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며
2. 독일의 경우
3. 러시아의 경우
4. 프랑스의 경우
5. 마치며
2. 독일의 경우
3. 러시아의 경우
4. 프랑스의 경우
5. 마치며
본문내용
는 일반적으로 獨逸 문화와 특수적으로 SPD에 대해 진정한 예찬을 자주 표했지만, 마음 속으로 SPD의 마르크스주의, 특히 그것의 국가와 부르즈와 계급에 대한 태도는 獨逸의 특수한 환경을 반영한 것일 뿐 프랑스에는 여러 점에서 분명히 부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SFIO가 최대의 선거 승리 (의석수 103, 득표수는 1910년보다 30만이 더 많은 140만표) 를 거둔 1914년 봄에 죠레스는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급진주의자 주도내각에 외무부 장관으로 입각하였는데, 그 외무부는 그의 영향력이 전쟁방지에 결정적일 수도 있는 기관이었다. 그 때에 그는, 결국 급진주의-社會主義의 연립내각이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SFIO는 “전통적 교리 고집(Scholaticism)때문에 좌초”되어서는 아니된다라고 주장했다(Goldberg, p. 454).
SPD의 지도자들도 전쟁 직전의 수년간 유사한 유혹을 받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교조주의를 제한하기 위한 유사한 심사숙고가 있었다. 뷜로의 진영이 어려움에 빠지고 1909년에 해체되기 시작하자 부르즈와 좌파와의 일종의 정치적 제휴 가능성이 이전의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제기되었다. 1910년에 다양한 중산층 집단을 흡수하여 <진보 인민당>-비록 훨씬 허약했지만 대체로 프랑스의 <급진당>에 해당하는 獨逸의 정당이었다-이 결성된 후 그 가능성은 더욱 크졌다. 진보 인민당 사람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많은 중요한 문제들-그 중에서도 특히 稅制 및 선거권 개정의 필요성-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만약 帝國의회에서의 양차 선거전에서 협력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하나의 강력한 좌파블럭을 형성할 수도 있게 되었다. 1912년의 선거에서 SPD는 공식적인 선거동맹을 거부해오던 수십년간의 정책을 포기했다. SPD는 첫 선거전에서는 자당의 후보자를 입후보시켰으나 그 후에는 진보 인민당의 후보자들이 승리할 가능성이 큰 지역에서는 그들을 지지하기 위해 후보를 사퇴시켰다. 진보주의자들도 동일한 조처를 취했는데, 그것은 프랑스에서는 社會主義者들과 급진주의자들 사이에 오랫동안 있어온 하나의 관례였다. 결과는 SPD의 완전한 승리였는데 그 당은 1백만명의 새 투표자들을 얻었고 (3백 25만에서 4백 25만으로 되었다) 110석의 의회 의석을 얻었다. SPD는 1890년 이래 獨逸에서 최대 다수의 투표자들의 지지를 받아온 정당이었다. 이제 그것은 또한 제 2의 정당인 중앙당보다 거의 2배나 많은 투표를 획득함으로써 帝國의회내에서 최대의 정당이 되었다.
SPD가 그처럼 큰 정당이면서 여지껏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상하고 역설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首相이 의회의 다수당의 지지를 획득하지 않아도 되는 헌법하에서 SPD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진보주의자들과의 밀접한 제휴라는 장기적인 정책이 필요했다. 만약 두 정당이 의회 다수당의 결의가 요청되는 예산을 통제할 수 있다면 두 정당은 아마도 결국 그들의 의지를 수상과 프러시아의 권력 구조에 관철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에게는 신뢰할 수 없는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그같은 제휴가 별로 바람직스럽지 못했다(사실 잘 통제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2차 선거에서 그들의 후보가 사퇴했을 경우 진보 인민당의 후보자를 지지하여 그들을 당선시킨데, 비해 진보 인민당의 지지자들은 1912년의 2차 선거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투표하는 것을 대개 삼가했다.
그리하여 1912년의 選擧들도 의회의 어떤 실제적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사실 그 선거들은 SPD내에서의 긴장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당의 온건파들은 자유주의적 부르즈와지가 결국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반동세력에 맞서 싸울 동맹세력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희망을 여전히 버리지 않았다. 룩셈부르그와 그녀의 지지자들은 진보주의 유권자들의 투표 패턴이야말로 부르즈와지의 계급적 이해관계와 계급 주체성은 프롤레타리아와는 결코 융화될 수 없다는 증거를, 필요할 경우, 더 제공해주는데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5. 마치며
獨逸의 자유주의적 부르즈와지는 멀지 않아 보다 더 타협적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戰前의 이들 의회주의자들에게 시간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1914년 6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거리 帝位의 상속자 프란쯔-페르디난드(Franz-Ferdinand) 大公이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었다. 유럽 역사상의 완전히 새로운 시대, 즉 유럽의 社會主義세계를 변화시킬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SPD의 지도자들도 전쟁 직전의 수년간 유사한 유혹을 받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교조주의를 제한하기 위한 유사한 심사숙고가 있었다. 뷜로의 진영이 어려움에 빠지고 1909년에 해체되기 시작하자 부르즈와 좌파와의 일종의 정치적 제휴 가능성이 이전의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제기되었다. 1910년에 다양한 중산층 집단을 흡수하여 <진보 인민당>-비록 훨씬 허약했지만 대체로 프랑스의 <급진당>에 해당하는 獨逸의 정당이었다-이 결성된 후 그 가능성은 더욱 크졌다. 진보 인민당 사람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많은 중요한 문제들-그 중에서도 특히 稅制 및 선거권 개정의 필요성-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만약 帝國의회에서의 양차 선거전에서 협력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하나의 강력한 좌파블럭을 형성할 수도 있게 되었다. 1912년의 선거에서 SPD는 공식적인 선거동맹을 거부해오던 수십년간의 정책을 포기했다. SPD는 첫 선거전에서는 자당의 후보자를 입후보시켰으나 그 후에는 진보 인민당의 후보자들이 승리할 가능성이 큰 지역에서는 그들을 지지하기 위해 후보를 사퇴시켰다. 진보주의자들도 동일한 조처를 취했는데, 그것은 프랑스에서는 社會主義者들과 급진주의자들 사이에 오랫동안 있어온 하나의 관례였다. 결과는 SPD의 완전한 승리였는데 그 당은 1백만명의 새 투표자들을 얻었고 (3백 25만에서 4백 25만으로 되었다) 110석의 의회 의석을 얻었다. SPD는 1890년 이래 獨逸에서 최대 다수의 투표자들의 지지를 받아온 정당이었다. 이제 그것은 또한 제 2의 정당인 중앙당보다 거의 2배나 많은 투표를 획득함으로써 帝國의회내에서 최대의 정당이 되었다.
SPD가 그처럼 큰 정당이면서 여지껏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상하고 역설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首相이 의회의 다수당의 지지를 획득하지 않아도 되는 헌법하에서 SPD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진보주의자들과의 밀접한 제휴라는 장기적인 정책이 필요했다. 만약 두 정당이 의회 다수당의 결의가 요청되는 예산을 통제할 수 있다면 두 정당은 아마도 결국 그들의 의지를 수상과 프러시아의 권력 구조에 관철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에게는 신뢰할 수 없는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그같은 제휴가 별로 바람직스럽지 못했다(사실 잘 통제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2차 선거에서 그들의 후보가 사퇴했을 경우 진보 인민당의 후보자를 지지하여 그들을 당선시킨데, 비해 진보 인민당의 지지자들은 1912년의 2차 선거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투표하는 것을 대개 삼가했다.
그리하여 1912년의 選擧들도 의회의 어떤 실제적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사실 그 선거들은 SPD내에서의 긴장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당의 온건파들은 자유주의적 부르즈와지가 결국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반동세력에 맞서 싸울 동맹세력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희망을 여전히 버리지 않았다. 룩셈부르그와 그녀의 지지자들은 진보주의 유권자들의 투표 패턴이야말로 부르즈와지의 계급적 이해관계와 계급 주체성은 프롤레타리아와는 결코 융화될 수 없다는 증거를, 필요할 경우, 더 제공해주는데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5. 마치며
獨逸의 자유주의적 부르즈와지는 멀지 않아 보다 더 타협적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戰前의 이들 의회주의자들에게 시간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1914년 6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거리 帝位의 상속자 프란쯔-페르디난드(Franz-Ferdinand) 大公이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었다. 유럽 역사상의 완전히 새로운 시대, 즉 유럽의 社會主義세계를 변화시킬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추천자료
정치경제학에 대한 재고찰
관료제와 관료주의
한국의 관료제의 문제점 앞으로의 방향(관료주의,행정학)
러시아 문학사
영화 속에 나타난 여성에 대한 틀과 여성영화의 중요성
사회권과 신자유주의 - 정의와 의의
홍익대학교 사이버강의 동양문화사 정리 [단순캡쳐 아님][zip-hwp파일]
마르크스주의-사회복지정책론
한국관료제에 대한 고찰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
[문화통합론과북한문학 공통] '고전'의 가치와 잡지 문장파 근대예술가들의 지향점을 나름대...
[소설][소설 의미][소설 역사][소설 특징][소설 주제][소설 화자][소설 인물][소설 시점][소...
오스트리아 조합주의와 사례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