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4장 - 식사중의 행동
제 5장: 생리적 욕구에 대한 태도의 변화
제6장: 코를 푸는 행위에 관하여
제7장: 침 뱉는 행위에 관하여
제 8장: 침실에서의 행동에 관하여
제 9장: 이성 관계에 대한 사고의 변화
제 10장: 공격욕의 변화
제 11장: 기사의 생활풍경
제 5장: 생리적 욕구에 대한 태도의 변화
제6장: 코를 푸는 행위에 관하여
제7장: 침 뱉는 행위에 관하여
제 8장: 침실에서의 행동에 관하여
제 9장: 이성 관계에 대한 사고의 변화
제 10장: 공격욕의 변화
제 11장: 기사의 생활풍경
본문내용
. 육체적인 공격을 통한 감정발산도 시간적으로, 지리적으로 제한되어 특정한 분야에서만 가능하게 된다. 물리적인 폭력수단이 중앙권력의 수중에 집중되면서 단지 중앙권력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사회적인 인정 하에 내부나 외부의 적들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었다. 국가 간의 전쟁조차도 비인격적인 것이 되었고, 이로 인해 중세에서와 같이 즉흥적으로 감정을 발산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더 줄어든다. 이 감정들은 세련되고 합리적인 형태로 변형되어 문명화된 사회의 일상에서 정확하게 규정된 정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스포츠 경기는 사회적으로 허용된 호전성 및 공격욕의 표현이며, 공격욕은 스포츠 경기 과정에서 절제되고 정확하게 규정된 감정발산의 공간을 허락받았다. 이것은 문명화된 사회의 특징이며, 우리 사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명화된 사회에서 시각이 특수한 의미를 얻게 되는 연관관계들 중의 하나를 볼 수 있다. 시각은 청각과 비슷하게, 아마 더 적극적인 쾌락의 중계자가 된 것이다. 본능표출이 직접행위로부터 관전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도 감정변화의 절제와 인간화의 곡선이 뚜렷이 드러난다. 문명단계에서 통상적인 훈련은 자기통제의 형태로 주입된 두려움을 통해 '비정상적'인 행위에 대한 욕구표출을 억제시킨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본능과 쾌락의 표출은 불쾌감을 야기하고 강화하는 조처를 통해 위협받고 처벌받는다.
제 11장: 기사의 생활풍경
왜 인간의 행동가 감정상태가 변하는가 하는 질문은 왜 인간의 생활양식이 변하는가라는 질문과 근본적으로 같다. 근대사회에서는 다른 기회와 다른 생활양식이 주어졌고 개개인은 이에 적응해야만 했다. 기사의 자유분방한 삶은 특정한 시대부터 사회구조 속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중세에 특별한 역할을 했던 여러 기능들도 사회관계의 전체구조 속에서 점차 그 중요성을 잃어갔다. 지금까지 중세 상류층의 감정수준에 관해 여러모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를 보충하고 동시에 수준변화의 원인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연결고리로서 기사들의 삶의 방식에 관한, 즉 사회가 귀족으로 태어난 개인에게 열어주고 동시에 그들을 구속했던 생활공간에 대한 짧은 인상을 첨부하고자 한다. '중세의 가옥대장'이라는 그림에서 나타나듯, 시골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며 특권을 누리던 귀족 계층들에게 아름다운 풍경과, 그와 상반되는 하층민들의 궁핍한 생활, 노동하는 노예들의 모습은 전혀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상당수의 귀족들이 시골 본가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포기하고 왕이나 제후들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되면서, 또 도시생활과 시골생활의 분리가 더욱 심화되면서 자연은 향수의 의미를 가지고 아름답게 승화되게 된다. 중세 말기 상류층의 감정구조를 알려주는 가옥대장의 스케치들은 실제 모습 그대로 그림 속에 묘사되어 있다. 기사의 재판권을 상징하는 교수대는 그의 삶의 무대장치로서 특별히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쾌하지는 않다. 유죄판결, 처형과 죽음 등 이 모든 것은 이 시대의 삶 속에서는 더욱 현실적이다. 그것들은 아직 무대 뒤로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노동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전사와 귀족들은 여유롭게 즐기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일해야만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세계의 질서로서 혐오스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모두 같다는 감정은 아직 없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노동하는 사람들을 봐도 수치심이나 불쾌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중세의 노동계층의 존재는 자명한 일이었으며, 중세 상류층의 정서는 비천한 모든 것들을 삶의 무대 뒤로 감추고 더 나아가 그림에서도 배제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만족하였던 것이다. 차이를 본다는 것은 삶의 쾌락을 증대시키는 일이었다. 사회의 상호의존과 분화가 계속 진행되면 될수록, 상류층은 실제로 점점 더 다른 계층에 의존하게 되고, 그와 함께 이 다른 계층의 사회적 세력은,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커진다. 과거에는 상류층의 주인의식과 다른 계층에 대한 멸시는 더 적나라했으며, 이런 감정과 충동을 억제하라는 압박감도 훨씬 덜했다. 상류층이 예술로 하여금 항상 자신들이 원하는 환상만을 표현하게 하고, 향상된 혐오감의 수준에 거슬리는 모든 것을 억압했던 그 감정제한이 이 그림들로부터 아직 표출되지 않았다. 기사중심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중세 말기의 기사사회와 이어질 절대주의 궁정사회 간의 감정수준의 차이는 사랑의 묘사방식에서도 분명해진다. 남녀 간의 성적 관계가 스스럼없이 그려지고, 그것이 아직 수치심과 결부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림에 그려진 사랑의 장면은 외설과는 거리가 멀고, 자연스럽게 표현될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고 급하고 즉흥적으로 그리고 솔직하게 자신의 본능이나 감정에 굴복당하는 사회, 감정이 양극단 사이에서 심하게 동요하던 사회를 표현한다. 중세인들의 감정표현은 전체적으로 후대의 사람들보다 더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하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자유롭다거나 또는 사회적으로 조형되지 않았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 측면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점은 없다. 아무런 제한 없는 인간은 하나의 환영에 불과하다. 따라서 금지와 통제와 상호의존의 종류, 강도, 극복방식은 수백 번이나 변하며, 이와 더불어 감정의 갈등과 평형, 개인이 추구하고 발견하는 충족의 강도와 방식도 변한다. 15세기에, 더욱 결정적으로는 16세기로 들어서면서 상황은 변한다. 옛 귀족들과 새로 귀족으로 부상한 집단으로 구성된 신흥 귀족층이 반도시적 궁정에서 형성되는데 이들은 새로운 삶의 공간, 새로운 기능, 또 이에 상응하는 전혀 다른 감정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귀족에게 가해지는 억압은 더욱 강해졌으며, 더욱더 포괄적인 규제가 귀족에게 요구된다. 이는 귀족이 처한 새로운 의존관계의 결괄 할 수 있다. 새로운 삶의 공간과 새로운 통합형식이 인간에게 강요한 것은 새로운 자기규율,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자기절제인 것이다. 쿠르투아지란 개념으로 표현되던 태도의 이상적 형태는 점차 시빌리테란 개념으로 대체된다.
제 11장: 기사의 생활풍경
왜 인간의 행동가 감정상태가 변하는가 하는 질문은 왜 인간의 생활양식이 변하는가라는 질문과 근본적으로 같다. 근대사회에서는 다른 기회와 다른 생활양식이 주어졌고 개개인은 이에 적응해야만 했다. 기사의 자유분방한 삶은 특정한 시대부터 사회구조 속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중세에 특별한 역할을 했던 여러 기능들도 사회관계의 전체구조 속에서 점차 그 중요성을 잃어갔다. 지금까지 중세 상류층의 감정수준에 관해 여러모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를 보충하고 동시에 수준변화의 원인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연결고리로서 기사들의 삶의 방식에 관한, 즉 사회가 귀족으로 태어난 개인에게 열어주고 동시에 그들을 구속했던 생활공간에 대한 짧은 인상을 첨부하고자 한다. '중세의 가옥대장'이라는 그림에서 나타나듯, 시골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며 특권을 누리던 귀족 계층들에게 아름다운 풍경과, 그와 상반되는 하층민들의 궁핍한 생활, 노동하는 노예들의 모습은 전혀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상당수의 귀족들이 시골 본가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포기하고 왕이나 제후들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되면서, 또 도시생활과 시골생활의 분리가 더욱 심화되면서 자연은 향수의 의미를 가지고 아름답게 승화되게 된다. 중세 말기 상류층의 감정구조를 알려주는 가옥대장의 스케치들은 실제 모습 그대로 그림 속에 묘사되어 있다. 기사의 재판권을 상징하는 교수대는 그의 삶의 무대장치로서 특별히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쾌하지는 않다. 유죄판결, 처형과 죽음 등 이 모든 것은 이 시대의 삶 속에서는 더욱 현실적이다. 그것들은 아직 무대 뒤로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노동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전사와 귀족들은 여유롭게 즐기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일해야만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세계의 질서로서 혐오스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모두 같다는 감정은 아직 없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노동하는 사람들을 봐도 수치심이나 불쾌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중세의 노동계층의 존재는 자명한 일이었으며, 중세 상류층의 정서는 비천한 모든 것들을 삶의 무대 뒤로 감추고 더 나아가 그림에서도 배제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만족하였던 것이다. 차이를 본다는 것은 삶의 쾌락을 증대시키는 일이었다. 사회의 상호의존과 분화가 계속 진행되면 될수록, 상류층은 실제로 점점 더 다른 계층에 의존하게 되고, 그와 함께 이 다른 계층의 사회적 세력은,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커진다. 과거에는 상류층의 주인의식과 다른 계층에 대한 멸시는 더 적나라했으며, 이런 감정과 충동을 억제하라는 압박감도 훨씬 덜했다. 상류층이 예술로 하여금 항상 자신들이 원하는 환상만을 표현하게 하고, 향상된 혐오감의 수준에 거슬리는 모든 것을 억압했던 그 감정제한이 이 그림들로부터 아직 표출되지 않았다. 기사중심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중세 말기의 기사사회와 이어질 절대주의 궁정사회 간의 감정수준의 차이는 사랑의 묘사방식에서도 분명해진다. 남녀 간의 성적 관계가 스스럼없이 그려지고, 그것이 아직 수치심과 결부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림에 그려진 사랑의 장면은 외설과는 거리가 멀고, 자연스럽게 표현될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고 급하고 즉흥적으로 그리고 솔직하게 자신의 본능이나 감정에 굴복당하는 사회, 감정이 양극단 사이에서 심하게 동요하던 사회를 표현한다. 중세인들의 감정표현은 전체적으로 후대의 사람들보다 더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하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자유롭다거나 또는 사회적으로 조형되지 않았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 측면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점은 없다. 아무런 제한 없는 인간은 하나의 환영에 불과하다. 따라서 금지와 통제와 상호의존의 종류, 강도, 극복방식은 수백 번이나 변하며, 이와 더불어 감정의 갈등과 평형, 개인이 추구하고 발견하는 충족의 강도와 방식도 변한다. 15세기에, 더욱 결정적으로는 16세기로 들어서면서 상황은 변한다. 옛 귀족들과 새로 귀족으로 부상한 집단으로 구성된 신흥 귀족층이 반도시적 궁정에서 형성되는데 이들은 새로운 삶의 공간, 새로운 기능, 또 이에 상응하는 전혀 다른 감정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귀족에게 가해지는 억압은 더욱 강해졌으며, 더욱더 포괄적인 규제가 귀족에게 요구된다. 이는 귀족이 처한 새로운 의존관계의 결괄 할 수 있다. 새로운 삶의 공간과 새로운 통합형식이 인간에게 강요한 것은 새로운 자기규율,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자기절제인 것이다. 쿠르투아지란 개념으로 표현되던 태도의 이상적 형태는 점차 시빌리테란 개념으로 대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