년 동경미술학교 재학시절의 행적(行蹟)은 전혀 다른 단서를 보여준다. 1920년 6월 동경에 도착한 김복진은 9월 조각과 선과생(鮮科生)으로 입학했고 1921년 서울청년회 회원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이영(李英) 김사국(金思國) 등이 중심이었던 서울청년회는 다른 사회주의 단체인 북풍회나 화요회와 대립 관계에 놓여 있었다. 김복진이 서울청년회를 통해서 급진적 사회주의 운동에 깊이 빠져들어 간 것은 혈기왕성한 20세 초반이라는 나이와도 관계가 있겠고 또 열정적인 그의 성격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일본 유학생 시절이던 1922년, 문예단체 토월회를 구성하는데 앞장 선 김복진은 1923년 9월, 카프의 모태가 된 파스큘라를 조직했다. ①삼일운동 - ②서울청년회 - ③토월회 - ④파스큘라로 이어지는 역정(歷程)에서 우리는 일관된 하나의 맥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최종 목표였던 반제 민족해방이라는 역사적 전망이다. 그 반제(反帝) 항일(抗日)의 양상은 ①삼일운동에서는 실천 행위로, ②서울청년회에서는 사상적 탐색으로, ③토월회에서는 미자각적인 문예운동으로, ④파스큘라에서는 자각적인 조직운동으로 각각 드러난다. 이후 그는 ⑤고려공산청년회19) - ⑥ML당, 조선공산당 - ⑦투옥으로 이어지는 식민지 문예운동가의 전형적인 길을 걸어갔다.
그의 사회주의적 실천력은 조직 부분에서 가장 빛났다. 그는 항상 예술을 운동으로 이해하고자 했으며 예술가들을 모아 단체를 조직하는데 앞장섰다. 그의 예술은 조직 속에서 성장했고 그는 끊임없이 조직에 간여했다. 그는 조직을 단체(團體)로 이해하지 않고 생활 그 자체로 이해했으며 예술이 생활로부터 격리되면 안 되는 것처럼 예술가가 조직으로부터 격리(隔離)되면 안 된다는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생래적인 조직주의자처럼 보이는 것은 그의 역사유물론적인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예술과 생활과 조직을 정확한 등가(等價)로 인식한 점, 이것이야말로 김복진이 가지는 문예운동사에서의 의의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기진(1941) : 고 김복진 반생기, 춘추
김기진(1958) : 우리가 걸어 온 길 30년, 사상계
윤용이·유홍준·이태호 공저(1997) : 한국미술사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 도서출판 학고재
임두빈(1998) : 한국미술사 101장면, 서울 : 가람기획
최석태(1997) : 선구이면서 거봉인 존재 김복진의 예술과 세계, 김복진 추모 미술제 서문
최우석 : 김복진군의 미전 인상기를 보고, 동아일보(1925,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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