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낭만주의(낭만파) 작곡가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Ⅲ. 낭만주의(낭만파)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
Ⅳ. 낭만주의(낭만파)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
Ⅴ. 낭만주의(낭만파) 작곡가 루이 헥토르 베를리오즈
Ⅵ. 낭만주의(낭만파)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
Ⅶ. 낭만주의(낭만파) 작곡가 프레데릭 쇼팽
Ⅷ. 낭만주의(낭만파) 작곡가 칼 마리아 폰 베버
참고문헌
Ⅱ. 낭만주의(낭만파) 작곡가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Ⅲ. 낭만주의(낭만파)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
Ⅳ. 낭만주의(낭만파)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
Ⅴ. 낭만주의(낭만파) 작곡가 루이 헥토르 베를리오즈
Ⅵ. 낭만주의(낭만파)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
Ⅶ. 낭만주의(낭만파) 작곡가 프레데릭 쇼팽
Ⅷ. 낭만주의(낭만파) 작곡가 칼 마리아 폰 베버
참고문헌
본문내용
리에 도착했는데, 이 해에 바르샤바 함락의 비보를 듣고 <혁명 연습곡>을 작곡했다.
파리는 빈이나 그 밖의 곳보다 폴란드인들을 백안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런던 행을 단념하고, 파리에 정주하기로 했다. 파리에서의 쇼팽은 그곳의 사교계에 출입하면서, 우아한 피아노 연주로 사교계의 총아가 되었다. 그는 이 곳 사교계에서 케루비니, 롯시니, 멘델스존, 리스트, 베를리오즈, 문학가인 하이네, 발작조르즈 상드 등과 친교를 맺었다.
이윽고 피아니스트, 교사로서 생활에 여유가 생겨 작곡에 전념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1836년부터 자기작품을 출판하여 명성을 얻어가기 시작했고, 1835년 드레스덴에서 마리아 보젠스카와 알게 되어 약혼까지 했으나 실패에 그쳤다. 두 번에 걸친 드레스덴 방문 후에 파리로 돌아가는 도중 라이프찌히에서 클라라비크, 슈만과 만났다. 1836년에 리스트의 소개로 조르즈 상드와 만나서 처음에는 별로 호감을 갖지 않았으나, 결국 1837년에서 46년까지 9년간 조르즈 상드와의 교제가 계속되었다. 그녀는 쇼팽보다 9세나 위였는데, 동거 생활을 하여서 결핵에 걸린 쇼팽을 마요르카 섬에서 요양시키기도 하며, 극진히 그를 보살펴주었다. 그러나 상드가 화려한 사교생활을 좋아하는 것에 비해, 쇼팽은 내성적이고 고독을 즐기는 성격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생활은 언제나 갈등의 연속이었었고, 쇼팽과 상드의 아이들 이의 불화와 반목으로 마침내 1847년에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에 가장 원숙된 작품들이 쓰여졌다. 1848년경부터는 쇼팽의 병이 악화되어 연주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2월의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은퇴하여 피아노 교사 남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해 가을에 건강이 조금 회복된 것을 계기로 스코틀랜드를 비롯하여 맨체스터, 글래스고, 에든버러, 런던 등지에서 연주회를 갖고, 11월에 파리로 돌아왔으나 무리한 연주 여행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1849년 10월 17일 많은 친구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39세 젊은 나이에 세상과 이별하고 만다. 쇼팽은 폴란드인과 프랑스인의 혼혈아였기에 폴로네즈나 마주르카는 물론 다른 여타의 작품에 있어서도 폴란드 민족음악의 특질을 볼 수 있다.
그는 대부분 피아노곡만을 썼는데 그 수법이 메카닉한 그리고 특히 타악기적 피아노를 성악처럼 노래하려고 해서, 무수한 꾸밈음을 사용한 선율을 장식한 것, 그 연주에 임해서 템포 루바토를 사용한 것, 또 악곡 구성에 있어서 참신하고 기발하며, 매우 치밀한 피큐레이션을 종횡무진으로 사용한 것 등이 현저한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Ⅷ. 낭만주의(낭만파) 작곡가 칼 마리아 폰 베버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 악파의 창시자이며, 그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음악가이자 유랑 극단의 단장이기도 하였다. 이 같은 환경 속에서 자란 베버는 작곡가로서의 재질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릴 적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터득하여 12세기 때 피아노 연주 제1집을 출판해 낼 정도로 신동이었다. 이후 그는 드레스덴의 오페라 단장, 프라하에서 합창 단장 등으로 활약하면서 완숙한 음악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작곡가로서만이 아니라 그는 피아니스트, 지휘자 등으로도 뛰어났으며, 지휘봉을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오케스트라의 연주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의 중요한 작품은 피아노 곡과 무대 연주곡 등이다. 한편 연주 기법이 뛰어난 연주회용 피아노 작품들은 「Invitation to the Dance (무도회의 초대)」를 빼고는 오늘날 거의 연주되고 있지 않다. 오페라 「Der Freischutz(마탄의 사수)」는 독일의 전설에 그 기초를 두고 있으며, 중류층의 감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베버는 이태리 전통의 오페라 형식을 탈퇴했으면서도 이태리 고유의 아리아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전통적인 독일 오페라는 합창 효과, 오케스트라의 음색, 그리고 이야기 줄거리 등으로 특징지어 진다. 주요 오페라 곡으로는 「Der Freischuz」, 「Euryanthe」, 「Oberon」 등이 있으며, 특히 「Oberon」은 베버가 1826년 사망하기 몇 개월 전에 영국에서 처음 출판된 바 있다.
참고문헌
대림출판사(1978), 세계음악가전집 바그너
송숙영 외, 쇼팽의 음악과 사랑, 범우사
음악지우사 편, 바그너 - 작곡자별 명곡해설 라이브러리, 음악세계
채종욱(2007), 낭만주의 조각을 위한 서문, 채스
홍세원, 서양음악사, 현대음악출판사
홍정표 역(1996), 멘델스존 엘리야, 서울 : 호산나 음악사
Alen Walker, 쇼팽연구, 태림
파리는 빈이나 그 밖의 곳보다 폴란드인들을 백안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런던 행을 단념하고, 파리에 정주하기로 했다. 파리에서의 쇼팽은 그곳의 사교계에 출입하면서, 우아한 피아노 연주로 사교계의 총아가 되었다. 그는 이 곳 사교계에서 케루비니, 롯시니, 멘델스존, 리스트, 베를리오즈, 문학가인 하이네, 발작조르즈 상드 등과 친교를 맺었다.
이윽고 피아니스트, 교사로서 생활에 여유가 생겨 작곡에 전념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1836년부터 자기작품을 출판하여 명성을 얻어가기 시작했고, 1835년 드레스덴에서 마리아 보젠스카와 알게 되어 약혼까지 했으나 실패에 그쳤다. 두 번에 걸친 드레스덴 방문 후에 파리로 돌아가는 도중 라이프찌히에서 클라라비크, 슈만과 만났다. 1836년에 리스트의 소개로 조르즈 상드와 만나서 처음에는 별로 호감을 갖지 않았으나, 결국 1837년에서 46년까지 9년간 조르즈 상드와의 교제가 계속되었다. 그녀는 쇼팽보다 9세나 위였는데, 동거 생활을 하여서 결핵에 걸린 쇼팽을 마요르카 섬에서 요양시키기도 하며, 극진히 그를 보살펴주었다. 그러나 상드가 화려한 사교생활을 좋아하는 것에 비해, 쇼팽은 내성적이고 고독을 즐기는 성격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생활은 언제나 갈등의 연속이었었고, 쇼팽과 상드의 아이들 이의 불화와 반목으로 마침내 1847년에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에 가장 원숙된 작품들이 쓰여졌다. 1848년경부터는 쇼팽의 병이 악화되어 연주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2월의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은퇴하여 피아노 교사 남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해 가을에 건강이 조금 회복된 것을 계기로 스코틀랜드를 비롯하여 맨체스터, 글래스고, 에든버러, 런던 등지에서 연주회를 갖고, 11월에 파리로 돌아왔으나 무리한 연주 여행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1849년 10월 17일 많은 친구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39세 젊은 나이에 세상과 이별하고 만다. 쇼팽은 폴란드인과 프랑스인의 혼혈아였기에 폴로네즈나 마주르카는 물론 다른 여타의 작품에 있어서도 폴란드 민족음악의 특질을 볼 수 있다.
그는 대부분 피아노곡만을 썼는데 그 수법이 메카닉한 그리고 특히 타악기적 피아노를 성악처럼 노래하려고 해서, 무수한 꾸밈음을 사용한 선율을 장식한 것, 그 연주에 임해서 템포 루바토를 사용한 것, 또 악곡 구성에 있어서 참신하고 기발하며, 매우 치밀한 피큐레이션을 종횡무진으로 사용한 것 등이 현저한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Ⅷ. 낭만주의(낭만파) 작곡가 칼 마리아 폰 베버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 악파의 창시자이며, 그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음악가이자 유랑 극단의 단장이기도 하였다. 이 같은 환경 속에서 자란 베버는 작곡가로서의 재질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릴 적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터득하여 12세기 때 피아노 연주 제1집을 출판해 낼 정도로 신동이었다. 이후 그는 드레스덴의 오페라 단장, 프라하에서 합창 단장 등으로 활약하면서 완숙한 음악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작곡가로서만이 아니라 그는 피아니스트, 지휘자 등으로도 뛰어났으며, 지휘봉을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오케스트라의 연주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의 중요한 작품은 피아노 곡과 무대 연주곡 등이다. 한편 연주 기법이 뛰어난 연주회용 피아노 작품들은 「Invitation to the Dance (무도회의 초대)」를 빼고는 오늘날 거의 연주되고 있지 않다. 오페라 「Der Freischutz(마탄의 사수)」는 독일의 전설에 그 기초를 두고 있으며, 중류층의 감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베버는 이태리 전통의 오페라 형식을 탈퇴했으면서도 이태리 고유의 아리아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전통적인 독일 오페라는 합창 효과, 오케스트라의 음색, 그리고 이야기 줄거리 등으로 특징지어 진다. 주요 오페라 곡으로는 「Der Freischuz」, 「Euryanthe」, 「Oberon」 등이 있으며, 특히 「Oberon」은 베버가 1826년 사망하기 몇 개월 전에 영국에서 처음 출판된 바 있다.
참고문헌
대림출판사(1978), 세계음악가전집 바그너
송숙영 외, 쇼팽의 음악과 사랑, 범우사
음악지우사 편, 바그너 - 작곡자별 명곡해설 라이브러리, 음악세계
채종욱(2007), 낭만주의 조각을 위한 서문, 채스
홍세원, 서양음악사, 현대음악출판사
홍정표 역(1996), 멘델스존 엘리야, 서울 : 호산나 음악사
Alen Walker, 쇼팽연구, 태림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