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 철학적 이유 : 형이상학적 이유라고도 부른다. 예술은 idea로 부터 2 단계나 떨어진 것이다.
즉 현상보다도 낮은 단계를 모방(mimesis)함으로써 idea의 관조를 방해하기 때문에 추방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침대와 목수와 화가와 같은 이야기로서 목수는 침대를 만들지만 화가는 목수가 만든 침대를 모방하니 진실과 본질을 희롱한다는 논리이다.
2) 도덕적 이유 : 그리스의 문학 작품들에서 묘사되고 있는 신과 인간의 모습은 결코 인간이 본받을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비도덕적이며 국가의 유용성에 비추어 보아도 적절치 못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로 보자면 그리스 로마신화 정도가 구전으로 내려오는 문학이었을 것이다. 문학들을 철학의 논리로 재단하는 것이 일면 어이없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 당시만 하더라도 철학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없었고 심지어는 과학마저도 철학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던 시기였던 것이다.
3) 심리적 이유: 美的 情緖는 감정에 호소하는 것으로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며, idea는 이성을 통해서만 인식되므로 예술처럼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이성의 능력을 약화 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추방해야 한다. 뭐 이것은 어떻게 해석하려하여도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이유이다. 예술은 이성에도 작용하지만 역시 동일한 선상에서 감성과 감정에 호소하는 분야에 속해있지 않은가.
결국 Platon에게 있어서의 예술은 독자적인 가치나 영역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국가적인 목적에서 善의 실현을 위한 목적에 근거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수단적 위치에서 예술을 평가하고 있다. 플라톤이 공산주의의 효시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의 이데아론과 예술추방론에서는 어쩐지 전제주의적인, 독재적인 냄새가 나긴 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B.C.322)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역사상 위대한 사상가 중 한사람으로 거의 모든 서양의 학문 분야에 있어 선구자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북아프리카 마케도니아에서 왕의 의사였던 니코마코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연과학에 큰 관심을 가져 B.C.367년 아테네의 플라톤이 세운 인류 최초의 대학, 아카데미아에 입학, 플라톤의 제자가 되었다. 플라톤이 죽은 B.C.347년까지 20년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다방면에 걸친 깊은 연구를 하였다. 아소스(Assos)를 거쳐 B.C.342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의 초청으로 알렉산더 왕자의 스승이 되어 주로 도덕과 예술 교육을 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B.C.335년에 철학 학원인 리케이온(Lykeion)을 창립했는데, 학원 안에 있는 지붕 덮인 산책로를 오가며 대화식으로 강의했다 하여 소요학파라고도 불렸다. 그는 이곳에서 12년 동안 학문연구에 몰두하여『오르가논』,『형이상학』,『정치학』,『시학』,『니코마스의 윤리학』,『영혼론』,『자연학』등 엄청난 저술을 하여 고대 학문 체계를 완성하였다. 『오르가논』에서는 논리학을 집대성하고, 연역법의 초기모습인 3단논법의 추리형식을 체계화하였다. 형이상학으로서의 제1철학에서는 모든 존재를 형상과 질료로 나누고 자기는 부동이면서 남을 운동케 하는 순수한 형상을 내세워 세계를 목적론적으로 해석하였다.『정치학』등에서 그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 및 이성적 동물로 파악, 정치제도는 특정한 형태에 국한시켜서는 안 될 것이며 국민의 성격과 필요에 의해 선택될 것이라고 하면서 군주제·귀족제·공화제의 세가지 정체를 인정하였다. 언어예술론에 있어서 고전적 작극법의 전거가 된『시학』은 비극론 밖에 남아 있지 않으나, 그의 예술론을 전반적으로 알 수 있는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을 현실의 모방으로 생각하였고, 비극의 목적으로서 동정과 두려움을 통한 카타르시스 즉, 정화의 문제를 언급하였다. 그는 비극을 서사시보다 높은 위치에 놓았다. 그의 윤리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니코마스의 윤리학』에서, 만물은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폈던 그는, 인간의 윤리적 목표를 '행복'이라 보고, 행복은 '중용'의 덕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B.C.323년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으로 반 마케도니아 운동이 일어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스로 아테네를 떠나 B.C.322년 카르키스에서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스 철학자들의 학설을 수집, 비판하고 독창적인 체계를 세운 그는 거의 모든 분야의 학문에 대해 저술을 남겼다. 특히 그의 철학사상은 스콜라 철학에 원용되어 중세를 지배, 플라톤과 더불어 사상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즉 현상보다도 낮은 단계를 모방(mimesis)함으로써 idea의 관조를 방해하기 때문에 추방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침대와 목수와 화가와 같은 이야기로서 목수는 침대를 만들지만 화가는 목수가 만든 침대를 모방하니 진실과 본질을 희롱한다는 논리이다.
2) 도덕적 이유 : 그리스의 문학 작품들에서 묘사되고 있는 신과 인간의 모습은 결코 인간이 본받을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비도덕적이며 국가의 유용성에 비추어 보아도 적절치 못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로 보자면 그리스 로마신화 정도가 구전으로 내려오는 문학이었을 것이다. 문학들을 철학의 논리로 재단하는 것이 일면 어이없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 당시만 하더라도 철학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없었고 심지어는 과학마저도 철학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던 시기였던 것이다.
3) 심리적 이유: 美的 情緖는 감정에 호소하는 것으로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며, idea는 이성을 통해서만 인식되므로 예술처럼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이성의 능력을 약화 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추방해야 한다. 뭐 이것은 어떻게 해석하려하여도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이유이다. 예술은 이성에도 작용하지만 역시 동일한 선상에서 감성과 감정에 호소하는 분야에 속해있지 않은가.
결국 Platon에게 있어서의 예술은 독자적인 가치나 영역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국가적인 목적에서 善의 실현을 위한 목적에 근거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수단적 위치에서 예술을 평가하고 있다. 플라톤이 공산주의의 효시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의 이데아론과 예술추방론에서는 어쩐지 전제주의적인, 독재적인 냄새가 나긴 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B.C.322)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역사상 위대한 사상가 중 한사람으로 거의 모든 서양의 학문 분야에 있어 선구자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북아프리카 마케도니아에서 왕의 의사였던 니코마코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연과학에 큰 관심을 가져 B.C.367년 아테네의 플라톤이 세운 인류 최초의 대학, 아카데미아에 입학, 플라톤의 제자가 되었다. 플라톤이 죽은 B.C.347년까지 20년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다방면에 걸친 깊은 연구를 하였다. 아소스(Assos)를 거쳐 B.C.342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의 초청으로 알렉산더 왕자의 스승이 되어 주로 도덕과 예술 교육을 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B.C.335년에 철학 학원인 리케이온(Lykeion)을 창립했는데, 학원 안에 있는 지붕 덮인 산책로를 오가며 대화식으로 강의했다 하여 소요학파라고도 불렸다. 그는 이곳에서 12년 동안 학문연구에 몰두하여『오르가논』,『형이상학』,『정치학』,『시학』,『니코마스의 윤리학』,『영혼론』,『자연학』등 엄청난 저술을 하여 고대 학문 체계를 완성하였다. 『오르가논』에서는 논리학을 집대성하고, 연역법의 초기모습인 3단논법의 추리형식을 체계화하였다. 형이상학으로서의 제1철학에서는 모든 존재를 형상과 질료로 나누고 자기는 부동이면서 남을 운동케 하는 순수한 형상을 내세워 세계를 목적론적으로 해석하였다.『정치학』등에서 그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 및 이성적 동물로 파악, 정치제도는 특정한 형태에 국한시켜서는 안 될 것이며 국민의 성격과 필요에 의해 선택될 것이라고 하면서 군주제·귀족제·공화제의 세가지 정체를 인정하였다. 언어예술론에 있어서 고전적 작극법의 전거가 된『시학』은 비극론 밖에 남아 있지 않으나, 그의 예술론을 전반적으로 알 수 있는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을 현실의 모방으로 생각하였고, 비극의 목적으로서 동정과 두려움을 통한 카타르시스 즉, 정화의 문제를 언급하였다. 그는 비극을 서사시보다 높은 위치에 놓았다. 그의 윤리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니코마스의 윤리학』에서, 만물은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폈던 그는, 인간의 윤리적 목표를 '행복'이라 보고, 행복은 '중용'의 덕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B.C.323년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으로 반 마케도니아 운동이 일어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스로 아테네를 떠나 B.C.322년 카르키스에서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스 철학자들의 학설을 수집, 비판하고 독창적인 체계를 세운 그는 거의 모든 분야의 학문에 대해 저술을 남겼다. 특히 그의 철학사상은 스콜라 철학에 원용되어 중세를 지배, 플라톤과 더불어 사상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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