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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한 많은 억압적인 정책은 철회되었다. 흐루시초프의 지배 하에서 정치적 통제는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의 반대파가 공산당 내에서 점차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1964년에 그는 축출되었다. 러시아의 역사적 전통과는 달리 흐루시초프는 조용히 물러날 수 있었다. 흐루시초프에 이어 브레즈네프는 1970년대 내내 소연방 공산당(CPSU) 서기장으로서 소비에트를 지배했다. 그의 집권기간은 국내적 안정과 공세적 대외정책을 분명하게 강조하는 시기로 특징지어졌다. 브레즈네프 집권기간 동안 러시아는 십 여 년에 이르는 정체의 시기를 겪었다. 경직된 러시아 경제는 서서히 쇠퇴해 갔으며 정치적 분위기는 점점 더 비관적으로 변해갔다. 1982년 브레즈네프가 죽은 후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의 지위를 계승했으며 그 다음에는 체르넨코로 이어졌는데, 이들 양자는 중대한 변화를 시도하기에 충분한 기간 동안 생존하지 못했다. 1985년 3월 고프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을 때에야 개혁에 대한 긴급한 필요가 현실화되었다.
소비에트의 개혁에 고르바초프의 주장은 글라스노스트(공개, 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구조재편)라는 잘 알려진 두 가지 개념으로 집약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신사고를 표방하면서 사회적-경제적 통제를 완화하는 등 전반적으로 신선한 분위기를 이끌면서 소비에트 경제를 재생시키려 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관료주의의 과감한 청산과 부패의 철저한 감시를 강조하면서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그러나 1986년 4월 소연방 정부가 체르노빌에서 발생한 악명 높은 핵사고(러시아의 광범한 지역을 방사능 물질로 오염시킨 핵발전소의 폭발)를 수일 동안 숨겼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글라스노스트는 신뢰성을 상실했다. 체르노빌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고르바초프는 모든 신문기사에 대한 통제를 철폐하는 조치를 내놓았다. 이 때부터 소비에트에 신선한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수십 년에 이르는 소비에트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각종 문제가 공개적인 대중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빈곤, 부패, 자원의 비효율적인 관리, 아프간 전쟁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그 외의 각종 문제가 들추어지고 불만이 제기되었다. 모스크바의 새로운 지도자인 옐친을 비롯해 급진적인 개혁파 지도자가 등장했으며 사하로프와 같은 유명한 반체제인사가 처음으로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소연방 정부는 각종 비판의 표적이 되었지만, 더 이상 어떤 조치를 취할 수도 없었으며 사태의 흐름을 그대로 수용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1989년 초 소비에트 군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1989년 봄에는 1927년 이래 최초로 인민대의원대회 대의원에 출마한 복수의 후보에 대한 선택을 허용하는 공개적인 선거가 실시되었다. 동유럽 여러 국가의 정부들도 쇄도하는 대중적인 비판에 직면하면서 잇따른 혁명으로 차례로 붕괴했으며 베를린 장벽으로 그 절정에 달했다.
1990년 소연방은 스스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각 구성공화국들은 독립을 선언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공화국에서는 옐친이 의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독립 움직임을 주도했다. 대규모 파업이 발생하여 공산당이 노동계급의 대표기관이라는 전통적인 주장에 타격을 가했다. 정부와 당에 반대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경제상황은 악화되고 식량부족은 심각해졌으며 범죄율은 급격하게 증가했다. 고르바초프는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대중의 요구와 엄격한 통제의 재실시를 주장하는 당의 요구 사이에서 시달리면서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1991년 여름 급진적 개혁운동은 정부를 공개적으로 무시할 만큼 강력해졌다. 고르바초프에 대한 언론의 비판은 강화된 반면, 옐친은 6월의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8월 18일 당의 보수파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필사적인 모험을 감행했다. 국방장관 야조프와 부통령 야나예프가 이끄는 세력은 고르바초프를 크리미아의 휴양별장에 억류했다. 다음날 아침 쿠데타 지도자들은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고르바초프가 사임했다고 발표했다. 신 정부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군대가 파견되었지만 옐친과 각 공화국 대통령이 이끄는 엄청난 대중적 저항에 직면했다. 결국 3일 후 쿠데타 기도는 좌절되고 고르바초프는 복위되었지만 이미 그의 지위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그 해 말 소연방은 투표를 통해 소멸되었으며 독립국가연합(CIS)으로 대체되었다. 마침내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소연방 대통령직을 사임했으며, 12월 31일 자정 크렘린 꼭대기의 소비에트 국기는 러시아의 삼색기로 바뀌었다.
소비에트의 개혁에 고르바초프의 주장은 글라스노스트(공개, 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구조재편)라는 잘 알려진 두 가지 개념으로 집약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신사고를 표방하면서 사회적-경제적 통제를 완화하는 등 전반적으로 신선한 분위기를 이끌면서 소비에트 경제를 재생시키려 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관료주의의 과감한 청산과 부패의 철저한 감시를 강조하면서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그러나 1986년 4월 소연방 정부가 체르노빌에서 발생한 악명 높은 핵사고(러시아의 광범한 지역을 방사능 물질로 오염시킨 핵발전소의 폭발)를 수일 동안 숨겼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글라스노스트는 신뢰성을 상실했다. 체르노빌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고르바초프는 모든 신문기사에 대한 통제를 철폐하는 조치를 내놓았다. 이 때부터 소비에트에 신선한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수십 년에 이르는 소비에트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각종 문제가 공개적인 대중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빈곤, 부패, 자원의 비효율적인 관리, 아프간 전쟁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그 외의 각종 문제가 들추어지고 불만이 제기되었다. 모스크바의 새로운 지도자인 옐친을 비롯해 급진적인 개혁파 지도자가 등장했으며 사하로프와 같은 유명한 반체제인사가 처음으로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소연방 정부는 각종 비판의 표적이 되었지만, 더 이상 어떤 조치를 취할 수도 없었으며 사태의 흐름을 그대로 수용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1989년 초 소비에트 군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1989년 봄에는 1927년 이래 최초로 인민대의원대회 대의원에 출마한 복수의 후보에 대한 선택을 허용하는 공개적인 선거가 실시되었다. 동유럽 여러 국가의 정부들도 쇄도하는 대중적인 비판에 직면하면서 잇따른 혁명으로 차례로 붕괴했으며 베를린 장벽으로 그 절정에 달했다.
1990년 소연방은 스스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각 구성공화국들은 독립을 선언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공화국에서는 옐친이 의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독립 움직임을 주도했다. 대규모 파업이 발생하여 공산당이 노동계급의 대표기관이라는 전통적인 주장에 타격을 가했다. 정부와 당에 반대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경제상황은 악화되고 식량부족은 심각해졌으며 범죄율은 급격하게 증가했다. 고르바초프는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대중의 요구와 엄격한 통제의 재실시를 주장하는 당의 요구 사이에서 시달리면서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1991년 여름 급진적 개혁운동은 정부를 공개적으로 무시할 만큼 강력해졌다. 고르바초프에 대한 언론의 비판은 강화된 반면, 옐친은 6월의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8월 18일 당의 보수파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필사적인 모험을 감행했다. 국방장관 야조프와 부통령 야나예프가 이끄는 세력은 고르바초프를 크리미아의 휴양별장에 억류했다. 다음날 아침 쿠데타 지도자들은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고르바초프가 사임했다고 발표했다. 신 정부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군대가 파견되었지만 옐친과 각 공화국 대통령이 이끄는 엄청난 대중적 저항에 직면했다. 결국 3일 후 쿠데타 기도는 좌절되고 고르바초프는 복위되었지만 이미 그의 지위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그 해 말 소연방은 투표를 통해 소멸되었으며 독립국가연합(CIS)으로 대체되었다. 마침내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소연방 대통령직을 사임했으며, 12월 31일 자정 크렘린 꼭대기의 소비에트 국기는 러시아의 삼색기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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