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쿠데타와 미국 - '쿠데타‘의 ’혁명‘으로의 둔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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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와 미국 - '쿠데타‘의 ’혁명‘으로의 둔갑 -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5․16 쿠데타와 미국 - '쿠데타‘의 ’혁명‘으로의 둔갑 -

1. 제 2공화국에 대해서
1)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
2) 제2공화국에 대한 평가

2. 1950~1961 미국의 한국정치 개입 움직임

3. 5.16 쿠데타
1) 박정희 인물 조사
2) 박정희신드롬과 박정희에 대한 평가
3) 5․16 쿠데타와 미국
4) 5․16 쿠데타 - 국내세력간의 진행과정

4. 미국의 다른 국가 쿠데타 조작 움직임

본문내용

허약한 장면 정부를 어떻게 사회경제적 개혁에 단호하게 착수할 수 있는 정부로 바꿀 수 있느냐”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 결과 미국 정부는 주한 미군사령관, 주한 미대사, 주한 미 CIA 등에 쿠테타의 단호한 저지를 지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의 미온적인 태도와 장면 국무총리의 도피, 1군 사령관이었던 이한림 장군의 소극적인 자세였다. 특히 장면과 정적 관계였던 윤보선은 516이 일어나자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승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사료『사상계』
# 혁명(革命) 새벽에 오다
# 5월 16일 미명 首部 서울의 우울한 하늘에 5천 3백명으로 구성된 혁명군의 총성이 울렸다. 그들이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들은 6개조항의 혁명공약을 선언했다.
# 서울에 진주한 혁명군은 즉시 육군본부내에 육군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그들의 명의로 오전 9시를 기해 국토전역에 걸친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사실은 오전 4시 58분 접수한 서울 中央放送局의 전파를 통하여 전 세계에 알려졌다.
#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을」것을 공약하고 나선 혁명정부는 21일 사회악이었던 깡패의 두목들 150여명을 시민들 앞에 사죄 행진 시켰고, 24일 군법회의는 비밀 땐스홀에서 춤추다 구속된 남녀에 최고 1년부터 3월의 징역을 선고했다.
# 군사혁명위원회는 19일 국가재건최고회로 개칭하고 전민 의부의사당에서 근무하고 있다.
# 장도영 中將
# 박정희 小將
# 국가재건최고회의는 20일 장도영 중장을 수반으로 하는 혁명내각을 구성하고, 21일 각료들의 취임 선서식을 거행했다.
# 중앙청을 비롯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청사들은 날이 밝기 전 완전히 혁명군에 접수되었다.
# 군사혁명위는 포고 제2호로 16일 오전 9시를 기하여 국내 금융업계의 일체의 金融에 동결령을 내렸다.
# 시내의 요소요소에 배치된 군복들은 긴장된 혁명의 분위기를 더 한층 느끼게 했다. 서울시내 로타리에서 대기하는 군병들
# 군사혁명위는 포고 제1호로 내외집회금지 국외여행 금지와 함께 언론출판 보도 등의 사전 검열을 실시했다.
# 치안부장과 각도 경찰국장이 새로 임명되어 교통정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치안유지를 계엄사령부에서 맡았다. (서대문 로타리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혁명군)
# 윤대통령은 16일 방송을 통하여 「장총리 이하 전 국무위원이 한시바삐 나와서 시 사태를 수습해주기를 바란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19일 하야를 성명했으나 군사혁명위원의 간청으로 이튿날 번의했다.
# 군사혁명위는 포고제 6호로 제령을 발표하는 한편 정부보 미를 풀어 도시의 세궁민과 절량농가에 무상으로 분배했다.
# 17일 이한림 제이군사령관이 군사혁명지지의 성명을 발표하자 뒤를 이어 18일에는 장군사관학교생들과 교관들이 시 앞 광장에서 혁명을 지지하는 기념식을 거행 시가를 행진했고 19일에는 공군사관학교생들도 혁명지지의 시가행진을 했다.
# 「청년학도들은 반공과 진정한 민주주의 건설을 위한 이 혁명의 대열에 참가하라」를 사관행들의 흥분한 호소는 공군편대의 음향과 더불어 국민들로 하여금 혁명의 성공을 확인케 했으며 환영의 박수를 쏟게 했다.
# 은신중이던 전 국무총리 장면씨는 18일 국무회의당에 자진출두하고 마지막 국무회의를 열어 국무위원총사직의 결의 성명을 발표, 계엄령을 인정함으로써 정권을 군사혁명위에 넘겼다.
# 군사혁명위의장 겸 계엄사령과 장도영 중장을 19일 처음으로 내외기자들과 회견하고 「국례는 민주공화국이며 최고권력기관은 군사혁명위」임을 밝혔다.
♠못 실은 사료들
정창현, 「516쿠데타는 미국이 주도했다」『말』1993년 4월호
조성관 「미 정보기관, 장도영 추대하여 장면정부 뒤엎으려 했다」『월간조선』1993년 8월호
정대철『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있었나』동아일보사, 1997
천희상,「박정희김종필-매그루더 비밀회담 기록」『월간조선』1991년 5월호
장도영,「나의 쿠데타 가담설은 조작이다」『신동아』1984년 8월호
이영신, 「장도영 실각, 육사 5기와 육사 8기의 갈등」『신동아』1984년 5월호
이한빈, 『일하며 생각하며-이한빈 회고록』조선일보사, 1996
『한국군사혁명사』(상하)
「미국이 본 516 군사 정변」『신동아』1982년 3월호
홍규선, 「당시 청와대 비서관의 516관찰기록 : 윤보선 대통령의 24시」『월간조선』1991년 4월호
정용석,「20년만에 공개하는 419, 516 비화 : 마샬 그린 당시 주한미대리대사 본지독점 인터뷰」『신동아』1987년 5월호
방자명,「우리는 516쿠데타 저지에 실패했다.」『신동아』1984년 5월호
「서울발 뉴욕 타임즈 본사독점 계약 : 미국이 본 516군사정권」
김종환 「로스토우 박사의 개발연대 비화」『월간조선 』1992년 12월호
현석호「5월16일 10시의 윤보선씨」『월간중앙』1970년 7월호
이상우「윤보선, 유원식 논쟁의 진위」『정경문화』1983년 11월호
윤보선 「유원식 회고록에 할 말 있다」『정경문화』1983년 10월호
장도영 「나는 역사의 죄인이다」『신동아』1984년 9월호
조세형 「516과 서대문형무소」『월간조선』1985년 12월호
『박정권 18년 그 권력의 내막』 이상우, 동아일보사 1986
4. 미국의 다른 국가 쿠데타 조작 움직임
미국의 직간접적인 영향력 하에 있는 나라들에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권력이 재편되었다.
친미민간정부의 독재정치와 무능과 부패만연 → 이로 인한 민심의 급격한 이반과 미국의 지지철회 → 민중의 봉기에 의한 권력의 붕괴, 이 과정에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 → 민주주의가 정착되어 가는 과정을 혼란으로 호도, 내지 규정 → 친미군사 쿠데타 → 친미군사정부 내지 친미민간정부 수립
♠버마 파키스탄 이집트 라틴아메리카 (쿠바)의 제3세계 1950년대 군사혁명
=참고문헌=
대한민국50년사 1
한국현대사 3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
사상계 (1961년 4월호부터 12월호까지) 호
역사비평 2001년 겨울호 「516쿠데타 주체세력 분석」
역사비평 2001년 여름호 「516쿠데타와 미국」

키워드

윤보선,   쿠데타,   혁명,   5.16 ,   박정희,   장면,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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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0.04
  • 저작시기2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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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7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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