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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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베트남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베트남의 과거와 현재
 2. 1. 현재의 베트남이 되기까지- 국경선
 2. 2. 베트남적 근대성
 2. 3. 근대 베트남 국내외적 상황
  2. 3. 1.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
  2. 3. 2. 식민지 시기의 베트남
  2. 3. 3. 소외된 국가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삶
 2. 4. 베트남 전쟁과 현재의 베트남
  2. 4. 1 현대 베트남의 소수자들
 2. 5. 베트남의 미래

Ⅲ. 맺음말

본문내용

중국인들” 가리키는 표현으로 본다.(이옥순 외, 2007, 13면)
를 이야기하고 있다. 베트남이나 우리나 중국의 지배를 받아 왔다는 것은 일치한다. 그래서 중국인에 대한 태도도 비슷해야 한다. 하지만 베트남에는 차이나타운이 있지만 대한민국에는 없다는 사실을 저자는 의아해 한다. 저자는 한국에 차이나타운이 없는 이유를 우리 민족의 지독한 배타성, 중국과의 깊은 우호 관계 등에서 찾으려고 한다. 사이공에 있는 차이나타운 ‘쩌 런(Cho Son)’ 큰 시장이라는 뜻으로 1810년대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은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베트남에 차이나타운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이공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북부의 하노이는 중국과의 전쟁의 중심지였기에 그쪽 사람들은 중국에 대한 적개심은 대단하다. 이에 비해 사이공은 과거 캄보디아 땅이기에 중국에 대한 적개심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중국인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의 수난은 18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떠이 썬’의 학살이 전주곡이었다. 이에 중국인들은 ‘응우옌 푹 아인’을 도와 왕조 수립에 공헌한다. 그러나 민 망 황제 시기에 이들은 쌀을 밀반출하고 아편을 수입하다는 이유로 다시 수난을 당한다. 물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화교들의 경제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중국인들은 ‘레 반 코이’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데, 그 결과는 비참함이었다. 이 암흑기를 지나자 프랑스가 구세주처럼 등장한다. 그러나 프랑스 식민 당국과 협력하면서 다시 성장한 중국인들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척결해야 할 대상이었을 것이다. 프랑스가 물러나자 다시 탄압이 반복되었는데, 지 엠 정권 아래서는 그 정도가 심했다. 그렇기에 중국인 중에는 베트콩에 참가한 사람이 적지 않다. 베트남 전쟁 시기에는 미국을 끼고 다시 거대한 ‘블랙마켓’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척결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은 추방되거나 강제 이주당하거나 ‘보트 피플’이 되어야 했다.
2. 5. 베트남의 미래
제21장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베트남에서 진행되는 ‘도이 머이(Doi Moi)’에 대한 설명이다. 베트남어로 ‘도이 머이(Doi Moi)’는 ‘새롭게 바꾼다’는 의미인데, 한자말로 하자면 쇄신, 혁신에 가까운 말이다. 마치 우리의 새마을 운동을 연상시킨다. 굳이 개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개혁은 기존의 것을 부정한다는 의미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의 긴장과 갈등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치 사회주의 문학 작품에서 쉽게 확인되는 ‘무갈등론’과 유사하다. 무갈등론 사회주의 단계에서는 사회 내부적 갈등이 없기에 문학 작품에서 갈등을 다루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그렇기에 도이 머이는 개혁을 추구하되 갈등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전쟁 이후 통일 베트남은 우수한 군사력으로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라오스의 공산 정권을 지원했으며, 중국와의 전쟁을 승리로 장식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국제적인 고립이었다. 내부적으로도 토지의 집체화와 국영화로 인해 생산성이 하락되기 시작한다. 남부 출신들은 이러한 위기를 재빨리 인식했다. 1986년 이후 ‘응우옌 반 린’이 도이 머이를 주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사회주의 경제 체제에서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의 변화가 본격적으로 연결되면서 경제적인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신세대와 혁명 세대의 갈등이나 빈부 격차 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여전히 지역적, 인종적 갈등이 깔려 있다. 앞으로 베트남의 미래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Ⅲ. 맺음말
우리에게 베트남에 대한 키워드는 ‘전쟁’, ‘고엽제’ 그리고 ‘국제결혼’, ‘신혼 여행지’, ‘한류’, ‘베트남 노동자’ 정도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베트남 근현대사』는 베트남과 우리나라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했다. 두 나라는 중국과의 관계, 한자와 유교 문화, 자생적인 근대화 노력, 식민지 경험, 독립 운동, 냉전 체제로 인한 내전, 새마을 운동과 ‘도이 머이’ 등에서 상당히 많은 공통점이 있다. 또한 ‘베트콩’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나 인도차이나, 코친차이나의 의미 설명 등은 베트남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인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서술을 서양의 근대적 지표가 아닌 제3세계의 눈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도 인상적이다. 한편 책은 딱딱한 논문이라는 느낌도 주었지만 연구하는 과정까지 상세하게 기술하여 입문서로서는 무난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 책의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들도 있다. 그것은 구성의 문제와 서술상의 문제 그리고 어문 규정의 문제이다. 첫째, 서론에서도 지적했듯이 책 구성이다. 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균형 있게 다루려고 한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위의 것들이 독립된 영역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총21장으로 나뉜 책의 구성 중 많은 부분이 중복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서술상의 문제이다. 베트남 근대 사회에서 ‘유가(儒家)’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에 비해, 유가의 흐름에 대한 설명이 없다. ‘보 따인’의 위국충절(爲國忠節)과 기독교 탄압의 명분이었던 ‘충효’, ‘근왕 운동’ 등은 유교의 입장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이다. 조선의 자생적 근대에서 ‘실학(實學)’이 차지하는 위치처럼 이러한 흐름을 발생시킬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외래어 표기법이나 맞춤법, 띄어쓰기 등의 어문 규정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외래어 표기법의 경우 아무리 베트남 어를 그대로 살린다는 입장을 수긍한다고 해도 ‘케스팅 보트(182), 캐스팅 보트(206), 싸이렌 소리(116), 메씨지(155)’ 등의 표기는 문제이다. 맞춤법도 ‘싯점(41, 204), 댓가(56)’ 등의 표기가 있다. 띄어쓰기에서는 의존 명사 외에는 한 음절로 된 말들은 거의 붙여 쓰고 있다.
<참고 문헌>
1.『베트남 근현대사』, 최병욱, 2008, 창비
2.『오류와 편견으로 가득한 세계사 교과서 바로잡기』, 이옥순 외, 2007, 삼인
3.『외래어 표기 용례집』, 국립국어원
4.『국어 어문 규정집』, 대한교과서,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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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11.18
  • 저작시기2011.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14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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