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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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국이민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조약보다도 미래 지향적인 뜻이 담겨 있다. 한미 두 나라의 국교수립은 한국 외교사에 있어서 '세계를 향한 하나의 거보(巨步)'라고 표현할 수가 있다.
조선과 미국의 만남은 그 역사가 깊다. 1882년 공식적인 조약체결을 위한 만남 이전에도 몇 차례의 우연한 조우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마다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며 이해를 하게 되었다. 한미 두 나라는 전쟁이나 유혈 충돌보다는 지극히 평화적이고 인도적인 접촉으로부터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과 미국의 첫 대면은 1853년 1월 28일 부산에서 이루어졌다. 하와이에 기지를 둔 미국포경선 '사우스 아메리카'호가 일본인 표류자 두 명을 본국에 인도해주기 위해서 먼저 부산 용당포에 닿았던 것이다. 이 배에는 선장인 워싱턴 워커씨 가족이 함께 타고 있었는데, 조선 관헌들이 선상에 올라 미국인들과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10일간 체류하던 이들은 안전하게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1855년 6월 강원도 통천해안에, 1865년에는 경상도 영일 해안에 미국 선원이 표류 끝에 상륙한 사실이 있었는데,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른 채 그저 외국인으로만 알고 육로로 청국에 호송을 해 준 바가 있다.
두번째 한미 접촉은 1866년 1월 11일 미국 범선 '서프라이즈'호가 평안도 철산부 선천포해안에 표류되었을 때였다. 항해도중 난파된 서프라이즈호의 선원들은 관헌들의 호의로 음식, 의류, 담배 등을 제공받은 후 말을 태워서 청국으로 보내졌다. 이때가 조선과 미국이 상대방을 확실히 알고 접촉한 뜻있는 만남이었다.
세번째로는 1866년 7월 11일 미국상선 '제너럴 셔어먼'호가 평양 연안에 상륙을 한 때였다. 천진에 체류중이던 미국인 프레스톤이 제너럴 셔어먼호를 타고 한반도로 항해를 해 온 것이다. 이 배는 황해를 거쳐서 대동강으로 거슬러 올라 왔고, 평양경내까지 와서 닻을 내렸다. 선장 등은 교역하기를 원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천주교 탄압의 책임을 묻는 등 위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식량을 내놓으라고 무기를 들이대기도 했으며 민간인들에게 포격을 가해서 여러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에 평안도관찰사 박규수(朴珪壽)는 화포공격을 개시했고, 조그마한 배 3 ~ 4척에 화약과 인화물질을 가득 실은 채 불을 붙여 셔어먼 호에 부딪치게 했다. 셔어먼호는 화염에 휩싸였고 선원들은 불에 타 숨졌다. 셔어먼호 사건은 한미 접촉 가운데 최초의 불행한 사건으로 기록이 된다.
네번째로는 1871년 5월 19일 미국의 아시아 함대 군함 5척이 존 로저스 제독의 지휘로 강화도에 도착한 것이다. 그들은 셔어먼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따졌고 보복적인 포격을 감행해서 3백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6월 10일 이 함대는 중국으로 철수 했고, 이른바 '신미양요(辛未洋擾)'라 불리우는 이 사건 이후 미국은 조선에 대해서 수교교섭을 여러차례 시도해 왔다. 그후 조선은 일제의 무력에 의해서 1876년 최초로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중국의 이홍장(李鴻章)은 미국과도 외교관계를 가질 것을 조선 조정에 권고하므로써 미국의 로버트 슈펠트 제독이 천진을 떠나 한미수교를 맺기 위해서 강화도에 도착했다.
고종은 1882년 3월 24일 신헌(申櫶)을 전권대신으로, 부관으로는 김홍집(金弘集)을 임명했다. 양국대표는 4월 4일 위임장을 교환하고 정식수교를 위한 회담을 열었다. 그리고 제물포에서 '한미우호통상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전문 14조의 이 조약의 첫머리는 '대조선국과 아메리카합중국은 두 나라 인민 사이의 영원한 친선우호관계를 수립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 조약체결 후 당시 조선은 서양의 여러 나라와 차례로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한미조약이 발표된 다음해인 1883년 4월 미국 전권공사 푸우트(Foote)가 서울에 부임했고, 5월 20일 고종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조선정부는 그 답례로 1883년 7월 19일 민영익(閔泳翊)을 전권대신에 부관으로는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 청년 정치인을 임명해 미국에 파견했다. 민영익 등 사절들은 미국 대통령 이하 국민들로부터 '주의깊은 환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1888년 1월 17일 박정양(朴定陽)은 초대 주미공사로 신임장을 받았고, 미국은 다시 호레이스 알렌을 주한공사로 보내면서 본격적인 외교 시대를 열었다. 이즈음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 기독교 전파와 교육사업 등에 나서고 이러한 한미교류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때까지 그 맥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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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8.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84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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