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게 변형된 이론이다. 성리학의 경직성 때문에 공자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존재 하는데, 성리학의 문제까지 공자가 떠넘기는 것은 유교 변형의 역사을 보면 적절하지는 않다.
<가정의 불행>
공자는 3세에 아버지를 잃고 생모 안징재와 살았으나 안징재 역시 소년기에 사망했다. 만년에 그의 아내는 제사상에 육포(肉脯)를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출처하였다. 그러나 외아들인 백어 마저 공자 자신보다 일찍 사망했다.
백어의 두 부인 역시 이름과 성씨, 친정에 대한 기록이 없다. 백어의 가정생활 역시 순탄치 못하여 첫 며느리를 출처하였고, 그 뒤에 얻은 며느리에게서 손자 공급을 본다. 그러나 백어가 사망하면서 새 며느리 역시 어린 손자를 그에게 남겨두고 서씨(庶氏) 집안으로 재혼하였다.
기타
공자의 문하에서 성선설(맹자)과 성악설(순자)이 탄생하였다.
보통 유교는 제자 중 증자-자사로 이어지는 학파를 유교의 적통 학파로 간주한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이자 증자의 제자였던 자사의 손제자(제자의 제자) 중의 한사람을 스승으로 하여 학맥을 이어나갔다. 따라서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학파가 형성되었다.
공자의 제자 중의 한사람인 자궁(子弓)의 제자로 이어지는 학파에서 순자가 나왔다. 유교의 한 학파를 형성하였으나 자궁과 순자 등으로 이어지는 학맥에서는 전국시대에 이사, 상앙 등의 법가로 발전했다.
곡부 공씨는 공자 이전에도 선조가 있었으나, 가문을 본격적으로 일으킨 공자를 시조로 간주한다.
한국의 공씨는 원나라 때 고려로 건너온 공자의 후손 공소(孔紹)를 시조로 한다. 원나라 순제의 조정에서 한림원학사를 지낸 공소는 원나라의 멸망의 조짐이 보이자 고려로 건너왔고 한국 공씨들의 선조가 되었다.
당나라 현종 때 문선왕으로 추존된 이후 공자를 모신 사당은 문묘(文廟)로 부른다. 신라시대에 한국으로 문묘가 전래되었으며, 이후 고려, 조선에 가서는 성균관에 공자의 사당을 모시므로 문묘는 한국에서는 성균관의 다른 별명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느낀점
공자는 이상을 실현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숱한 고통과 눈물 속에서 하루하루 시름하지 않았을까? 보여지는 것에 유독히 집착한 것은 불우했던 어린시절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면모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아니라 그보다는 자신의 행복과 만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공자도 때를 잘못만났다 라는 문구를 읽은 적이 있다. 공감이 간다.
<가정의 불행>
공자는 3세에 아버지를 잃고 생모 안징재와 살았으나 안징재 역시 소년기에 사망했다. 만년에 그의 아내는 제사상에 육포(肉脯)를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출처하였다. 그러나 외아들인 백어 마저 공자 자신보다 일찍 사망했다.
백어의 두 부인 역시 이름과 성씨, 친정에 대한 기록이 없다. 백어의 가정생활 역시 순탄치 못하여 첫 며느리를 출처하였고, 그 뒤에 얻은 며느리에게서 손자 공급을 본다. 그러나 백어가 사망하면서 새 며느리 역시 어린 손자를 그에게 남겨두고 서씨(庶氏) 집안으로 재혼하였다.
기타
공자의 문하에서 성선설(맹자)과 성악설(순자)이 탄생하였다.
보통 유교는 제자 중 증자-자사로 이어지는 학파를 유교의 적통 학파로 간주한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이자 증자의 제자였던 자사의 손제자(제자의 제자) 중의 한사람을 스승으로 하여 학맥을 이어나갔다. 따라서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학파가 형성되었다.
공자의 제자 중의 한사람인 자궁(子弓)의 제자로 이어지는 학파에서 순자가 나왔다. 유교의 한 학파를 형성하였으나 자궁과 순자 등으로 이어지는 학맥에서는 전국시대에 이사, 상앙 등의 법가로 발전했다.
곡부 공씨는 공자 이전에도 선조가 있었으나, 가문을 본격적으로 일으킨 공자를 시조로 간주한다.
한국의 공씨는 원나라 때 고려로 건너온 공자의 후손 공소(孔紹)를 시조로 한다. 원나라 순제의 조정에서 한림원학사를 지낸 공소는 원나라의 멸망의 조짐이 보이자 고려로 건너왔고 한국 공씨들의 선조가 되었다.
당나라 현종 때 문선왕으로 추존된 이후 공자를 모신 사당은 문묘(文廟)로 부른다. 신라시대에 한국으로 문묘가 전래되었으며, 이후 고려, 조선에 가서는 성균관에 공자의 사당을 모시므로 문묘는 한국에서는 성균관의 다른 별명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느낀점
공자는 이상을 실현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숱한 고통과 눈물 속에서 하루하루 시름하지 않았을까? 보여지는 것에 유독히 집착한 것은 불우했던 어린시절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면모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아니라 그보다는 자신의 행복과 만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공자도 때를 잘못만났다 라는 문구를 읽은 적이 있다. 공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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