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체계적이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지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통합되어지는 것이 필요함이 강조되고 있다. 즉 네트워킹과 통합의 노력이 무엇보다도 필요함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국에서의 청소년 복지 증진을 위한 지역사회복지 활동에 대한 외국의 사례와 우리나라에서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접근 방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네트워킹(networking)과 통합(integration)의 차원에서 우리에게 적절한 접근의 모형이 무엇인가를 모색해 보는 것은 실천적인 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 3 장 청소년 보호를 위한 활동 현황
제 1 절 청소년 보호 활동의 역사적 전개 양상
그간의 우리나라 청소년 보호 활동은 크게 불우청소년에 대한 보호, 문제청소년에 대한 통제와 선도, 일반청소년에 대한 개발기회 제공 등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어느 사회에서나 고아나 걸식아동과 같은 불우청소년은 그 사회의 능력과 여건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보호되었다. 문제청소년에 대한 통제는 전통사회에서도 존재했던 것으로 추측되나, 아무래도 청소년문제가 심각한 양상으로 대두된 산업화 이후에 주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위 두 부류에 속하지 않는 다수의 일반청소년을 위한 개발기회의 제공은 이러한 서비스 제공을 위한 사회의 전반적인 여력이 성숙되어감에 따라 뒤늦게 발전한 것이 보통이었다. 이상의 간략한 설명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 3-1> 보호대상 청소년에 따른 보호활동
보호 대상 청소년
보호활동
집단명칭
예
주목표
예
불우청소년
고아, 걸식아, 소년소녀가장
보호
의식주의 제공, 학비감면 등
문제청소년
우범청소년, 비행청소년
통제와 선도
탈선방지, 교정, 보호관찰 등
일반청소년
학생 등
개발기회의 제공
인격도야, 심신단련, 청소년 참여
한편 청소년 보호에 있어서 보호의 제공주체는 크게 공공기관(정부, 지자체, 검 경), 민간조직(종교기관, 각종 법인 및 단체, 자생조직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이 절에서는 우리나라 전통사회 이래 청소년 보호의 발전과정을 위 세 청소년 집단을 중심으로, 그리고 서비스 제공 주체들을 중심으로 간략히 고찰하고자 한다.
1. 전통사회의 청소년 보호 : 불우청소년을 위한 제한적 보호
전통사회나 근대사회, 혹은 현대사회를 막론하고 고아나 걸식아와 같은 불우청소년의 문제는 사회적 대응을 요하는 중요한 사회문제였다. 서구사회에서 고아문제에 대한 근대적 대응은 시설을 통한 보호였다. 일찍이 구빈법 시대의 구빈원(almshouse 또는 poorhouse)은 고아들을 여타 빈곤인구와 함께 수용보호한 전례를 남겼다. 서구에서는 후일 아동과 청소년을 별도로 격리하여 보호하는 고아원의 발전이 뒤따랐다. 우리나라 전통사회에서 고아문제에 대한 접근은 시설보호가 아닌 다른 형태를 취했다. 고아에 대한 시설보호가 나타난 것은 서구 사회사업과의 조우 이후의 일이었던 것이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청소년문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친족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부랑하는 고아와 자연재해로 아사의 위험에 직면한 기아(飢兒)를 대상으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요보호 청소년집단에 대한 국가의 정책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의식제공에 머문 것이 보통이었다. 역사적 기록이 남아있는 한국 고대(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와 중세(고려시대~조선시대)에 이루어진 청소년 보호는 주로 유교와 불교의 구제관에 입각한 것이었다. 한국 전통사회에서는 고아문제에 대해 일차적으로 친족책임이 강조되었는데, 이는 국가기구가 출현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루어진 매우 오랜 사회적 개입방식이었다.
우리나라 전통사회에서의 청소년 보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사회적인 보호가 필요한 청소년은 대략 13세까지의 고아 또는 기아(飢兒)였다. 둘째, 이들에 대한 보호에 있어서는 일차적으로 친족부양이 강조되었고, 그것이 여의치 못할 경우 국가에 의해서 한시적인 보호가 제공되었다. 셋째, 국가에 의한 청소년보호는 생존과 직결되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의 제공위주였고, 흉년시에는 일시적인 시설보호도 제공되었다. 넷째, 한국 전통사회에서 문제청소년에 대한 통제장치는 있었으나 일반청소년을 위한 개발기회 제공과 같은 적극적이고 발전적인 국가 정책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한국 전통사회에서 일반 청소년을 위한 개발기회의 제공이나 문제청소년에 대한 통제와 선도는 부분적으로 향약과 같은 지역사회 조직체에 의해 수행되기도 하였다.
2. 근대 초기 : 불우청소년에 대한 보호활동의 전개와 일반청소년을 위한 개발기회 제공의 시작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쳐 공공, 민간의 청소년 보호를 살펴본다면 우선 첫째로, 전통사회의 불우청소년을 위한 보호 활동이 서구 사회사업과의 조우를 통해 근대적인 형태로 발돋움하였다. 선교사들에 의한 고아원의 설립은 카돌릭 신부들에 의한 것이 효시이다. 1831년에 조선교구를 설립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Monsignor Bruguiere 신부가 입국하여 대목(vicar apostolic)으로 임명되어 전 조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단체는 1854년에 조선영해회(La Sainte Enfance)를 설립하였는데(조화영, 1990:7), 영해회는 오늘날의 고아원 사업과 유사한 시설사업을 전개하였다. 영해회는 1880년대 제7대 교구장으로 블랑(J.M.C.Blanc) 주교가 임명되면서 서울 곤당골에서 사업을 이어 나갔고, 고아원 사업은 샬트로 성 바오로회가 관장하여, 1888년 종현에 수녀원을 마련하면서 그 부속건물로 고아원을 설립, 145명의 고아를 양육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한편 장애아동에 대한 수용시설로 1897년 "불구아동의 집"이 서울에 세워졌는데, 호주장로교선교부의 짐 페리(J.Perry)양의 관할하에 9명의 선교사로 이사회를 구성하였다. 1901년에 23명이 수용되어 있었고(19명은 남아), 이들에게 한글, 한문, 창가, 산술, 지리, 재봉, 기타 기초지식을 교육하였다.
구호사업에서는 구세군이 선구적이었다. 1919년 구세군은 거지수용시설을 구세군사관학교 안에 마련하였다(민경배,19??청소년 복지서비스의 행정적 실태와 관리
이러한 상황에서 외국에서의 청소년 복지 증진을 위한 지역사회복지 활동에 대한 외국의 사례와 우리나라에서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접근 방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네트워킹(networking)과 통합(integration)의 차원에서 우리에게 적절한 접근의 모형이 무엇인가를 모색해 보는 것은 실천적인 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 3 장 청소년 보호를 위한 활동 현황
제 1 절 청소년 보호 활동의 역사적 전개 양상
그간의 우리나라 청소년 보호 활동은 크게 불우청소년에 대한 보호, 문제청소년에 대한 통제와 선도, 일반청소년에 대한 개발기회 제공 등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어느 사회에서나 고아나 걸식아동과 같은 불우청소년은 그 사회의 능력과 여건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보호되었다. 문제청소년에 대한 통제는 전통사회에서도 존재했던 것으로 추측되나, 아무래도 청소년문제가 심각한 양상으로 대두된 산업화 이후에 주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위 두 부류에 속하지 않는 다수의 일반청소년을 위한 개발기회의 제공은 이러한 서비스 제공을 위한 사회의 전반적인 여력이 성숙되어감에 따라 뒤늦게 발전한 것이 보통이었다. 이상의 간략한 설명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 3-1> 보호대상 청소년에 따른 보호활동
보호 대상 청소년
보호활동
집단명칭
예
주목표
예
불우청소년
고아, 걸식아, 소년소녀가장
보호
의식주의 제공, 학비감면 등
문제청소년
우범청소년, 비행청소년
통제와 선도
탈선방지, 교정, 보호관찰 등
일반청소년
학생 등
개발기회의 제공
인격도야, 심신단련, 청소년 참여
한편 청소년 보호에 있어서 보호의 제공주체는 크게 공공기관(정부, 지자체, 검 경), 민간조직(종교기관, 각종 법인 및 단체, 자생조직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이 절에서는 우리나라 전통사회 이래 청소년 보호의 발전과정을 위 세 청소년 집단을 중심으로, 그리고 서비스 제공 주체들을 중심으로 간략히 고찰하고자 한다.
1. 전통사회의 청소년 보호 : 불우청소년을 위한 제한적 보호
전통사회나 근대사회, 혹은 현대사회를 막론하고 고아나 걸식아와 같은 불우청소년의 문제는 사회적 대응을 요하는 중요한 사회문제였다. 서구사회에서 고아문제에 대한 근대적 대응은 시설을 통한 보호였다. 일찍이 구빈법 시대의 구빈원(almshouse 또는 poorhouse)은 고아들을 여타 빈곤인구와 함께 수용보호한 전례를 남겼다. 서구에서는 후일 아동과 청소년을 별도로 격리하여 보호하는 고아원의 발전이 뒤따랐다. 우리나라 전통사회에서 고아문제에 대한 접근은 시설보호가 아닌 다른 형태를 취했다. 고아에 대한 시설보호가 나타난 것은 서구 사회사업과의 조우 이후의 일이었던 것이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청소년문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친족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부랑하는 고아와 자연재해로 아사의 위험에 직면한 기아(飢兒)를 대상으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요보호 청소년집단에 대한 국가의 정책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의식제공에 머문 것이 보통이었다. 역사적 기록이 남아있는 한국 고대(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와 중세(고려시대~조선시대)에 이루어진 청소년 보호는 주로 유교와 불교의 구제관에 입각한 것이었다. 한국 전통사회에서는 고아문제에 대해 일차적으로 친족책임이 강조되었는데, 이는 국가기구가 출현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루어진 매우 오랜 사회적 개입방식이었다.
우리나라 전통사회에서의 청소년 보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사회적인 보호가 필요한 청소년은 대략 13세까지의 고아 또는 기아(飢兒)였다. 둘째, 이들에 대한 보호에 있어서는 일차적으로 친족부양이 강조되었고, 그것이 여의치 못할 경우 국가에 의해서 한시적인 보호가 제공되었다. 셋째, 국가에 의한 청소년보호는 생존과 직결되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의 제공위주였고, 흉년시에는 일시적인 시설보호도 제공되었다. 넷째, 한국 전통사회에서 문제청소년에 대한 통제장치는 있었으나 일반청소년을 위한 개발기회 제공과 같은 적극적이고 발전적인 국가 정책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한국 전통사회에서 일반 청소년을 위한 개발기회의 제공이나 문제청소년에 대한 통제와 선도는 부분적으로 향약과 같은 지역사회 조직체에 의해 수행되기도 하였다.
2. 근대 초기 : 불우청소년에 대한 보호활동의 전개와 일반청소년을 위한 개발기회 제공의 시작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쳐 공공, 민간의 청소년 보호를 살펴본다면 우선 첫째로, 전통사회의 불우청소년을 위한 보호 활동이 서구 사회사업과의 조우를 통해 근대적인 형태로 발돋움하였다. 선교사들에 의한 고아원의 설립은 카돌릭 신부들에 의한 것이 효시이다. 1831년에 조선교구를 설립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Monsignor Bruguiere 신부가 입국하여 대목(vicar apostolic)으로 임명되어 전 조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단체는 1854년에 조선영해회(La Sainte Enfance)를 설립하였는데(조화영, 1990:7), 영해회는 오늘날의 고아원 사업과 유사한 시설사업을 전개하였다. 영해회는 1880년대 제7대 교구장으로 블랑(J.M.C.Blanc) 주교가 임명되면서 서울 곤당골에서 사업을 이어 나갔고, 고아원 사업은 샬트로 성 바오로회가 관장하여, 1888년 종현에 수녀원을 마련하면서 그 부속건물로 고아원을 설립, 145명의 고아를 양육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한편 장애아동에 대한 수용시설로 1897년 "불구아동의 집"이 서울에 세워졌는데, 호주장로교선교부의 짐 페리(J.Perry)양의 관할하에 9명의 선교사로 이사회를 구성하였다. 1901년에 23명이 수용되어 있었고(19명은 남아), 이들에게 한글, 한문, 창가, 산술, 지리, 재봉, 기타 기초지식을 교육하였다.
구호사업에서는 구세군이 선구적이었다. 1919년 구세군은 거지수용시설을 구세군사관학교 안에 마련하였다(민경배,19??청소년 복지서비스의 행정적 실태와 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