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세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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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재세례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세(1042-1055)와 군사동맹의 체결을 계획하였다.
이때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엘 케롤라리오스(1043-1058)는 그의 관할지역으로 주장하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영향력이 확장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반대하면서 분규가 시작되었다.
케롤라리오스는 총대주교구의 독자적 자치권을 주장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유일한 로마제국의 수도임을 내세우면서 로마교회(교황청)와 그리스도세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동반자로서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강력한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총대주교는 그의 관할지역에 있는 서방라틴전례의 성당에서 동방비잔틴전례를 지키도록 명령하였고 신조에 '그리고 성자로부터'라는 구절의 삽입을 금지하였다.
레오 9세는 두교회의 관계개선을 위해 실바 칸디다의 추기경 훔베르토(1000-1061)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협상은 처음부터 잘못 시작되었다. 사절단은 황제를 만나 도도한 자세로 교황의 절대권을 강조하며 서방라틴교회의 전례관습이 전승에 맞는 유일한 것임을 내세웠다.
황제가 중재에 나서서 케롤라리오스 총대주교에게 사절단을 만나도록 권유하였으나 총대주교는 거절하였다. 훔베르토는 케롤라리오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파문서를 작성하여 1054년 7월 16일에 성 소피아대성당의 제대 위에 놓고 로마로 돌아갔다.
파문소식을 들은 케롤라리오스 추종자들이 소동을 일으키자 황제는 질서회복을 위해 파문서를 소각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소집된 교회회의에서 훔베르토 추기경과 일행을 파문하였다. 이로써 두교회가 헤어져 그리스도교 세계는 둘로 갈라졌다.
그러나 이러한 결별은 두교회 사이의 공식파문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훔베르토는 레오 9세가 사망한 다음 총대주교를 파문하였기 때문에 파문의 효력은 없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교회회의에서 파문한 대상도 교황이 아니라 사절단이었다.
그래서 30년 후에 교황 우르바누스 2세(재위:1088-1099)가 투르크의 침공을 받던 동로마제국의 군원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황제에게 비잔틴전례 중에 생존자를 위한 기도문에서 교황의 이름이 삭제된 것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라틴전례의 성당들이 폐쇄된 이유를 질문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총대주교는 두교회의 결별에 대한 공식문헌이 없기 때문에 1054년의 상호파문은 훔베르토와 케롤라리오스 사이의 개인적 문제로서 두교회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며 교황이 파문받지 않았기 때문에 기도문에 교황 이름이 삽입될 수 있다고 답변하였고 폐쇄된 성당은 라틴전례의 성당이 아니라 침략인 노르만족의 성당이라고 해명하였다.
1438년 3월에 비잔틴제국의 황제 요한 8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함께 대표단을 이끌고 페라라-피렌체공의회(1431-1445)에 참석하여 연옥, '그리고 성자로부터', 성령, 성체성사,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공동합의를 이루고 일치교령이 반포되었다.
공의회는 "로마의 거룩한 사도좌는 전세계(全世界) 안에서 수위권을 갖고 있으며 로마교황은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그리스도의 참된 대리자, 전교회(全敎會)의 으뜸,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의 아버지이며 교사이다"라고 정의하였다.
1439년 6월 6일에 양측 대표들은 일치교령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비잔틴제국에서 수도자들과 국민들의 반대로 일치교령을 선포하기를 주저하였고 교령에 서명한 고위성직자들도 그들의 동의를 취소하였다.
1452년에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1448-1453)는 일치교령을 선포하였으나 1453년 5월 29일에 동로마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폐망함으로써 교회의 재일치 희망은 사라졌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가 소집되면서 고대동방교회와 비잔틴전통의 정교회들은 가톨릭교회와 만남의 자리를 갖고 두교회의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하였다. 교황 요한 23세(재위:1958-1963) 이후 현대 교황들과 동방교회의 지도자들은 대화를 통해서 분열의 원인이었던 교리논쟁도 해결하기 시작하였다.
일부 고대동방교회의 지도자들은 칼체돈 공의회의 그리스도 논쟁은 신학문제보다는 용어문제에 기인하였다고 인정하면서 가톨릭교회와 함께 신앙공동선언도 발표하였으며 교리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합동대화위원회도 구성하였다.
1979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디미트리오스 1세를 방문한 자리에서 신학대화를 위한 '가톨릭-정교회합동위원회'가 결성되어 오늘날 대화의 결실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 중, 고등학교에서 사용되는 세계사 교과서에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관계에 관한 서술에 있어서 두 교회 사이의 틈새가 벌어져 결별에 이르게 된 역사적 배경이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이러한 결별을 이끈 역사사건들이 모두 서술되기에는 교과서의 지면이 부족함은 이해되면서도 1054년 결별의 직접적 원인인 케롤라리오스사건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교과서들은 성화상 파괴논쟁을 결별의 계기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서방교회의 성화상 지지와 비잔틴교회의 성화상 배척으로 양분되었다는 인식에 이르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교황이 성화상 파괴를 비난하고 성화상 공경을 옹호하였지만 성화상 파괴논쟁은 비잔틴교회 안에서 황제들과 일부 주교들이 성화상을 반대함으로써 여기에 대부분의 주교들과 수도자 그리고 국민들이 성화상 옹호에 나서면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하고 아울러 성화상 공경은 동방교회 안에서는 활발한 신심으로 오늘날까지 이루어지고 있음도 참고함이 바람직하다.
아울러 교과서에 '성화상 숭경'이라고만 언급되어 있을 때에 교사나 학생들에게 우상숭배로 잘못 이해되거나 잘못 전해질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성화상 파괴논쟁을 다루면서 성화상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견해가 올바르게 받아들여지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의 결별과정에 관한 설명을 통해서 초대교회에서부터 교황의 수위권이 확립되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고 두교회의 헤어짐이 교리나 윤리와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한 심각한 차이점으로 피할 수 없이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여기에는 사소한 인간적 대립에서 비롯되었다는 역사적 교훈이 참고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김성태(신부, 가톨릭대 교수, 가톨릭교리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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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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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87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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