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8월 9일 을묘일 오후~
2. 8월 10일 병진일
3. 8월 11일 정사일
4. 8월 12일 무오일
6. 8월 14일 경신일
<자료출처>
2. 8월 10일 병진일
3. 8월 11일 정사일
4. 8월 12일 무오일
6. 8월 14일 경신일
<자료출처>
본문내용
마리 당나귀가 수숫대 한 개비와 막대기 하나에 질서가 잡히는 것을 보고 시작됐다. 그렇게 방목하는 열하의 가축을 보고 연암은 숙소로 돌아왔다. 집 밖에 매어둔 말 꼴을 보니 그 몰골이 더욱 초라하고 한심했다. 그래서 조선의 명목을 지키는 제주도 목장 이야기로 시작해 ‘우리나라 목장의 여덟 가지 한심한 일’을 비롯, 축목상의 금기, 번식 방법, 행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풀었다. 광동안찰사가 보낸 사람이 다녀갔고, 이제 그만 북경으로 만가라는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다. 기풍액, 왕곡정, 학지정 들과 눈물로 이별하였다.
2)조선의 목축업에 대한 비판
1. 느림뱅이 조랑말을 장수들에게 내어주고 있다.
2. 우리나라에서 태생의 말이 없다.
3. 말을 빌려 타거나 나귀를 타기 때문에 위의를 갖추지 못한다.
4. 우리나라의 대부는 수레를 가지고 있지 않다.
5. 군관들이 가난하여 탈말을 갖추지 못하였다.
6. 가마가 무겁고, 짐이 무거워서 말들이 빨리 병들어죽는다.
7. 말을 다루는 방법이 잘못되었다.
8. 말을 먹이는 방법이 잘못되었다.
9. 좋은 종자를 받지 못하였다.
10. 목축을 맡은 관원이 무식하다.
3)화폐
숙종시대에 발행된 상평통보를 제외하고 1423년(세종5년)에 주조된 해서체 조선통보와 1633년(인조11년)에 주조된 팔분체 조선통보는 그 사용과 유통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로는 동전의 원료가 부족하고 주전 기술자의 동원이 어려웠으며 주전 지술이 미숙한 관계로 위조의 위험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돈의 발행시기가 부정기적이었고 지금처럼 돈의 양에 관한 증감 추이를 정확하게 측정하지 못해 나라에서 돈의 양을 관리하기에는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서민들은 돈을 이용하여 물품을 구입하기보다는 포목이나 다른 물품을 돈의 대용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연암 박지원이 살았던 정조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연암은 서민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상공업 장려와 돈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고 아울러 돈의 양 역시 국가에서 합리적으로 관리해야한다고 역설하였지만 당시에 돈이 발행되면 유통이 안 되는 전황 현상(즉 화폐를 귀하게 생각하여 유통시키지 않고 적극 소유하는 현상)이 만연하였다.
<자료출처>
열하일기 박지원 씀/리상호 옮김/보리
http://greenbee.co.kr/blog
http://cafe.daum.net/hera2499
위키백과
http://ps68.com/zeroboard/zboard.php?id=mainboard&no=3807
http://blog.naver.com/gomsori?Redirect=Log&logNo=140023831540
http://blog.naver.com/min8099?Redirect=Log&logNo=14005300188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2&aid=0002022331
http://cafe.naver.com/withforest63/598
영상-EBS홈페이지 영상
2)조선의 목축업에 대한 비판
1. 느림뱅이 조랑말을 장수들에게 내어주고 있다.
2. 우리나라에서 태생의 말이 없다.
3. 말을 빌려 타거나 나귀를 타기 때문에 위의를 갖추지 못한다.
4. 우리나라의 대부는 수레를 가지고 있지 않다.
5. 군관들이 가난하여 탈말을 갖추지 못하였다.
6. 가마가 무겁고, 짐이 무거워서 말들이 빨리 병들어죽는다.
7. 말을 다루는 방법이 잘못되었다.
8. 말을 먹이는 방법이 잘못되었다.
9. 좋은 종자를 받지 못하였다.
10. 목축을 맡은 관원이 무식하다.
3)화폐
숙종시대에 발행된 상평통보를 제외하고 1423년(세종5년)에 주조된 해서체 조선통보와 1633년(인조11년)에 주조된 팔분체 조선통보는 그 사용과 유통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로는 동전의 원료가 부족하고 주전 기술자의 동원이 어려웠으며 주전 지술이 미숙한 관계로 위조의 위험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돈의 발행시기가 부정기적이었고 지금처럼 돈의 양에 관한 증감 추이를 정확하게 측정하지 못해 나라에서 돈의 양을 관리하기에는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서민들은 돈을 이용하여 물품을 구입하기보다는 포목이나 다른 물품을 돈의 대용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연암 박지원이 살았던 정조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연암은 서민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상공업 장려와 돈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고 아울러 돈의 양 역시 국가에서 합리적으로 관리해야한다고 역설하였지만 당시에 돈이 발행되면 유통이 안 되는 전황 현상(즉 화폐를 귀하게 생각하여 유통시키지 않고 적극 소유하는 현상)이 만연하였다.
<자료출처>
열하일기 박지원 씀/리상호 옮김/보리
http://greenbee.co.kr/blog
http://cafe.daum.net/hera2499
위키백과
http://ps68.com/zeroboard/zboard.php?id=mainboard&no=3807
http://blog.naver.com/gomsori?Redirect=Log&logNo=140023831540
http://blog.naver.com/min8099?Redirect=Log&logNo=14005300188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2&aid=0002022331
http://cafe.naver.com/withforest63/598
영상-EBS홈페이지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