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전환기의 문학가 매천(梅泉) 황현(黃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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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서론

II. 황현의 생애와 문학.
1. 생애.
2. 시문학 유형. - 황현의 문학관과 작품.
1) 황현의 문학관.
2) 애국시.
3) 농촌시
4) 서경시
III. 황현의 작가의식.
1. 기존의 연구.
1) 시문학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
2) 개인에 대한 연구.
3) 민족의 농촌현실에 대한 연구.

Ⅳ. 결론

본문내용

자료들은 생애를 서두에 간략히 언급하거나 황현이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는데 활용하는 정도지만, 이 자료들은 황현의 생애를 따로 파트를 나누어 다루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토대로 글의 전체적인 내용이 이어지면서 황현 개인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3) 황현의 민족ㆍ역사의식에 대한 연구.
황현의 시에 대한 연구동향 중 마지막은 민족ㆍ역사의식에 대한 연구이다. 이와 관련된 자료로는 김창주가 쓴 「梅泉 黃玹의 민족의식(民族意識)」, 이이화가 쓴 「『매천야록』은 근대사의 보고(寶庫)」, 이상식이 쓴 「梅泉 黃玹의 역사의식(歷史意識)」, 하우봉의 「황현의 역사의식에 대한 연구」, 김창수의 「한국민족주의형성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이 연구들은 황현이라는 인물과 그의 시를 역사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다. 특히 황현의 『매천야록』 6권 7책으로 된 필사본으로, 1864년 흥선대원군의 집정시기부터 1910년(순종 4년)국권피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비사서(秘史書)이다. 모두 황현 자신의 견문을 기록한 것이나, 끝 부분인 10년 8월 29일부터 9월 10일 순절(殉節)할 때까지는 문인 고용주(高墉柱)가 추기(追記)한 것이다. 원본은 권1이 상 ·하 2책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내용은 흥선대원군의 집정과 김씨세도(金氏勢道)의 몰락, 흥선대원군 집정 10년간의 여러 사건 등 혼란한 정국과 변천하는 사회상 및 내정 ·외교의 중요한 사실을 거의 시대 순으로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1955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사료총서(韓國史料叢書) 제1로 간행하면서 황현의 자손들이 작성한 부본(副本)도 실었다.
을 기반으로 역사적인 측면으로의 접근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자료들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황현의 시를 바라보고, 19세기 이래 외세가 침투했다는 사실에 집중하여, 그의 작품은 당시 민중의 반외세 의식과, 민족적인 자주성이 반영된 것이라 본다. 이는 문학적인 측면에서의 접근보다 역사적인 측면에서의 접근이 더 강한 연구방법이다. 하지만 반외세 의식과 민족적 자주성이 그의 최고 작품인 ‘절명시’에서 절정을 이루었다고 보는 점은 그 접근 방식이 문학적 측면에서의 접근 방식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 대표로 김창주가 쓴「梅泉 黃玹의 민족의식」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황현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민족의식 규명에 집중하였다. 머리말과 맺음말을 포함해 총 여섯 개의 단원으로 구성된 이 자료는 ‘한말(韓末)의 위기의식과 그의 민족의식’, ‘그의 학문과 민족의식’, ‘그의 개화관과 민족의식’,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이 내용을 이루고 있다. 황현의 주체적 역사의식을 언급하기 위한 이 연구들은 이이화의 자료와도 맥을 같이 하는데, 기존의 다른 자료들(문학적 연구자료)과 다르게 『매천야록』의 일부를 실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참고로, 황현의 철저한 고발정신, 사대의식과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사대부들을 지적하는 비판적 지식인의 성향을 언급하기도 했다.
Ⅳ. 결론
매천에 대한 연구동향을 살펴 본 결과 생애와 사상, 역사의식, 시문학을 비롯한 문학정신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이는 그의 사상과 활동이 문학적, 역사적으로 그 중요성을 고루 인정받고 있는 까닭인 것이다.
하지만 다소 아쉬움이 존재하는 것은, 황현의 시에 대한 연구들이 당대의 시대인식이나 애국정신을 찾기 위한 목적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측면으로의 연구가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황현의 자결을 순국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박노자, 「시대를 가슴아파하며 눈물로 비판하다- 황현의 매천야록」,『컬쳐뉴스』, 2005
이 주장의 골자는 매천 황현의 자결은 순국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도덕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즉, 애국정신이 아니라 한 개인의 자존심을 위한 죽음이라는 뜻으로, 비록 이 의견이 주류는 아니지만 구체적인 자료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래는 황현이 죽기 전, 가족에게 남긴 유서의 내용이다.
나는 사실 죽을 의무가 없다. 난 국가의 봉록을 먹는 신하였던 적이 없다. 나의 죽음은 다만 인(仁)을 이루고자 할 뿐 충(忠)은 아니다. 그러나 나라가 선비 기르기 오백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 죽는 자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랴. 내 위로는 하늘이 내린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고, 아래로는 평소 읽었던 책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어둠 속에 길이 잠들어서도 참으로 통쾌함을 느끼리라
이와 같이 매천 황현의 자결은 순국으로 볼 수도 있고 어쩌면 자신의 도덕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그의 자결에 대한 더욱 활발한 논의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기존의 연구가 맞아 떨어진다고 하여 ‘황현은 곧 우국(憂國)시인’라는 틀에 생각을 가두는 것은 고려해봐야 할 문제라 생각한다. 사실 순국이든 자신의 도덕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든 매천의 정신과 심지는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실증적인 자료를 토대로 결론에 다다르려는 시도 대신에, 이미 결정된 결론을 가지고 거기에 맞는 자료를 끼워 맞추는 식의 연구를 지양해야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황현에 대한 연구 자료를 검토해보았을 때, 다양한 접근으로의 시도는 있었지만 결론은 두, 세 가지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황현의 시가 1,015수에 이른다는 점, 편년체 역사자료로 『매천야록』을 지었다는 점을 토대로, 좀 더 많은 자료의 연구 및 문학, 역사의 학문종합적인 연구도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이다.
또 한 가지 생각해본 문제는, 황현의 자결에 대한 것이다. 황현은 일제를 미워하고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겨, 결국 ‘절명시’를 마지막으로 일제에 투쟁하였다. 이를 지금까지는 애국정신의 극도가 표출된 것이라 표현하는 경향이 있는데, 다르게 생각한다면 황현의 자결은 일제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자결로 끝맺는 소극적인 반항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일제를 물리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피적으로도 이해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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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11.10.12
  • 저작시기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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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07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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