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 장보고의 생애와 업적
① 장보고의 출생
➁ 장보고의 일대기
→청해진의 의미와 그 세력기반
→해상왕국의 건설과 반영
③ 장보고와 청해진의 몰락
- 장보고의 무역활동
① 당나라와의 교역
② 일본과의 교역
③ 중동 아시아와의 교역
- 현대 대중매체에서 그려진 장보고
① TV 속 장보고와 실제 장보고와의 비교
② 현대 장보고의 의미
Ⅲ. 결론
Ⅱ. 본론
- 장보고의 생애와 업적
① 장보고의 출생
➁ 장보고의 일대기
→청해진의 의미와 그 세력기반
→해상왕국의 건설과 반영
③ 장보고와 청해진의 몰락
- 장보고의 무역활동
① 당나라와의 교역
② 일본과의 교역
③ 중동 아시아와의 교역
- 현대 대중매체에서 그려진 장보고
① TV 속 장보고와 실제 장보고와의 비교
② 현대 장보고의 의미
Ⅲ. 결론
본문내용
으로 21세기 아시아 태평양 지역이 되어야 한다. 동아시아권은 크게 보아 중국 북부(양자강 이북)와 몽골, 남북한,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권과 중국 남부지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포함한 동남아권으로 구분된다. 이들 지역은 적어도 1996년까지만 하더라도 매우 순조롭고도 급속한 경제성장을 달성하여 세계경제의 성장축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개방화와 세계경제에의 적극적 참여로,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경제성장지역으로 부상한 것이다. 김창남,‘동북아제국의 역동적 발전과 역내 분업의 진전’‘동북아지역의 경제 협력 구도와 전망 ’ 1998.3, 11~88
이런 중국의 아래에 지리적으로 우리가 있고, 그리고 일본의 위에 우리가 있다. 다시 말하면 국제무역항로와 역내 경제활동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이런 강점을 잘 살려서 경제적-문화적 측면에서 교류-협력을 강화하여 우리 민족의 경제적 실리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때, 국경을 초월하여 ‘정경분리원칙’에 입각한 장보고 대사의 해양 경영모델은 아직도 정치적-이념적 갈등이 상재하는 동북아 지역에서 추구해야 할 가장 가능성이 큰 경제협력 모델이라 생각든다. 손보기-김문경-김성훈의 ‘장보고와 21세기’ 190쪽
ⓛ동북아 경제권에 위치한 서남해안의 발전
: 서남해안은 인구과 경제규모가 방대한 중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한국과 중국의 경제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그리고 중국의 국제무역과 세계경제에서의 참여폭이 확대됨에 따라, 우리 나라의 서남해안 지역은 동북아 교역에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군산, 목포,완도,여수,광양 등도 현재 최대의 항구인 부산과 인천항처럼 될 수 있다. 그리고 저개발로 인하여 보존된 이 지역의 자연과 역사-문화가 21세기의 전략산업인 관광문화 산업으로도 개발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②민간주도적인 장보고의 사업
: 장보고 대사의 해양경영모델의 특징은 민간주도 경영체제의 우월성이다. 장보고는 재당 신라인들을 중심으로 그의 선단을 꾸려 나갔다. 그런 것처럼 현재 우리의 무역 또한 민간인들이 주도하는 사업을 활성화 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 나라와의 역사적인 갈등, 체제갈등, 정치적 갈등을 완화시키면서 경제적 실리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Ⅲ. 결론
이렇듯 장보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조사를 하면서 깨달은 바지만, 그는 귀족을 중심으로 정치를 하던 신분제 사회에서 어쩌면 그 신분제에 약간의 변동을 가져올 수 있었던 인물이라 생각든다. 낮은 신분에서도 대사라는 칭호까지 받았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가 했던 삼각무역은 이때까지의 역사속에서도 없을 것이다. 현재 각나라와의 교역을 많이 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장보고의 무역 방법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와 같이 동북아 중심에 우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계가 항상 서양을 통해서 돌아갔다면 이제부터라도 아시아를 통해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큰 인물이긴 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다. 그리고 조사 또한 잘 되어 있지 않다. 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장보고란 인물에 대한 역사도 왜곡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1988년과 1989년 두 차례에 걸쳐 처음엔 무등일보, 다음엔 이맹기, 박종규, 양재원씨등 선주협회 회장단의 개인적인 지원하에 산동성 신라소 유적지 적산을 찾았을 때 이 절의 주인(장보고 대사)이 바꿔치기당한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1년 앞선1987년 1월 일본의 적산법화원연구회(대표 千田捻 : 奈良女大 교수)가 오사카아사히 신문과 스미토모 생명노조의 후원으로 이 곳을 방문, 영성현에 \"중수적산법화원위원회\"를 발족케 하고, 그 이듬해 재차 방문하여 법화원 복원을 지원하면서 그 경내에 16개의 비석을 세워 놓은 것이 그것이다. 그 중 두 번째로 큰 비석에 다카스미쓰유키의 명의로 \"배나무 밭 시원한 그늘 아래 엔닌의 옛 절 터\"라고 버젓이 새겨 놓았다. 장보고가 세운 신라원이 그의 식객이었던 일본인 승려 엔닌의 절 터로 바뀐 것이다. 천백여년 전 장보고 대사의 도움 없이는 당나라에서의 구법은커녕 생명을 부지할 수 없었고 귀국 마저 불가능했던 엔닌의 후손들이 그 은혜를 역사왜곡으로 갚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집채만한 자연석을 깍아 세운 기념비에 장보고 대사와 신라원의 내력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단지 엔닌의 위대함만을 높이 치켜세운 다음, 밑도 끝도 없이 한·중·일 3국의우호의 원류라고 새겨 놓았다.
신당서』,『삼국사기』,엔닌 일기등 역사기록을 보이며, 어떻게 중국 땅 안에서 이와 같은 역사왜곡 행위가 공공연히 자행될 수 있느냐고 엄중 항의하였다. 하루 밤을 기다린 끝에 산동성 정부로부터 이것은 지방관원의 무지로 인해 생긴 일로서 반드시 시정하겠으니, 그 시정방안을 말해 달라는 명쾌한 해답을 받아 냈다.
그 대안으로 ① 일본 인들의 비석을 전부 절경 내에서 끌어내고
②이를 시정하는 뜻에서 중국측이 이곳이 장 대사의 본원사찰임을 밝히는 자체 비석을 세우며 ③비록 외교관계가 없지만 한국측에게도 장보고적산법화원 기념비를 세우도록 허용해 달라고 요구했다. 산동성 정부는 이 세가지 제안을 모두 받아들였다.
그 결과 1990년 5월1일, 손보기 교수를 단장으로 하는 30여 명의 한국측 대표단이 적산 법화원 중건식에 참가했을 때는 이미 일본인들이 세운 비석들이 모두 절 밖으로 나와 있었고, 그 앞줄에 우리가 마련한 \"장보고대사 적산법화원 기념비\"(동년 2월 3일자)가 세워졌다. 중국측도 신라인 장보고 대사가 건립한 절이라는 증거 비석을 세워 놓았다. 우리가 세운 기념비(전면 한글424자, 후면 한문 280자)의 비문은 장보고해양경영사연구회와 중앙대 중국연구소가 지었고, 글씨는 장전 하남호 선생이, 소요자금은 한국선주협회가 지원한 연구비의 일부로 충당하였다. 이것은 모두 한·중 외교관계가 이루어지기 전에 얻어 낸 성과였다. 그 날 비석 제막식 때에는 완도군 문화원 김희문 부원장과 박열기 옹, 최우주 교장 등 완도군민 대표들이 함께 참가하여 완도에서 가져간 청해진 해안의 청석을 함께 봉안하였다.
이런 중국의 아래에 지리적으로 우리가 있고, 그리고 일본의 위에 우리가 있다. 다시 말하면 국제무역항로와 역내 경제활동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이런 강점을 잘 살려서 경제적-문화적 측면에서 교류-협력을 강화하여 우리 민족의 경제적 실리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때, 국경을 초월하여 ‘정경분리원칙’에 입각한 장보고 대사의 해양 경영모델은 아직도 정치적-이념적 갈등이 상재하는 동북아 지역에서 추구해야 할 가장 가능성이 큰 경제협력 모델이라 생각든다. 손보기-김문경-김성훈의 ‘장보고와 21세기’ 190쪽
ⓛ동북아 경제권에 위치한 서남해안의 발전
: 서남해안은 인구과 경제규모가 방대한 중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한국과 중국의 경제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그리고 중국의 국제무역과 세계경제에서의 참여폭이 확대됨에 따라, 우리 나라의 서남해안 지역은 동북아 교역에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군산, 목포,완도,여수,광양 등도 현재 최대의 항구인 부산과 인천항처럼 될 수 있다. 그리고 저개발로 인하여 보존된 이 지역의 자연과 역사-문화가 21세기의 전략산업인 관광문화 산업으로도 개발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②민간주도적인 장보고의 사업
: 장보고 대사의 해양경영모델의 특징은 민간주도 경영체제의 우월성이다. 장보고는 재당 신라인들을 중심으로 그의 선단을 꾸려 나갔다. 그런 것처럼 현재 우리의 무역 또한 민간인들이 주도하는 사업을 활성화 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 나라와의 역사적인 갈등, 체제갈등, 정치적 갈등을 완화시키면서 경제적 실리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Ⅲ. 결론
이렇듯 장보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조사를 하면서 깨달은 바지만, 그는 귀족을 중심으로 정치를 하던 신분제 사회에서 어쩌면 그 신분제에 약간의 변동을 가져올 수 있었던 인물이라 생각든다. 낮은 신분에서도 대사라는 칭호까지 받았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가 했던 삼각무역은 이때까지의 역사속에서도 없을 것이다. 현재 각나라와의 교역을 많이 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장보고의 무역 방법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와 같이 동북아 중심에 우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계가 항상 서양을 통해서 돌아갔다면 이제부터라도 아시아를 통해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큰 인물이긴 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다. 그리고 조사 또한 잘 되어 있지 않다. 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장보고란 인물에 대한 역사도 왜곡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1988년과 1989년 두 차례에 걸쳐 처음엔 무등일보, 다음엔 이맹기, 박종규, 양재원씨등 선주협회 회장단의 개인적인 지원하에 산동성 신라소 유적지 적산을 찾았을 때 이 절의 주인(장보고 대사)이 바꿔치기당한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1년 앞선1987년 1월 일본의 적산법화원연구회(대표 千田捻 : 奈良女大 교수)가 오사카아사히 신문과 스미토모 생명노조의 후원으로 이 곳을 방문, 영성현에 \"중수적산법화원위원회\"를 발족케 하고, 그 이듬해 재차 방문하여 법화원 복원을 지원하면서 그 경내에 16개의 비석을 세워 놓은 것이 그것이다. 그 중 두 번째로 큰 비석에 다카스미쓰유키의 명의로 \"배나무 밭 시원한 그늘 아래 엔닌의 옛 절 터\"라고 버젓이 새겨 놓았다. 장보고가 세운 신라원이 그의 식객이었던 일본인 승려 엔닌의 절 터로 바뀐 것이다. 천백여년 전 장보고 대사의 도움 없이는 당나라에서의 구법은커녕 생명을 부지할 수 없었고 귀국 마저 불가능했던 엔닌의 후손들이 그 은혜를 역사왜곡으로 갚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집채만한 자연석을 깍아 세운 기념비에 장보고 대사와 신라원의 내력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단지 엔닌의 위대함만을 높이 치켜세운 다음, 밑도 끝도 없이 한·중·일 3국의우호의 원류라고 새겨 놓았다.
신당서』,『삼국사기』,엔닌 일기등 역사기록을 보이며, 어떻게 중국 땅 안에서 이와 같은 역사왜곡 행위가 공공연히 자행될 수 있느냐고 엄중 항의하였다. 하루 밤을 기다린 끝에 산동성 정부로부터 이것은 지방관원의 무지로 인해 생긴 일로서 반드시 시정하겠으니, 그 시정방안을 말해 달라는 명쾌한 해답을 받아 냈다.
그 대안으로 ① 일본 인들의 비석을 전부 절경 내에서 끌어내고
②이를 시정하는 뜻에서 중국측이 이곳이 장 대사의 본원사찰임을 밝히는 자체 비석을 세우며 ③비록 외교관계가 없지만 한국측에게도 장보고적산법화원 기념비를 세우도록 허용해 달라고 요구했다. 산동성 정부는 이 세가지 제안을 모두 받아들였다.
그 결과 1990년 5월1일, 손보기 교수를 단장으로 하는 30여 명의 한국측 대표단이 적산 법화원 중건식에 참가했을 때는 이미 일본인들이 세운 비석들이 모두 절 밖으로 나와 있었고, 그 앞줄에 우리가 마련한 \"장보고대사 적산법화원 기념비\"(동년 2월 3일자)가 세워졌다. 중국측도 신라인 장보고 대사가 건립한 절이라는 증거 비석을 세워 놓았다. 우리가 세운 기념비(전면 한글424자, 후면 한문 280자)의 비문은 장보고해양경영사연구회와 중앙대 중국연구소가 지었고, 글씨는 장전 하남호 선생이, 소요자금은 한국선주협회가 지원한 연구비의 일부로 충당하였다. 이것은 모두 한·중 외교관계가 이루어지기 전에 얻어 낸 성과였다. 그 날 비석 제막식 때에는 완도군 문화원 김희문 부원장과 박열기 옹, 최우주 교장 등 완도군민 대표들이 함께 참가하여 완도에서 가져간 청해진 해안의 청석을 함께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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