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인재 경영 리더십과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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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대왕의 인재 경영 리더십과 시사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세종대왕을 선정한 이유

2. 세종의 인재 경영 리더십

3. 조직 운영의 달인역할을 한 세종

4. 국가적 인프라를 구축한 세종

5. 세종대왕의 지명창통진실수(知命創通進實修) 7가지 리더십

6. 세종대왕의 인재 경영 리더십의 시사점

본문내용

재쓰기에서도 드러난다. 뇌물을 받거나 도덕적인 지탄을 받는 사람들도 그의 재능을 먼저 활용하기 위하여 임금이 방패막이가 되어 용서하고 등용한다. ‘법은 융통성과 원칙 중에서 어떤 한가지만을 고집할 수 없는 것이다’라면서 원칙론이 빠지기 쉬운 억울함을 실용의 차원에서 보완하였다.
일곱째, 수(修)는 수신리더십이다. 세종만큼자기절제와인내가몸에밴사람이있을까싶을만큼자신을다스림에뛰어났다. ‘내가 경서와 사기는 보지 않은 것이 없고 또 지금은 늙어서 능히 기억하지 못하나 지금에도 오히려 글 읽는 것을 치우지 않는 것은 다만 글을 보는 동안에 생각이 일깨워져서 여러 가지로 정사에 시행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로써 본다면 글 읽는 것이 어찌 유익하지 않으랴’라고 한다. 평생학습, 평생수양을 실천하고 있다. 실용을 위한 학습보다 먼저 긴요한 것이 바로 마음을 공부하는 것이다. ‘마음공부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하며 당시 젊은 사대부들에게 ‘어떻게 하면 선비들의 부화한 버릇을 버리게 할까’를 묻기도 한다.
6. 세종대왕의 인재 경영 리더십의 시사점
당시 세종이 생각한 행복한 나라는 우선 모든 백성이 지혜로워야 한다. 그러려면 책을 많이 읽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교육이다. 백성을 교육시킬 책을 출판하기 위해선 필사나 목판만으론 부족했다. 세종은 이를 위해 하루에 40벌씩 인쇄할 수 있는 고려의 금속활자를 계승해 궁궐 안에 주자소를 지었다. 왕 자신이 수시로 드나들며 이전보다 두 배나 많은 책을 찍어냈다. 특히 모든 백성들의 교과서인 ‘소학’은 1만 권이나 펴냈다고 한다. 당시 약 21만 가구가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오늘날의 기준으로 100만 권을 찍어낸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자연히 나라 안에 책이 넘쳤다. 한자가 어려운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기까지 했다.
관료나 학자들과는 끊임없이 토론했다. 재위 32년 동안 경연 횟수만 1800회가 넘는다. 토론을 거듭하면 전체 관료·학자들의 지식수준이 올라가고 유능한 인재도 발탁할 수 있다. 서로 교류해 문제를 해결하니 시너지가 창출되는 건 당연했다.
세종이 꿈꾼 두 번째는 ‘행복한 사회’다. 이를 표현한 것이 생생지락 (生生之樂)’이다. 첫 번째 생은 ‘생활’을 가리킨다. 두 번째 생은 ‘생업’ 즉, 직업을 뜻한다. 풀어 쓰면 ‘생활과 일의 즐거움’이다. 모든 이들이 자기 삶과 일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삶이 바로 생생지락이다. 백성들이 생업을 즐기게 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개발하고 교육시키고 어려움을 해결해 줘야 한다. 세종은 수시로 백성을 만나 얘기를 듣는 등 소통을 중시했다. 이런 방식을 ‘삼통’이라고 하는데, 뜻과 말과 마음이 통한다는 의미다.
뜻과 말을 세워 일방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고 백성과 관료의 마음이 통해야 했다. 상징적인 인물이 좌의정 허조다. 그는 분석력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왕의 의견이라도 ‘안 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반대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세종은 허조를 무척 아꼈다고 한다. 반대하는 내용을 개선하면 성공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소통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마지막은 ‘존경받는 국가’였다. 이는 외부로부터의 평가다. 세종 시대는 뛰어난 과학 기술력이 있었고 정신문화도 꽃피웠다. 중국의 사신들도 “중국에 있다가 조선 땅에 들어오면 모든 사람들이 질서 있고 깨끗하고 예의바르다”며 세종을 칭찬하고 부러워했다. 여기에 막강한 국방력까지 갖춰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 국경을 확립했다. 왜구들이 단 한 번도 침범하지 못했던 때도 바로 세종대다.
농경 기술과 문화를 일본에 전수해 일본의 농업 생산성이 400% 향상되기도 했다. 곳간마다 양식이 넘쳐 남는 식량을 왜구의 근거지에 공급한 결과였다. 힘만 있는 게 아니라 나눌 줄도 알았던 것이다. 이런 역사를 알게 되면 세종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세종 즉위교서를 살펴 보면, ‘나는 정치를 이렇게 하겠다’고 한 상정의식이 있다. 첫 번째가 ‘시인발정(施仁發政)’이다. 인을 베풀어서 정치를 발하겠다. 어진 정치를 하겠다는 의미이고, 어진 정치의 표상으로 각종 복지제도, 형벌의 공평성, 여러 가지 구제정책이 있었다.
두 번째가 ‘민유방본(民唯邦本)’이다. 백성이 국가의 근본으로, 민(民)이 오로지 국토
의 근본이고, 본(本)이 튼튼해야 국가가 안녕하다는 정신에 투철했다. 끊임없이 백성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고, 정치의 요체는 사람이라 생각하여 사람을 소중히 여겼다. 따라서 어질 인(仁), 백성 민(民), 사람 인(人)이 세종의 정치 근본이 된다. 또한, 여덟 가지 국정목표를 발표한다. 첫째, 경제가 국가의 기본이므로 경제를 살린다. 둘째, 교육이 국가의 기본이라 생각하여 교육정책을 튼튼히 한다. 셋째, 관료 선택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하여 인재선발에 신경 쓴다. 넷째, 소외계층을 국가가 돌봐야 한다. ‘환과고독(鰥寡孤獨)’, 즉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만이 아니라 ‘피륭잔질
(疲殘疾)’ 곱사등이, 장애인, 병든 사람, 고통이 있는 사람까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많은 제도를 도입했다. 다섯째, 관권남용을 척결하여 억울한 형벌을 없게하도록 한다. 억울한 사람이 벌을 받으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 생각하여 사형이 내려진 사람의 형사판결문을 낱낱이 다 읽기도 하였다. 그래서 목숨을 살린 이만 해도 수십 건이 넘게 기록되어 있다. 여섯째, 관료들에게는 사무를 남에게 맡기지 말고 직접 처리하라 한다. 일곱째, 미풍양속만큼 중요한 게 없다 생각하여 효자, 의부들에게 상을 많이 내린다. 그리고 여덟째, 묻혀 있는 인재를 등용하게 하여 초야에 묻혀 있는 인재 발굴에 힘쓴다.
앞서 살펴본 세종대왕의 정치 철학과 인재경영을 통해 세종대왕은 따뜻한 인간애에서 출발해 백성을 생각하는 위민사상을 바탕으로 합리적이고 능률적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균형 잡힌 인재 등용을 하였다. 또한 포용, 조화, 화합, 소통, 실천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세종대왕의 인재 경영 리더십을 통해 조선왕조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여유를 찾게 됐으며, 역사적으로 남게 된 과학기술의 발달과 훈민정음의 창제 등을 통해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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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7.23
  • 저작시기2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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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59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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