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사(渤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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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발해사(渤海史)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해된다. 지방행정의 중심은 15부이지만 가장 말단은 촌락으로서 토착세력인 수령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경제적인 면을 볼 때, 발해는 난부와 서부의 경우 농업을 주로 행하였고, 동부지방은 일부 농업을하고 주로 수렵과 목축업을 행했으며, 북부지방의 경우에는 어업, 수렵, 목축업이 주를 이루었다.
고구려 통치구역의 경우에는 봉건적인 생산형태와 선진적 기술이 보인 반면에 말갈족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환경을 보였다.
발해는 15대 230여년 동안 왕조를 유지할 정도로 한때 강성했으나 926년 거란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당시 야율아보기는 거란족을 통일하고 916년 황제가 되어 중원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발해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발해가 멸망한 후 동란국(東丹國)이 세워졌으나 928에 동평으로 이동함에 따라 발해유민들은 926년 대씨의 후발해국과 1029년 대연림을 비롯한 200여년 간의 반요자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따라서 고구려 계통의 유민들은 대거 구려에 귀속되고, 대부분 말갈인들은 여진족으로 할거 상태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멸망은 발해가 우리민족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신라사가 한국사의 정통이 되는 것으로 굳어지는 계기를 이루었다.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민족융합의 중심체가 되어 고려에 계승된데 비하여 발해는 이민족인 말갈족을 국민의 기저로 하여 발해 멸망 후 그 정치 문화적 유산이 계승되지 못한 사실에서 연유한 거이었다. 특히 발해의 멸망은 그 지배계층이 고려에 수용된 민족통일의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만주지방이 한국사의 활동무대에서 떠나게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기도 하였다.
신당서가 더 사료적가치가 크다라는 점, 발해에 발혀진 사람들중의 대부분이 고구려의 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에 나타난 것, 정효공주묘등에서의 유적에서 고구려와 비슷한점이 많이 발견된 것 들로 미루어볼 때 발해는 우리가 주장하고 있는 "고구려 계승국가" 라는 점이 더 유력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와 반대되는 의견도 많이 제시되고 있다.
내가 생각할때 지배계층만이 고구려인이었고 피지배계층이 말갈족이라는 것만을 가지고 발해는 고구려계승국이라는 것을 주장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리라는 생각이 든다. 피지배계층의 일정수준은 고구려인이어야만 더 명확한 주장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발해가 가지고 있는 지리적인 위치 덕택에 우리나라를 포함한 주변국에서 발해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많이 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을 하려고 하고 있다. 이러하다 보니 발해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며, 우리나라의 경우도 발해에 대한 연구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한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리고 남북통일이 되어진다면 예전의 발해영토들에서 직접 유적들을 발굴할 수 있는 등의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현 시대에도 예전의 발해, 통일신라가 있었던 남북국시대와 같이 남한, 북한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 후세들은 지금 현재의 남북한의 분단상황을 어떤식으로 역사적 판단을 할지 참으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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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97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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