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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운 수도이자, '세계의 절반'으로 정하고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했다.원래 이스파한의 중심지는 마이단이라는 광장이었으나, 샤는 새로운 마이단을 건설하고 기존의 마이단과 새로운 마이단까지 3km를 지붕있는 시장으로 이었다. 이를 위해 그루지야인 상인들이 이주해왔다.
<이스파한의 마이단>가운데에 보이는것이 샤 모스크이고, 왼쪽의 둥그런 돔이 안마당이나 미나렛이 없이 예배실만 있는 샤흐 루트필라 모스크이다. 오른쪽의 건물은 숭고한 문(알리 카푸)이고, 그 뒤로 궁전이 연결되어 있다. 광장의 넓이는 8만 제곱미터. 광장의 남쪽은 시장으로, 이곳에 상인을 끌어들여오기 위해 임대료를 대폭 깎았다. 평상시에는 잡상인들, 장인들, 기타 등등 나온 목적이 분명치 않은 사람으로 가득 찼지만 공식 행사가 있을 경우에는 깔끔히 치워졌다. 어떻게 치웠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샤 모스크>이 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은 샤 모스크일것이다. 벽돌만 180만개, 47만 2500개의 타일을 들여서 지었다고 한다. 오스만은 이즈니크 지역의 자기타일을 사용한 반면, 페르시아는 카샨 지역에서 자기 타일을 생산했다. 다만 이렇게 대책없이 양이 많이 들다보니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색을 희생하고 생산을 간편하게 만드는 쿠에르다 세카란 기술을 이용했다. 건설에만 거의 20년이 걸렸다.
<샤 모스크의 정문>
<샤 모스크의 내부구조>위 그림을 보면 문은 저기 저 아래 있는데 문 위로 아치가 크게 그려져있고, 그리고 기하학적으로 내부를 파 들어간 무카르나스 장식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문 크기보다 훨씬 크게 아치를 만들고 문을 아치 안쪽에 파들어간 공간에 위치시킨 것을 이완이라고 한다. 소위 이란형 모스크라 불리는 건축물은 이런 이완이 4개씩 있다. 정문에 하나, 예배실의 문 앞에 하나, 그리고 정문과 예배실 양 옆의 회랑에 있는 두 개의 방(주로 신학교등으로 쓰이는)의 문 앞에 하나씩. 그리고 각 이완 옆에는 미나렛을 만든다. 샤 모스크의 예배실은 정문에서 바로 앞에 있지 않다. 키블라 방향을 맞추기 위해 정문에서 약 45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두번째 그림의 이반이 이 글에서의 이완이다)
<샤 모스크의 정문. 이완 옆에 미나렛이 보인다. 미나렛의 꼭대기에는 발코니가 있다>마지막으로 이슬람 세계를 나눠먹었던 제국은 인도의 무굴 제국이다. 위에서도 보았듯이, 인도는 엄청나게 부유한 땅이고, 특히 강력한 정부가 들어서고 경제가 안정화되자 번영은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에 무굴의 황제들은 어디에 내놓아도 지지 않을 화려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건물 중 하나가 바로 '승리의 도시' 파테푸르 시크리이다.
<파테푸르 시크리의 정문. 불란드 다르와자>1568년, 수피교 성자인 살림 치슈티는 악바르에게 곧 아들 셋을 얻을것이고, 그렇게 되면 '파사바드' 페르시아어로 '승리의 도시'라는 도시를 짓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악바르가 아들 셋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1571년부터 승리의 도시라는 도시를 짓게 되는건 예언이 아니다. 악바르가 이미 들었는데 무슨 예언이란 말인가? 뭐 아무튼간에 완공은 되었지만, 정작 악바르는 바뻤던 나머지 찾지 않았다. 갖은 수를 써서 맘에 드는 여자와 결혼했더니만 일에 치여서 얼굴 한번 보기 힘든 꼴이다. 나중에 그 여자는 떠나가버린다. 여기서는 악바르가 먼저 선수를 쳤다. 1588년 악바르는 라호르로 수도를 옮겼고, 1619년 페스트가 돈 이후 파테푸르 시크리는 몰락했다.이 도시는 근처의 붉은 사암을 이용해 지었으며, 황제의 일관된 관심 하에서 꾸준히 지어졌다. 살림 치슈티는 건설 도중 사망, 도시 내에는 그의 무덤이 있는데, 성자의 무덤은 하얀 대리석을 이용해서 지었다. 돌성벽의 둘래는 무려 11km에 달했다.하지만 역시 무굴 제국 최고이자 최후의 건축은 이게 되야 할 것 같다.
<타지마할>1631년, 무굴의 황제 샤 자한의 아내 뭄타즈 마할이 세상을 떠나자 황제는 영묘 건설을 지시했다. 공사는 무려 26년이나 계속되었고, 2000명의 일꾼과 1000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었다. 공사자금에 대해서는 2200만 루피와 500만 루피라는 두 가지 정보를 얻었는데 어느쪽이 맞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평가를 받은 무굴제국의 대 프로젝트인만큼 재료와 재료의 수입처도 화려한데 흰 대리석은 라자스탄에서, 벽옥은 펀잡에서, 옥과 크리스탈은 중국에서, 터키석은 티베트에서, 청금석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홍옥수는 아랍에서 들여왔다. 건설 총 책임자인 우스타드 이사가 맡았으며 델리, 카나우지, 라호르, 물탄, 바그다드, 시라즈,부하라, 오스만 지역의 기술자들이 찾아와서 돔과 조각, 서예등을 담당했다. 유럽의 기술자도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돔의 직경은 35m. 높이는 7m에 달하고 양 옆의 미나렛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끝에 발코니가 있으며 높이는 40m에 달한다. 영묘의 팔각형 모양은 페르시아의 영묘 모양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샤 자한의 슬픔은 이런 화려한 공사로 달래졌으려나. 그러나 정작 그는 호전적인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유폐, 타지마할이 보이는 아그라 강가의 요새에서 사망하고 만다. 아우랑제브는 화려한 건축에는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고, 결국 무굴 제국의 화려한 건축물들은 그렇게 사라지게 된다.1842년, 술탄 압둘메지드 1세는 새로운 궁전을 건설할 것을 명령한다. 뭐, 그건 딱히 문제될 게 없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이야 뭐 나락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스만제국은 술탄의 제국이었고, 술탄의 말이 곧 법이 될 수 도 있었으니까.문제는 그 지으라는 궁전이었다. 술탄이 원하는것은 토프카피도, 첨탑도, 이완도, 돔도 아니었다. 유럽식 궁전이었다.
<돌마바흐체>1853년 보스포루스 해협 인근의 돌마바흐체는 완전한 서구식 궁전이었다. 한때 '기독교도의 적'으로 불리우기도 했으며 '지상에 드리운 신의 그림자' '두 성도의 보호자'가 다스리는 제국의 수도 한복판에 서구식 궁전이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은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였다.뭐, 칼리프제와 술탄제를 폐기해버린 지금의 터키 정부로써야 관광 수입이 늘어서 좋은 일이지만 말이다.
<이스파한의 마이단>가운데에 보이는것이 샤 모스크이고, 왼쪽의 둥그런 돔이 안마당이나 미나렛이 없이 예배실만 있는 샤흐 루트필라 모스크이다. 오른쪽의 건물은 숭고한 문(알리 카푸)이고, 그 뒤로 궁전이 연결되어 있다. 광장의 넓이는 8만 제곱미터. 광장의 남쪽은 시장으로, 이곳에 상인을 끌어들여오기 위해 임대료를 대폭 깎았다. 평상시에는 잡상인들, 장인들, 기타 등등 나온 목적이 분명치 않은 사람으로 가득 찼지만 공식 행사가 있을 경우에는 깔끔히 치워졌다. 어떻게 치웠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샤 모스크>이 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은 샤 모스크일것이다. 벽돌만 180만개, 47만 2500개의 타일을 들여서 지었다고 한다. 오스만은 이즈니크 지역의 자기타일을 사용한 반면, 페르시아는 카샨 지역에서 자기 타일을 생산했다. 다만 이렇게 대책없이 양이 많이 들다보니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색을 희생하고 생산을 간편하게 만드는 쿠에르다 세카란 기술을 이용했다. 건설에만 거의 20년이 걸렸다.
<샤 모스크의 정문>
<샤 모스크의 내부구조>위 그림을 보면 문은 저기 저 아래 있는데 문 위로 아치가 크게 그려져있고, 그리고 기하학적으로 내부를 파 들어간 무카르나스 장식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문 크기보다 훨씬 크게 아치를 만들고 문을 아치 안쪽에 파들어간 공간에 위치시킨 것을 이완이라고 한다. 소위 이란형 모스크라 불리는 건축물은 이런 이완이 4개씩 있다. 정문에 하나, 예배실의 문 앞에 하나, 그리고 정문과 예배실 양 옆의 회랑에 있는 두 개의 방(주로 신학교등으로 쓰이는)의 문 앞에 하나씩. 그리고 각 이완 옆에는 미나렛을 만든다. 샤 모스크의 예배실은 정문에서 바로 앞에 있지 않다. 키블라 방향을 맞추기 위해 정문에서 약 45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두번째 그림의 이반이 이 글에서의 이완이다)
<샤 모스크의 정문. 이완 옆에 미나렛이 보인다. 미나렛의 꼭대기에는 발코니가 있다>마지막으로 이슬람 세계를 나눠먹었던 제국은 인도의 무굴 제국이다. 위에서도 보았듯이, 인도는 엄청나게 부유한 땅이고, 특히 강력한 정부가 들어서고 경제가 안정화되자 번영은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에 무굴의 황제들은 어디에 내놓아도 지지 않을 화려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건물 중 하나가 바로 '승리의 도시' 파테푸르 시크리이다.
<파테푸르 시크리의 정문. 불란드 다르와자>1568년, 수피교 성자인 살림 치슈티는 악바르에게 곧 아들 셋을 얻을것이고, 그렇게 되면 '파사바드' 페르시아어로 '승리의 도시'라는 도시를 짓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악바르가 아들 셋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1571년부터 승리의 도시라는 도시를 짓게 되는건 예언이 아니다. 악바르가 이미 들었는데 무슨 예언이란 말인가? 뭐 아무튼간에 완공은 되었지만, 정작 악바르는 바뻤던 나머지 찾지 않았다. 갖은 수를 써서 맘에 드는 여자와 결혼했더니만 일에 치여서 얼굴 한번 보기 힘든 꼴이다. 나중에 그 여자는 떠나가버린다. 여기서는 악바르가 먼저 선수를 쳤다. 1588년 악바르는 라호르로 수도를 옮겼고, 1619년 페스트가 돈 이후 파테푸르 시크리는 몰락했다.이 도시는 근처의 붉은 사암을 이용해 지었으며, 황제의 일관된 관심 하에서 꾸준히 지어졌다. 살림 치슈티는 건설 도중 사망, 도시 내에는 그의 무덤이 있는데, 성자의 무덤은 하얀 대리석을 이용해서 지었다. 돌성벽의 둘래는 무려 11km에 달했다.하지만 역시 무굴 제국 최고이자 최후의 건축은 이게 되야 할 것 같다.
<타지마할>1631년, 무굴의 황제 샤 자한의 아내 뭄타즈 마할이 세상을 떠나자 황제는 영묘 건설을 지시했다. 공사는 무려 26년이나 계속되었고, 2000명의 일꾼과 1000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었다. 공사자금에 대해서는 2200만 루피와 500만 루피라는 두 가지 정보를 얻었는데 어느쪽이 맞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평가를 받은 무굴제국의 대 프로젝트인만큼 재료와 재료의 수입처도 화려한데 흰 대리석은 라자스탄에서, 벽옥은 펀잡에서, 옥과 크리스탈은 중국에서, 터키석은 티베트에서, 청금석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홍옥수는 아랍에서 들여왔다. 건설 총 책임자인 우스타드 이사가 맡았으며 델리, 카나우지, 라호르, 물탄, 바그다드, 시라즈,부하라, 오스만 지역의 기술자들이 찾아와서 돔과 조각, 서예등을 담당했다. 유럽의 기술자도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돔의 직경은 35m. 높이는 7m에 달하고 양 옆의 미나렛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끝에 발코니가 있으며 높이는 40m에 달한다. 영묘의 팔각형 모양은 페르시아의 영묘 모양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샤 자한의 슬픔은 이런 화려한 공사로 달래졌으려나. 그러나 정작 그는 호전적인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유폐, 타지마할이 보이는 아그라 강가의 요새에서 사망하고 만다. 아우랑제브는 화려한 건축에는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고, 결국 무굴 제국의 화려한 건축물들은 그렇게 사라지게 된다.1842년, 술탄 압둘메지드 1세는 새로운 궁전을 건설할 것을 명령한다. 뭐, 그건 딱히 문제될 게 없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이야 뭐 나락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스만제국은 술탄의 제국이었고, 술탄의 말이 곧 법이 될 수 도 있었으니까.문제는 그 지으라는 궁전이었다. 술탄이 원하는것은 토프카피도, 첨탑도, 이완도, 돔도 아니었다. 유럽식 궁전이었다.
<돌마바흐체>1853년 보스포루스 해협 인근의 돌마바흐체는 완전한 서구식 궁전이었다. 한때 '기독교도의 적'으로 불리우기도 했으며 '지상에 드리운 신의 그림자' '두 성도의 보호자'가 다스리는 제국의 수도 한복판에 서구식 궁전이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은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였다.뭐, 칼리프제와 술탄제를 폐기해버린 지금의 터키 정부로써야 관광 수입이 늘어서 좋은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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