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 홍암 나철의 생애와 민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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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종교 홍암 나철의 생애와 민족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데리고 삼성사 뜰의 잡초부터 뽑게 하였다. 사당 수리도 끝내고 9일 아침에는 마침 일요일인지라 천수(天水)를 드리고 향을 피워 경배식을 거행하였다. 14일에는 제자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땅은 우리 한배께서 하늘에 오르신 곳이라 예로부터 祠堂을 세우고, 신상을 모시어서 香火가 4000년 간 끊이지 아니하고 이어왔는데 불행히도 이 몇 해 동안에 제사를 폐하고 守護조차 없이하여 祠堂과 齎堂이 무너지고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게 되었으니 슬프다! 존귀하신 삼성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자손 된 자 어찌 감히 안전하기를 바라리요. 내가 大敎를 받든지 8년에 이제야 비로서 이 땅에서 檀儀를 받들게 되니 지극한 원을 마치었노라."
말을 마친 나철은 사당 옆 언덕에 올라가 북쪽으로 백두 천산(天山)과 남쪽으로 선조 묘소를 향하여 멀리 망배하직한 뒤 곧 수도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오늘 새벽 세시부터 3일간 음식ㅇ들 끊고 수도를 하니 이 문을 열지 말라"(自今日 上年三時當始 三日間絶食修道切勿開此門)이란 21자를 써서 문중 방에 붙이고 안으로 문을 잠근 뒤에 밖에는 오직 먹 가는 소리만 들릴 뿐이였다. 이날 당직은 엄주천·안영중 두 사람이었다. 저녁 10시까지도 먹 가는 소리를 두 사람은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어찌 먹을 가는 소리였겠는가? 나라가 망해 먹이 갈고 달아지듯 그 진과 액이 다 갈아지는 듯한 소리가 아니였겠는가?
그 다음날 아침 16일에 두 사람은 밤 사이가 궁금하여 수도실 앞을 달려갔다. 아무런 인가척도 들리지 않았다. 의하하게 생각한 엄주천·안영중 두 사람은 불안한 예감이 들어 문을 떼고 방안에 들어가 보니 홍암 나철은 미소를 머금고 손과 발을 곱게 펴고 흰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입은 채 반드시 누워 목숨을 거두고 있었다. 대종교에서는 죽음을 조천(朝天)이라고 한다. 대종교에는 대종교 고유의 비전되어 내려오는 숨을 조절(調息)하여 목숨을 가두는 방법이 있다. 이를 폐기조천(閉氣朝天)이라 한다. 약 하나 쓰지 않고 홍암은 폐기조천한 것이다. 검시를 맡은 의사는 "사인이 없는 사망이므로 가히 성사(聖死)라 하겠습니다. 범인(凡人)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라고 검진하였다. 홍암은 자기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를 세 가지로 밝히는 유서 「순명삼조」(殉命三條)를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제1조: 죄악이 무겁고 材德이 없어서 능히 단군 神族을 건지지 못하여 오늘의 모욕을 당 하매 대종교를 위하여 죽노라.
제2조: 대종교를 받든지 8년에 발고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주신 한얼님 은혜를 갚지 못 하매 한얼님을 위해 죽노라.
제3조: 이 몸이 가달길에 떨어진 인류의죄를 대신으로 받았으매 천하를 위하여 죽노라."
나철의 죽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아니고 예수의 죽음도 아니였다. 아마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방법으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거두었다. 「순명삼조」를 요약하면 ①인류의 신앙인 대종교를 위하여, ②우주의 참 주인이신 한배 하느님을 위하여, ③천하의 영장인 인류를 위해서이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을 보는 동서양의 차이가 대단히 다른 것이 있지 않나 한번 생각해 본다. 이승과 저승이란 말 그대로 죽음이란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는 정도이지 서양같이 심연(abyss)이나 무(無, nonbeing), 절망같은 것이 아니다. 나철은 살아 이루지 못한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죽어 이룩할 수 있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조천이란 말 그대로 한울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곧 죽어 신선(神仙)이 된다고 믿는다. 살았을 때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산 자와 죽은 자는 단절이 아니고 연속이다. 같이 어울려질 수 있다고 믿는다. 죽어 아무 할 일 없다고 생각했다면 일본을 4번이나 건너 다니며 나라 찾겠다던 홍암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생명을 끊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사상이야말로 그의 죽음을 이해하는 바른 태도가 아닌가 한다.
그가 삶을 사랑하고 살아 남은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한 태도는 그의 장례의식에 관한 「유계장사칠조」(遺戒葬死七條)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1. 현재 반도 땅에는 이 몸을 묻을 곳이 없으니 화장하여 깨끗이 하라.
2. 염습은 평소 입던 무명으로 하고, 관곽은 쓰지 말고 부들이나 갈대 자리로 하라.
3. 화려한 상여는 쓰지 말로 지게로 옮기라.
4. 부고를 내지 말고, 조상을 받지 말고, 손님을 청하지 말라.
5. 명정은 다만 姓名만을 써라.
6. 敎門의 형제 자매는 喪章을 붙이지 말라."
부측에는 유해의 재는 반드시 한얼님 산(백두산) 아래 총본사 가까운 땅에 묻어라. 특별히 가족들에게는 떠나간 뒤에 몸을 깨끗이 하고, 평안히 하고 곡도 하지 말고, 상복도 입지 말고 시묘 등 옛법은 다 폐하고 다만 복은 366일간만 입어라고 했다. 기제사에도 고기, 술은 쓰지 말고 밥 한 그릇과 찬 한 가지만 차려 놓고 신주 같은 것은 만들지 말라고 했다. 관혼상제 이것은 유교 풍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사가 아닌가? 중요하다 못해 이것 때문에 국민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조선의 늙은이들은 자기들이 죽은 후에 자기들을 잘 모셔 주기를 바란다. 죽어서까지 자기 자아(Ego)를 연장하고 싶어서이다. 파라밋과 같은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 진시황제의 무덥 같은 것들은 죽음 이후의 자아를 확장하기 위한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이 거짓 자아들의 형태들이다.
홍암은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 죽어서 살은 것이다. 나라도 국적도 없는 상황에 살아 죽으니 죽어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그의 「순명삼조」와 「유계장사칠조」를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구세주로 죽은 것도 의인으로 죽은 것도 아니다. 나라 죽인 죄인, 단군 한배님께 못 다한 죄인, 진리에 충실하지 못한 죄인으로 죽은 것이다. 제자들은 스승의 유언을 받들어 삼베나 무명으로 시신을 염하고, 부들이나 달대 돗자리 드응로 관 대신 쓰게 하고, 상여 대신 지게에 옮기게 하고, 화장으로 깨끗이 하여 백두산 밑에 그 재를 묻었다 그리고 천상천하에 신위는 단군 한배님 한분 밖에 모실 필요가 없다고 하여 신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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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8.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8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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