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알렉산드리아의 아볼로(Apollos of Alexandria)에 대한 새로운 읽기
들어가는 말
1. 신학의 요람, 알렉산드리아
2.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유대인들의 생활상
2. 신약성서의 아볼로
3. 사도행전의 아볼로
4. 바울서신의 아볼로
4-1. 알렉산드리아의 아볼로
4-2. 아볼로와 세상의 지혜와의 관련성
4-3. 지혜 모티브와 바울과 아볼로의 갈등
5. 결론: 지혜에 대한 바울의 비판이 제공하는 신학적 의미
들어가는 말
1. 신학의 요람, 알렉산드리아
2.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유대인들의 생활상
2. 신약성서의 아볼로
3. 사도행전의 아볼로
4. 바울서신의 아볼로
4-1. 알렉산드리아의 아볼로
4-2. 아볼로와 세상의 지혜와의 관련성
4-3. 지혜 모티브와 바울과 아볼로의 갈등
5. 결론: 지혜에 대한 바울의 비판이 제공하는 신학적 의미
본문내용
것이다. 만일 바울이 분명히 비판적이었다면, 그가 이 중요한 동료들 그리고 그들의 가정에서 모인 교회(고전 16:19)와의 관계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바울로 하여금 그들과 화해를 모색하는 차원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다”(3:6)고 언급함으로써 그의 태도를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아볼로를 보류하는 어떠한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고 예측할 수 있다. cf. F.F. Bruce, Paul: Apostle of the Free Spirit, Carlisle: Paternoster, 1977, 257. 바울의 입장에서, 아볼로와 바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행동하는 동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거나 물을 주는 것은 모두 필요한 작업이지만, 심는 자들이 물을 주는 자들보다는 더 중요하다는 것은 보편적인 원리에 해당된다는 차원에서 아볼로와 바울의 관계가 쉽게 해결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와 같이, 아볼로(의 그룹)에 대한 잠재된 바울의 염려는 여기저기 내재되어 나타나고 있다. 5장에서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음행의 원인 또한 세상의 지혜를 너무 의존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바울은 꾸짖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고, 8장 10-11절에서 지식이 있는 자와 약한 자의 대조는 꼭 바울파와 아볼로파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으로 읽힐 만하다. 만약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하게 만든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할 것이라는 선언(13절)은 아볼로의 가르침에 대한 바울의 강력한 폐기선언으로 보인다. 이러한 바울 자신의 선언을 보강하기 위하여 그는 9장에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담대히 공표하는데, 특히 19절 이하에서 그 점에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지혜와 관련된 아볼로 분파에 대한 바울의 입장은 10장에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경고하는 곳에서도 암시되는데, 그의 선언은 그들에 대한 경고로 충분히 해석될 수 있다. 이스라엘과 아볼로를 동일시하는 것이 일견 불만족스럽지만, 이것은 바울의 수사학적 전략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교만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自招)한 것처럼, 아볼로 분파 역시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보다 세상의 지혜를 선호한다면 그런 오류를 반드시 다시 범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셈이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그들에게 실패를 초래했듯이, 성만찬의 오용과 우상숭배는 아볼로파의 분파적 행동과 동일시될 수 있다고 바울은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궁극적으로 교회의 일치를 바라고 있는데, 이 점을 여기서 분명히 한다(고전 10:17). 분파적 행동은 ‘한 떡’이나 ‘한 몸’이라는 연대성을 통해서 분명히 비판받을 대상이기 때문이다.
5. 결론: 지혜에 대한 바울의 비판이 제공하는 신학적 의미
지금까지 우리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서 등장하는 아볼로의 모습을 중심으로 바울과 그의 관계를 주목했고, 아볼로에 대한 바울의 평가를 통해서 정당성 확보라는 정치적 측면에서의 의도가 암시되고 있다는 학자들의 견해도 검토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부터 예수에 관한 내용을 배웠다는 아볼로에 대한 누가의 묘사(행 18:25)가 편파적인 의도가 있다는 혐의도 바울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도록 부추긴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본 연구를 통해서 바울이 세상의 지혜를 비판하는 것은 결국 고린도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순수하게 보존하려는 것이고, 동시에 그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선교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정당한 방식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울은 신앙공동체가 각양각색의 분파로 분열되는 것이야말로 선교를 향한 가장 심각한 장벽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일치를 훼손하여 고린도의 신앙공동체 모두에게 결국 피해로 내몰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아볼로에 대한 바울의 묘사가 의도한 것이 바울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기위한 정치적 독점 내지 권력에의 의지라고 평가하는 것은 바울의 순수한 선교 열정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바울의 입장을 성서신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할 때 결코 좌시할 수 없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초심,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위임사항으로 받아들인 선교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소명과 책임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궁극적으로 부정하고 저항하는 무엇인지가 분명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개인숭배와 한 지도자를 향한 우상화의 거부이다. 학자들의 여러 견해와는 대립적으로, 정치적이거나 여타의 세속적인 관점에서 바울과 아볼로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케리그마에 대한 이니셔티브를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선포하고 가르쳐온 바울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는 한낱 바울파의 존재를 용인할 수 없었다. 바울이 개인의 우상화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만이 신앙공동체의 주인공이며 선포의 주제임을 확연히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본 연구를 통해서 현대교회에서 만연되는 세속적인 조직운영이나 위계질서에 대해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한 몸과 한 지체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즐겨 배우고 실천해나가는 유기체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고린도교회 내부를 혼란스럽게 만든 분파적 행태와 권위/권력의 독점이라는 해석학적 이미지를 통해서 현대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동반되어야함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세속적인 관심과 관점으로 성서의 본문을 해석할 때, ‘최고경영자(Chief Executive Officer) 예수’라는 허구적 예수(Fictitious Jesus)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결과이며, 이러한 현실에 실소(失笑)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구겨진 허구의 예수를 통해서는 구원이 결코 실체가 될 수 없음을 한국교회는 명백히 선포해야 한다. 본문을 오해하여 만들어낸 허구의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딜레마에 빠지게 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구원자이지 결코 최고경영자가 아니다. 바울이 교회내부의 분파문제를 세속적인 관점으로 해결하고자 시도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거나 물을 주는 것은 모두 필요한 작업이지만, 심는 자들이 물을 주는 자들보다는 더 중요하다는 것은 보편적인 원리에 해당된다는 차원에서 아볼로와 바울의 관계가 쉽게 해결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와 같이, 아볼로(의 그룹)에 대한 잠재된 바울의 염려는 여기저기 내재되어 나타나고 있다. 5장에서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음행의 원인 또한 세상의 지혜를 너무 의존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바울은 꾸짖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고, 8장 10-11절에서 지식이 있는 자와 약한 자의 대조는 꼭 바울파와 아볼로파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으로 읽힐 만하다. 만약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하게 만든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할 것이라는 선언(13절)은 아볼로의 가르침에 대한 바울의 강력한 폐기선언으로 보인다. 이러한 바울 자신의 선언을 보강하기 위하여 그는 9장에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담대히 공표하는데, 특히 19절 이하에서 그 점에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지혜와 관련된 아볼로 분파에 대한 바울의 입장은 10장에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경고하는 곳에서도 암시되는데, 그의 선언은 그들에 대한 경고로 충분히 해석될 수 있다. 이스라엘과 아볼로를 동일시하는 것이 일견 불만족스럽지만, 이것은 바울의 수사학적 전략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교만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自招)한 것처럼, 아볼로 분파 역시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보다 세상의 지혜를 선호한다면 그런 오류를 반드시 다시 범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셈이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그들에게 실패를 초래했듯이, 성만찬의 오용과 우상숭배는 아볼로파의 분파적 행동과 동일시될 수 있다고 바울은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궁극적으로 교회의 일치를 바라고 있는데, 이 점을 여기서 분명히 한다(고전 10:17). 분파적 행동은 ‘한 떡’이나 ‘한 몸’이라는 연대성을 통해서 분명히 비판받을 대상이기 때문이다.
5. 결론: 지혜에 대한 바울의 비판이 제공하는 신학적 의미
지금까지 우리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서 등장하는 아볼로의 모습을 중심으로 바울과 그의 관계를 주목했고, 아볼로에 대한 바울의 평가를 통해서 정당성 확보라는 정치적 측면에서의 의도가 암시되고 있다는 학자들의 견해도 검토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부터 예수에 관한 내용을 배웠다는 아볼로에 대한 누가의 묘사(행 18:25)가 편파적인 의도가 있다는 혐의도 바울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도록 부추긴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본 연구를 통해서 바울이 세상의 지혜를 비판하는 것은 결국 고린도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순수하게 보존하려는 것이고, 동시에 그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선교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정당한 방식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울은 신앙공동체가 각양각색의 분파로 분열되는 것이야말로 선교를 향한 가장 심각한 장벽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일치를 훼손하여 고린도의 신앙공동체 모두에게 결국 피해로 내몰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아볼로에 대한 바울의 묘사가 의도한 것이 바울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기위한 정치적 독점 내지 권력에의 의지라고 평가하는 것은 바울의 순수한 선교 열정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바울의 입장을 성서신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할 때 결코 좌시할 수 없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초심,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위임사항으로 받아들인 선교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소명과 책임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궁극적으로 부정하고 저항하는 무엇인지가 분명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개인숭배와 한 지도자를 향한 우상화의 거부이다. 학자들의 여러 견해와는 대립적으로, 정치적이거나 여타의 세속적인 관점에서 바울과 아볼로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케리그마에 대한 이니셔티브를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선포하고 가르쳐온 바울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는 한낱 바울파의 존재를 용인할 수 없었다. 바울이 개인의 우상화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만이 신앙공동체의 주인공이며 선포의 주제임을 확연히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본 연구를 통해서 현대교회에서 만연되는 세속적인 조직운영이나 위계질서에 대해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한 몸과 한 지체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즐겨 배우고 실천해나가는 유기체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고린도교회 내부를 혼란스럽게 만든 분파적 행태와 권위/권력의 독점이라는 해석학적 이미지를 통해서 현대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동반되어야함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세속적인 관심과 관점으로 성서의 본문을 해석할 때, ‘최고경영자(Chief Executive Officer) 예수’라는 허구적 예수(Fictitious Jesus)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결과이며, 이러한 현실에 실소(失笑)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구겨진 허구의 예수를 통해서는 구원이 결코 실체가 될 수 없음을 한국교회는 명백히 선포해야 한다. 본문을 오해하여 만들어낸 허구의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딜레마에 빠지게 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구원자이지 결코 최고경영자가 아니다. 바울이 교회내부의 분파문제를 세속적인 관점으로 해결하고자 시도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