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3. 철학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것
4. 여유로움과 생각의 필요성
생명을 살리는 물을 찾아 떠나는 바리공주의 신화
작품에 대한 논평적 근접
결론
4. 여유로움과 생각의 필요성
생명을 살리는 물을 찾아 떠나는 바리공주의 신화
작품에 대한 논평적 근접
결론
본문내용
얘기가 포개지는 걸 보면, 결말 글쓴이가 이제세계의 상반과 갈등을 안배하기 위하여 내어놓는 처방전이란 화합과 용서, 이를 통한 사람성의 만회, 또는 영혼의 도움으로 끝되는 셈이다.
이런 형편이지만, 이와 같은 대안은 글쓴이가 그동안 관점해 온 역사와 발전에 대한 낙천주의를, 민중의 유래적 건강성에 대한 그의 신임을 이제세계가 감당해 낼 수 있을 때에야 드디어 납득력을 가진다 할 것이다. 어린아이기 이후 정규양성의 가능성을 갖지 못하이었음에서도 표나게 드러나는 바리의 이타심은 열외로 치더라도, 요건부 온정을 곧잘 내비치는 박소룡과 루의 캐릭터가 소설 안에서도 까지 중대히 열외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바는 결말 이제에 대한 능가적인 낙망이다. 소설에서 바리나 에밀리가 품는 용서의 방향은 모두 일방적인 것으로 모이된다. 산 자가 망자에, 해방인이 속리듬에, 가진 자가 덜 가진 이에게 ‘베푸는’ 다양한 갈래의 용서를, 어떤 행위든 대답하는 대가와 금액을 신청하는 이제의 돈주의 세계사회는 받아들일 형편이 못된다.
또 하나, 글쓴이는 바리와 그의 동료들이 모여 사는 런던의 차별나타운과 램버스 구역 언저리를 웅대히 풍족한 다양성을 가진 인종과 문화와 신앙이 평안롭게 동존하는 공간으로 기예한다. 이런 형편이지만, 이를 사회적 소수자들의 어떤 연대의 표지 정도로 설명한다면 모르되 그 이상, 리버럴리즘의 어떤 소이상형으로 제공하려고 하는 것은 동감하기 어렵다. 파리코뮌이나 80년 광주에 타당하는 경우에서같이, 역사 속에서 그런 것은 특정한 형편과 소크기 대회라는 시공간의 테 안에서만 가능하이었던 상태기 때문에 이러하였다. 덧붙여 손가락질하자면 글쓴이는 미국의 대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전쟁을 무안한 전쟁이라 법칙하면서도 이에 복종하는 무슬림 청년들의 연대와 도움 움직임을 ‘철없는 짓’으로 법칙한다. 선의로 설명하면 이와 같은 태도를 일종의 균형감상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형편이지만, 애매모호한 스탠스에서 외치는 용서와 화합의 메시지는 울림을 얻기 어렵다는 사실 마찬가지로 이에 덧붙여 자명하다. 1990년대 초반 이래, 발 디딜 곳이 물러진 민중학예권의 논평판들이 애타게 부르짖던 ‘나라의 우상, 시장의 우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모델’의 모호함에서 ‘현재 시대의 생명을 살리는 물’를 말하는 황석영의 어두운 그림자를 엿보는 것은 내 구상력이 너무 열린 탓일까?
이런 형편이지만,, 이런저런 트집에서도 무릅쓰고, [바리데기』는 탈북의 이제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제세계의 분잡상에 찬찬히 둘러보는 우려의 눈길을 건네고 있다는 점에서 뜻이 큰 작품이다.
결론
글쓴이는 사람 치료에 대한 원형적인 이미지를 바리데기 얘기 속에서 끄집어낸다. 황석영의 소설 '바리 데기'는 바리가 이제 속에서 아득바득 살다가도 꿈에서 우쭐우쭐 얘기 따라 맡은 배역에 견실하노라면 어느덧 이제와 꿈의 구획이 사라진다. 이제나 꿈이나 모두 현재가 아닌 것이다. 현재라고 언송하고 지나갈 수 있는 것은 다만 바리의 태도뿐이다. 이것에 대한 글쓴이의 메시지는 책의 후반부에 바리가 회교인 조부를 만나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의 양성의 내역이 같은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내역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 개인 개인의 치료를 넘어 겨레의 치료, 나아가 인류의 치료에 대한 얘기까지 담아내는 것이다. 바리데기 얘기는 이와 같은 치료에 대한 원형을 담고 있으며 비단 이 얘기뿐만 아니라 전 세계 문화 속에 이와 같은 원형의 편린들이 흩어져 있다. 글쓴이는 인터뷰에서 바로 이것이 세계문단이 한국학예에 바라는 점이라고 말한다. 거듭 말하면 세계문단이 각 나라 각 겨레의 학예에 바라는 점이다.
이런 형편이지만, 이와 같은 대안은 글쓴이가 그동안 관점해 온 역사와 발전에 대한 낙천주의를, 민중의 유래적 건강성에 대한 그의 신임을 이제세계가 감당해 낼 수 있을 때에야 드디어 납득력을 가진다 할 것이다. 어린아이기 이후 정규양성의 가능성을 갖지 못하이었음에서도 표나게 드러나는 바리의 이타심은 열외로 치더라도, 요건부 온정을 곧잘 내비치는 박소룡과 루의 캐릭터가 소설 안에서도 까지 중대히 열외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바는 결말 이제에 대한 능가적인 낙망이다. 소설에서 바리나 에밀리가 품는 용서의 방향은 모두 일방적인 것으로 모이된다. 산 자가 망자에, 해방인이 속리듬에, 가진 자가 덜 가진 이에게 ‘베푸는’ 다양한 갈래의 용서를, 어떤 행위든 대답하는 대가와 금액을 신청하는 이제의 돈주의 세계사회는 받아들일 형편이 못된다.
또 하나, 글쓴이는 바리와 그의 동료들이 모여 사는 런던의 차별나타운과 램버스 구역 언저리를 웅대히 풍족한 다양성을 가진 인종과 문화와 신앙이 평안롭게 동존하는 공간으로 기예한다. 이런 형편이지만, 이를 사회적 소수자들의 어떤 연대의 표지 정도로 설명한다면 모르되 그 이상, 리버럴리즘의 어떤 소이상형으로 제공하려고 하는 것은 동감하기 어렵다. 파리코뮌이나 80년 광주에 타당하는 경우에서같이, 역사 속에서 그런 것은 특정한 형편과 소크기 대회라는 시공간의 테 안에서만 가능하이었던 상태기 때문에 이러하였다. 덧붙여 손가락질하자면 글쓴이는 미국의 대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전쟁을 무안한 전쟁이라 법칙하면서도 이에 복종하는 무슬림 청년들의 연대와 도움 움직임을 ‘철없는 짓’으로 법칙한다. 선의로 설명하면 이와 같은 태도를 일종의 균형감상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형편이지만, 애매모호한 스탠스에서 외치는 용서와 화합의 메시지는 울림을 얻기 어렵다는 사실 마찬가지로 이에 덧붙여 자명하다. 1990년대 초반 이래, 발 디딜 곳이 물러진 민중학예권의 논평판들이 애타게 부르짖던 ‘나라의 우상, 시장의 우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모델’의 모호함에서 ‘현재 시대의 생명을 살리는 물’를 말하는 황석영의 어두운 그림자를 엿보는 것은 내 구상력이 너무 열린 탓일까?
이런 형편이지만,, 이런저런 트집에서도 무릅쓰고, [바리데기』는 탈북의 이제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제세계의 분잡상에 찬찬히 둘러보는 우려의 눈길을 건네고 있다는 점에서 뜻이 큰 작품이다.
결론
글쓴이는 사람 치료에 대한 원형적인 이미지를 바리데기 얘기 속에서 끄집어낸다. 황석영의 소설 '바리 데기'는 바리가 이제 속에서 아득바득 살다가도 꿈에서 우쭐우쭐 얘기 따라 맡은 배역에 견실하노라면 어느덧 이제와 꿈의 구획이 사라진다. 이제나 꿈이나 모두 현재가 아닌 것이다. 현재라고 언송하고 지나갈 수 있는 것은 다만 바리의 태도뿐이다. 이것에 대한 글쓴이의 메시지는 책의 후반부에 바리가 회교인 조부를 만나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의 양성의 내역이 같은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내역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 개인 개인의 치료를 넘어 겨레의 치료, 나아가 인류의 치료에 대한 얘기까지 담아내는 것이다. 바리데기 얘기는 이와 같은 치료에 대한 원형을 담고 있으며 비단 이 얘기뿐만 아니라 전 세계 문화 속에 이와 같은 원형의 편린들이 흩어져 있다. 글쓴이는 인터뷰에서 바로 이것이 세계문단이 한국학예에 바라는 점이라고 말한다. 거듭 말하면 세계문단이 각 나라 각 겨레의 학예에 바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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