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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과 건국을 위한 위교적포섭
본문내용
러나 이러한 유엔 상대 외교활동은 이 박사가 미국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다른 국가나 국제기구에 대해서도 외교활동을 전개하려는 의지를 가졌음을 확인해준다.
이 박사는 1946년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 미국을 방문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할 때도 미국의 조야를 상대로 한 활동과 더불어 유엔 회원국 대표들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을 전개했었다. 이러한 유엔 회원국 대표들을 상대로 한 이 박사 진영의 외교활동은 훗날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하게 하고 유엔의 한국문제에 대한 결의가 이 박사의 건국노선에 부합하도록 하는 데, 그리고 건국된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한민국 건국 후 1950년대의 이 박사의 외교정책을 두고 대미일변도 외교(對美一邊倒外交)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이는 이 박사의 자주외교 의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당시 국가의 상황이 대미외교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고, 국가의 재정이 다변적 외교를 전개하기에 크게 미흡하여 불가피하게 대미일변도의 양상을 보인 것이지 자주적 다변외교의 필요성에 대한 이 박사의 인식이 결여되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 박사는 1946년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 미국을 방문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할 때도 미국의 조야를 상대로 한 활동과 더불어 유엔 회원국 대표들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을 전개했었다. 이러한 유엔 회원국 대표들을 상대로 한 이 박사 진영의 외교활동은 훗날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하게 하고 유엔의 한국문제에 대한 결의가 이 박사의 건국노선에 부합하도록 하는 데, 그리고 건국된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한민국 건국 후 1950년대의 이 박사의 외교정책을 두고 대미일변도 외교(對美一邊倒外交)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이는 이 박사의 자주외교 의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당시 국가의 상황이 대미외교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고, 국가의 재정이 다변적 외교를 전개하기에 크게 미흡하여 불가피하게 대미일변도의 양상을 보인 것이지 자주적 다변외교의 필요성에 대한 이 박사의 인식이 결여되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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