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위안부의 역사와 위안소 사진 및 일본의 대응 분석 [2012년 평가우수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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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일본 군 위안부란?
위안소란?
위안소 사진
위안부의 실상
그 후 생활
일본 군 위안부 사진
일본 군 위안부 검진대
일본병사들 사진
진상규명과 배상을 위한 움직임
운동 단체
일본의 대응
참고 사이트

본문내용

일본 군위안부




일본 군 위안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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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지 시대(1930년 ~ 1945년)에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되어 강제로 성폭행당한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 일본,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 여성들이 강제로 동원되었으며,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 여성들이 가장 많았다.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일본 군인들의 성 욕구를 채워 주기 위해 집단적 성행위 장소인 군대 위안소를 제도화하고 식민지와 점령지에 있는 수많은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전선으로 수송, 체계적으로 성 노예의 역할을 강요했다.
강제 동원된 여인들은 위안소에 배치되어 반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




위안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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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이 기거하며 인권을 유린당한 공간이다.
군 위안소를 만든 시기는 1932년경이며 본격적으로 설치한 것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말부터이다. 일본군은 위안소의 설치 목적, 관리감독, 위안부 동원에 대한 명확한 원칙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실행했다.
위안소는 일본군 문서상 '군 위안소', '군인클럽', '군인 오락소', '위생적인 공중변소' 등으로 불렸다.
위안소의 크기나 형태는 일본군이 어느 시기, 어느 지역, 그리고 점령지이냐, 격전지이냐 등에 따라 달랐다. 군부대가 주둔지에 신축하기도 하고, 원주민 가옥을 고쳐 이용하기도 했다. 부대가 이동하거나 전쟁 중일 때는 군인 막사나 초소, 참호, 군용트럭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또한 위안소에는 위안부가 한 명이나 서너 명만이 있기도 했고, 많게는 수십 명이 같이 생활하기도 했다.




위안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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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 진 ≫




위안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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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 진 ≫




위안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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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 진 ≫




위안부의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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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한국,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많은 여성들이 은밀하면서도 체계적으로 군위안부로 동원되었다. 총 숫자는 적게는 5만 명에서 많게는 수십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끌려간 여성들의 나이는 10대 초반부터 40대까지 광범위했다. 가난한 집안의 여성들이 식당종업원, 간호사, 여공 모집 등 취업사기에 속아 끌려갔으며, 유괴나 강제 연행 형식으로 끌려간 경우도 많았다.
여성들은 하루에 평균 10명 내외에서 30명 이상의 군인을 상대로 성행위를 강요당했다. 군인들은 요금을 지불했다고 하지만 지불한 요금은 위안부에게 전달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으며, 아예 무료로 운영된 위안소도 있었다. 여성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외출도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우리말도 쓰지 못하게 했다. 또한 많은 여성들이 성병에 걸려 고생했다. 성병예방을 위해 삿쿠라고 불렀던 콘돔을 쓰게 되어 있었으나, 사용하지 않는 군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군위안부 여성들은 1~2주에 한 번씩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 후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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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후 힘들게 살아남은 피해여성들은 그 후 삶도 말할 수 없이 고단하였다.
찢겨질 대로 찢겨진 당시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줄 여건은 그 어느 곳에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1950년 한국 전쟁을 치르며 받은 상처도 심각하였다. 어쨌든 이들은 가족 앞에도 떳떳이 나서기 어려웠고, 이웃에서도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늘 쉬쉬하며 숨어 지내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피해 여성들이 가장 잘 하는 말이 있다. 한숨을 내쉬며, “나는 다른 보통 여성들처럼 혼인하고 아이 낳고 그저 그렇게 살아봤으면!” 결코 특별한 욕심을 내어 잘 산다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게 아이 낳고 가족이 모여 살아볼 수 있었다면 하는 소박한 꿈, 그것이 그들에겐 그렇게 어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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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0페이지
  • 등록일2011.10.30
  • 저작시기2011.10
  • 파일형식기타(pptx)
  • 자료번호#71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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