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 박물관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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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 역사 박물관을 다녀와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중국 역사 박물관을 다녀와서...

본문내용

력이 출현했다. 이렇게 하여 전후 400년에 걸친 한조도 멸망하게 되었다.
7. 삼국·양진·남북조시대
조조의 아들 조비가 제위에 오를 무렵 강남에서는 손권이, 촉에서는 유비가 자신의 세력기반을 굳혀 3국 정립의 형세를 이루었다. 오는 절강·강서 등의 산지에 사는 산월을 굴복시켰고, 촉은 재상 제갈량이 국정을 보좌하여 운남지방의 원주민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이 두나라보다는 중원에 위치하여 세력을 키원 위의 국력이 가장 강했다. 위의 사마염은 265년 제위를 물려받아 진을 세웠다. 진은 280년 오를 평정하여 천화통일을 달성했다. 통일후 무제, 즉 사마염은 자신의 일족을 여러 나라의 왕으로 봉했으나, 도리어 봉왕제의 강화가 동족간의 싸움을 격화시켜 8왕의 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때 어려 왕들이 북방민족의 무력을 이용하는 바람에 결국 316년 흉노의 유씨에 의해 낙양과 장안이 함락됨으로써 서진이 멸망했다.
서진이 멸망하지 이미 강남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낭야왕 사마예가 건강에서 직위하고, 317년 동진을 월남한 북부의 호족들이 진을 구성했으며, 강남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일종의 호족연합적 성격의 정권을 만들었다. 동진·유송·남제·남양·남진으로 이어지는 남조의 왕조들은 정치적·군사적 기반이 취약했고, 정치상의 싸움과 반란이 잇따랐다. 그러나 남조는 북부지방이 분열되어 있었고, 북부와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곧 멸망하지 않고 589년까지 명맥을 이어갔다.
북쪽에는 5호 즉 흉노·갈·저·강의 다섯 북방민족이 세운 성·하·전조·후조 등의 16국이 있었다. 이 나라들은 몹시 불안정했고 존속기간도 모두 짧았다. 군소국가로 난립하던 북쪽지방을 처음 통일한 인물은 북위의 태무제였다. 그는 강력한 북방민족의 군사력과 최호 등 한족 지식인들의 협력에 힘입어 북부를 통일하게 된 것이다. 효문제는 낙양으로 천도한 뒤 국방상 주요 전선이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북방에 세웠던 6진의 진민들이 냉대받고 천민화 되어가면서 523년 반란을 일으킨다. 이 난은 이주영에 의해 진압되지만 정치적 혼란은 가중되어 결국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다. 550년 동위의 효정제에서 제위를 물려받은 고양은 제를 세웠다. 이렇게 시작된 북제에서는 선비족 중심주의가 크게 대두되었고, 우문태는 동위에서 도망쳐나온 효문제를 옹립하여 서위를 세웠다. 그는 앞서 효문제가 폐지혔던 북방민족의 성을 다시 사용하게 하는 등 동위와 마찬가지로 선비색이 짙은 정권을 세웠다. 이것은 우문태가 죽은 후 우문호가 세운 북주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북주는 577년 북제를 병합했지만 4년뒤 외척인 양견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8. 수·당·오대
581년 제위에 오른 양견은 남북조시대의 오랜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400년만에 중국을 재통일하여 수를 세웠다. 천하를 통일한 후 문제, 즉 양견은 중앙과 지방의 통치조직을 중앙집권화하고 호족세력을 억압했으며 백성을 철저히 관리했다. 남북을 잇는 운하를 건설하고 균전제에 의해 민생안정을 꾀했다. 양제는 황태자를 실각시키고 아버지 문제를 시해한 뒤 제위애 올라 대외팽창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남녀 100만 명 이상을 착출하여 대운화를 만들고 대리궁 외에도 몇 개의 궁전을 지으며 많은 원성에도 불구하고 무모한 고구려 원정을 강행해 고구려군에 의해 거의 괴멸되었다. 2차원정의 실패로 인해 결국 수는 38년밖에 지속하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다.
618년 놀이를 위해 향차중이던 양제가 친위군의 반란으로 시해되자 이연든 곧 제위에 올라 당을 세웠다. 천하를 평정한 후 정관의 治라 일컬어지는 시대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율령을 완성하며 대외적으로 티벳, 돌궐, 서역 등을 정복하면서 최고의 위세를 과시하게 되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이 병사하자 황후인 측천무후가 섭정하다가 스스로 황제가 되어 주나라를 수립했다. 그는 포학한 성격의 인물로 평가받지만, 유능항 서족출신 인재를 과감히 등용하는 등 혁신적 정책을 시행하기도 한다. 이후 현종의 즉위와 함께 성당시대가 개막된다. 그러나 현종은 제위후반에 정치에 흥미를 잃고 양귀비의 오빠 양국충에게 정권을 넘기고 여색에 빠져 살았다. 이 무렵 지방세력이 커져 중앙권위를 위협했고 결국 안사의 난이 일어나 반란군이 낙양에 이어 장안까지 점령하기도 햇다. 현종 이래로 헌종이 환관에게 살해된 뒤 당말에 이르기까지 환관이 점차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고, 정국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결국 황소의 난이 일어났고 진압된 이후 투항했던 황소의 부하 주온이 당을 멸망시키기에 이른다.
당을 멸망시킨 주온이 후량을 세운 후 이른바 5대10국이라는 분열시기가 시작되었다. 후량이후 후당·후진·후한·후주로 이어지다가, 후주의 금군을 장악했던 조광윤이 제위를 이어받아 송을 세워 70년만에 천하를 통일했다.
9. 송·요·서하·금·원시대
송이 중국을 통일한 후 태조는 문치주의를 채택하여 문관관료정치기구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초기이래의 문치주의는 군대의 약체화와 조정 대신간의 당파싸움이라는 폐단을 낳았고 북쪽의 요가 차지하고 있는 연운16주를 회복하는 것이 건국 이래의 숙원이었지만 , 실지 회복은커녕 진종때 맺은 맹약에 의해 매년 요에게 은 10만냥, 비단 20만필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한 서북 변경에 있던 서하도 송에게 큰 부담이었는데 1044년 맺은 화약에 의해 은 7만2천냥, 비단 15만3천필을 보냈지만 서하는 자주 국경을 침범했다. 이러한 누적된 폐해를 해결하기 위해 6대 신종은 왕안석을 기용해 개격을 단행했는데 즉 신법이라는 혁신적인 정책들을 ㄱ단행했다. 그러나 신종이 죽은 후 정권을 잡은 수구파에 의해 모두 폐지되고 만다. 송은 만주지방에 여진족이 세운 금과 협공헤 요를 치고 연운지방을 차지하려 했지만, 결국 요군에게 패하여 연경공략에 실패하고, 오히려 금군에 의해 연경이 함락된다. 요도 1125년 멸망하고 금의 남하로 인해 1127년 수도 개봉이 점령당함으로서 송은 멸망한다. 송이 멸망한 후 휘종의 9번째 아들 강왕은 고종으로 즉위하고 항주를 수도로 남송을 세우고 북쪽의 금과 대치하게 된다.

키워드

중국,   역사,   박물관
  • 가격2,000
  • 페이지수43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94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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