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一. 序論
二. 石碑의 발견
三. 본문의 내용
四. 비의 건립목적과 역사적 배경
五. 結論
二. 石碑의 발견
三. 본문의 내용
四. 비의 건립목적과 역사적 배경
五. 結論
본문내용
통일의 기초를 닦던 때였다.
이러한 지속적인 영토의 확장 과정에서 본래 고구려의 영토였던 죽령 바로 너머의 적성(赤城)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공을 세운 지방민들을 공개적으로 포상함으로써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새로운 통치의 방침을 밝히면서 그들이 자발적으로 신라에 복종하도록 회유하는 것이 적성비 건립의 목적이라 보여진다.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를 공략한 결과로 적성비가 세워진 것은 맞지만, 적성비는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승전비가 아니라 새로 편입한 지역의 지방민들을 신라측으로 포섭하는 동시에, 지방사회의 지배구조를 상당한 정도 해체하고 이를 친 신라적인 인물로 교체하여 지방 지배를 확고히 하려는 목적 이우태, 위의 논문, 1992, p.39
하에 건립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五. 結論
중원고구려비와 단양적성비는 변화하는 고구려-신라 관계의 양상을 실증적으로 증명하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실제로 중원고구려비와 단양적성비가 건립된 지역은 5세기 중반 부터 6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와 신라의 정치적, 군사적 각축이 치열했던 현장이었다. 장수왕대 적극적인 남진(南進)정책으로 중원지방과 현재의 소백산맥 너머 경상북도 일부 지역까지도 점령 손영종은 중원고구려비에 등장하는 '우벌성'의 위치를 현재의 경상북도 순흥 지역에 비정하였다.
했던 고구려가 광개토왕 이래 신라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인 영향력을 우리는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다시금 확인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신라의 꾸준한 내적 성장에 따라 5세기 중엽 이후 서서히 신라에 대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잃게 되었고, 고구려와 신라는 적대적인 관계로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6세기 중엽에는 신라는 적극적인 북진을 시도, 고구려는 중원지방을 비롯, 현재의 충청북도 일대의 영토를 상실하는 동시에 100여년을 넘게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까지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고구려와 신라 접경지대의 주민들에게는,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면 자기 땅의 주인이 바뀌어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정세를 관망하여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는 것이 커다란 과제였을 것이다. 적성 지방의 평범한 백성이었던 야이차와 같은 일부 지방민들은 고구려를 버리고 그들 지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될 신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새로운 사회에서의 생존과 적응을 꾀했을 것이다. 적성비는 바로 단양 지역에서 있었던 지배자의 교체와 새로운 체제의 등장에 따른 지역사회의 변화 양상과 더불어 6세기의 신라가 운영했던 각종 사회 제도를 살펴보는데 귀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두 석비 모두, 언급하였듯이 파손과 마멸이 진행된 상태에서 발견되어, 전체적인 내용을 판단하는데는 제한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삼국 시대의 금석문 자료는, 삼국 시대 당시에 기록된 삼국인들의 역사서가 현재 온전한 형태로 전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당시대인들이 직접 후세에 남긴 자료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향후 좀 더 깊이 있는 조사와 과학적인 해독의 방법들이 개발되어 두 비에서 전하는 5-6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보다 명료하게 규명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단행본)
고구려 연구회 편, 『중원고구려비 연구』, 학연문화사, 2000.
(논문)
장창은, 「중원고구려비의 연구동향과 주요쟁점」,『역사학보』vol.189, 2006
임기환,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고구려 발해 연구』vol.10
시노하라 히로카타, 「중원 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의 국가위상」, 고려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1999,
이우태, 「단양 신라 적성비 건립의 배경」,『태동고전연구』vol 8, 1992
이러한 지속적인 영토의 확장 과정에서 본래 고구려의 영토였던 죽령 바로 너머의 적성(赤城)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공을 세운 지방민들을 공개적으로 포상함으로써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새로운 통치의 방침을 밝히면서 그들이 자발적으로 신라에 복종하도록 회유하는 것이 적성비 건립의 목적이라 보여진다.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를 공략한 결과로 적성비가 세워진 것은 맞지만, 적성비는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승전비가 아니라 새로 편입한 지역의 지방민들을 신라측으로 포섭하는 동시에, 지방사회의 지배구조를 상당한 정도 해체하고 이를 친 신라적인 인물로 교체하여 지방 지배를 확고히 하려는 목적 이우태, 위의 논문, 1992, p.39
하에 건립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五. 結論
중원고구려비와 단양적성비는 변화하는 고구려-신라 관계의 양상을 실증적으로 증명하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실제로 중원고구려비와 단양적성비가 건립된 지역은 5세기 중반 부터 6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와 신라의 정치적, 군사적 각축이 치열했던 현장이었다. 장수왕대 적극적인 남진(南進)정책으로 중원지방과 현재의 소백산맥 너머 경상북도 일부 지역까지도 점령 손영종은 중원고구려비에 등장하는 '우벌성'의 위치를 현재의 경상북도 순흥 지역에 비정하였다.
했던 고구려가 광개토왕 이래 신라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인 영향력을 우리는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다시금 확인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신라의 꾸준한 내적 성장에 따라 5세기 중엽 이후 서서히 신라에 대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잃게 되었고, 고구려와 신라는 적대적인 관계로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6세기 중엽에는 신라는 적극적인 북진을 시도, 고구려는 중원지방을 비롯, 현재의 충청북도 일대의 영토를 상실하는 동시에 100여년을 넘게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까지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고구려와 신라 접경지대의 주민들에게는,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면 자기 땅의 주인이 바뀌어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정세를 관망하여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는 것이 커다란 과제였을 것이다. 적성 지방의 평범한 백성이었던 야이차와 같은 일부 지방민들은 고구려를 버리고 그들 지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될 신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새로운 사회에서의 생존과 적응을 꾀했을 것이다. 적성비는 바로 단양 지역에서 있었던 지배자의 교체와 새로운 체제의 등장에 따른 지역사회의 변화 양상과 더불어 6세기의 신라가 운영했던 각종 사회 제도를 살펴보는데 귀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두 석비 모두, 언급하였듯이 파손과 마멸이 진행된 상태에서 발견되어, 전체적인 내용을 판단하는데는 제한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삼국 시대의 금석문 자료는, 삼국 시대 당시에 기록된 삼국인들의 역사서가 현재 온전한 형태로 전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당시대인들이 직접 후세에 남긴 자료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향후 좀 더 깊이 있는 조사와 과학적인 해독의 방법들이 개발되어 두 비에서 전하는 5-6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보다 명료하게 규명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단행본)
고구려 연구회 편, 『중원고구려비 연구』, 학연문화사, 2000.
(논문)
장창은, 「중원고구려비의 연구동향과 주요쟁점」,『역사학보』vol.189, 2006
임기환,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고구려 발해 연구』vol.10
시노하라 히로카타, 「중원 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의 국가위상」, 고려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1999,
이우태, 「단양 신라 적성비 건립의 배경」,『태동고전연구』vol 8,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