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낙안(落雁) -왕소군(王昭君)
2. 려태후(呂太后)
3. 조비연(飛燕) - 조의주(趙宜主)
2. 려태후(呂太后)
3. 조비연(飛燕) - 조의주(趙宜主)
본문내용
할 것이오."
그리고는 다시 여록의 딸을 황후로 삼은 다음 자기가 죽은 후에도 여씨천하를 유지하려는 야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7월 신사일(辛巳日), 려태후는 장안(長安) 미앙궁(未央宮)에서 62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려태후가 죽은 후에 태위 주발과 승상 진평(陳平), 주허후(朱虛侯) 유장(劉章) 등은 신속하게 여씨 일족을 주살하고 문제(文帝) 유항(劉恒)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로써 려태후와 그녀의 일족에 의해 다스려지던 한나라는 다시 유씨천하를 회복하게 되었다. 려태후의 묘지는 류방의 장릉(長陵) 서쪽(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동쪽 35리 지점)에 있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려태후본기(呂太后本紀)」에서 그녀의 치적을 다음과 같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혜제와 려태후 시절에는 백성들은 전국시기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군신(君臣)들은 모두 '무위(無爲)'의 경지에서 안식(安息)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혜제는 팔장만 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려태후가 여성으로서 황제의 직권을 대행하여 모든 정치가 방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천하가 태평하고 안락했다. 형벌을 가하는 일도 드물었으며 죄인도 드물었다. 백성들이 농사에 힘을 쓰니 의식(衣食)은 나날이 풍족해졌다."
3. 조비연(飛燕) - 조의주(趙宜主)
중국 한나라 여인 비연(飛燕)은 뛰어난 몸매에 가무(歌舞)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한나라의 성제(成帝)의 총애를 받아 황후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다.
한 번은 황제가 호수에서 선상연(船上宴)을 베풀었는데 갑자기 심한 바람이 불었다. 마침 춤을 추던 비연이 휘청 물로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황제가 급히 그녀의 한쪽 발목을 붙잡았는데 춤의 삼매경에 빠진 비연은 그 상태에서도 춤추기를 그치지 않아 임금의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추었다. 이렇게 하여 “비연이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飛燕作掌中舞)”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서기 743년 봄, 당나라 현종은 양귀비를 데리고 침향정(沈香亭)이란 정자 가에서 모란꽃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때 현종은 천하의 시인 이태백을 불러오라고 명을 내렸다. 어명을 듣고 달려온 이백은 단숨에 청평조사(淸平調詞)라는 연작시 3편을 읊어 내려갔다. 그 중 한 편은 이렇다.
“한 떨기 붉은 꽃 이슬에 향기로워/무산(巫山) 구름비는 헛되이 애만 끊나니/묻노니 한나라 궁전의 누구와 닮았겠나/어여쁜 비연(飛燕)도 새로 단장해야겠네(一枝濃艶露凝香/雲雨巫山枉斷腸/借問漢宮誰得似/可憐飛燕倚新粧)”
이태백은 양귀비의 미모를 노래하면서 비연을 비교했다. 물론 비연의 미모가 양귀비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로 당 현종을 흐뭇하게 했지만, 양귀비와 견줄만한 미인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비연의 본명은 조의주(趙宜主)였다. 날렵한 몸매로 인해 ‘날으는 제비’라는 뜻으로 조비연(趙飛燕)으로 불렸던 것이다.
이렇게 임금의 총애를 받은 비연은 세상에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세월은 겨우 10년, 황제가 죽자 조비연은 탄핵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평인으로 걸식을 하다가 자살로 그 생을 끝맺고 만다.
그리고는 다시 여록의 딸을 황후로 삼은 다음 자기가 죽은 후에도 여씨천하를 유지하려는 야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7월 신사일(辛巳日), 려태후는 장안(長安) 미앙궁(未央宮)에서 62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려태후가 죽은 후에 태위 주발과 승상 진평(陳平), 주허후(朱虛侯) 유장(劉章) 등은 신속하게 여씨 일족을 주살하고 문제(文帝) 유항(劉恒)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로써 려태후와 그녀의 일족에 의해 다스려지던 한나라는 다시 유씨천하를 회복하게 되었다. 려태후의 묘지는 류방의 장릉(長陵) 서쪽(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동쪽 35리 지점)에 있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려태후본기(呂太后本紀)」에서 그녀의 치적을 다음과 같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혜제와 려태후 시절에는 백성들은 전국시기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군신(君臣)들은 모두 '무위(無爲)'의 경지에서 안식(安息)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혜제는 팔장만 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려태후가 여성으로서 황제의 직권을 대행하여 모든 정치가 방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천하가 태평하고 안락했다. 형벌을 가하는 일도 드물었으며 죄인도 드물었다. 백성들이 농사에 힘을 쓰니 의식(衣食)은 나날이 풍족해졌다."
3. 조비연(飛燕) - 조의주(趙宜主)
중국 한나라 여인 비연(飛燕)은 뛰어난 몸매에 가무(歌舞)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한나라의 성제(成帝)의 총애를 받아 황후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다.
한 번은 황제가 호수에서 선상연(船上宴)을 베풀었는데 갑자기 심한 바람이 불었다. 마침 춤을 추던 비연이 휘청 물로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황제가 급히 그녀의 한쪽 발목을 붙잡았는데 춤의 삼매경에 빠진 비연은 그 상태에서도 춤추기를 그치지 않아 임금의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추었다. 이렇게 하여 “비연이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飛燕作掌中舞)”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서기 743년 봄, 당나라 현종은 양귀비를 데리고 침향정(沈香亭)이란 정자 가에서 모란꽃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때 현종은 천하의 시인 이태백을 불러오라고 명을 내렸다. 어명을 듣고 달려온 이백은 단숨에 청평조사(淸平調詞)라는 연작시 3편을 읊어 내려갔다. 그 중 한 편은 이렇다.
“한 떨기 붉은 꽃 이슬에 향기로워/무산(巫山) 구름비는 헛되이 애만 끊나니/묻노니 한나라 궁전의 누구와 닮았겠나/어여쁜 비연(飛燕)도 새로 단장해야겠네(一枝濃艶露凝香/雲雨巫山枉斷腸/借問漢宮誰得似/可憐飛燕倚新粧)”
이태백은 양귀비의 미모를 노래하면서 비연을 비교했다. 물론 비연의 미모가 양귀비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로 당 현종을 흐뭇하게 했지만, 양귀비와 견줄만한 미인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비연의 본명은 조의주(趙宜主)였다. 날렵한 몸매로 인해 ‘날으는 제비’라는 뜻으로 조비연(趙飛燕)으로 불렸던 것이다.
이렇게 임금의 총애를 받은 비연은 세상에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세월은 겨우 10년, 황제가 죽자 조비연은 탄핵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평인으로 걸식을 하다가 자살로 그 생을 끝맺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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