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않음이 없다”면서 꽃을 기르는 것을 학문 연구 및 경륜의 한 방편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강희안은 원예뿐 아니라 문장, 그림, 글씨에도 뛰어나 삼절(三絶)로 추앙을 받았다. 정인지, 최항 등과 함께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붙일 정도로 학문적 성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화려함보다는 조용하고 담박함을 추구한 그는 겸손한 선비였다. 오늘날에도 전하는 `‘고사관수도’, ‘소동개문도(小童開門圖)’ 등과 같은 그림을 보면 그의 품성이 드러난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강희안의 졸기(卒記)는 그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에는 한 가지 재능만 있어도 스스로 자기를 과시하며 몸값을 높이려 하는데, 강희안은 재주가 많았음에도 어리석은 사람처럼 자신을 낮추었다. 이 어찌 어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다.
강희안은 원예뿐 아니라 문장, 그림, 글씨에도 뛰어나 삼절(三絶)로 추앙을 받았다. 정인지, 최항 등과 함께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붙일 정도로 학문적 성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화려함보다는 조용하고 담박함을 추구한 그는 겸손한 선비였다. 오늘날에도 전하는 `‘고사관수도’, ‘소동개문도(小童開門圖)’ 등과 같은 그림을 보면 그의 품성이 드러난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강희안의 졸기(卒記)는 그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에는 한 가지 재능만 있어도 스스로 자기를 과시하며 몸값을 높이려 하는데, 강희안은 재주가 많았음에도 어리석은 사람처럼 자신을 낮추었다. 이 어찌 어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