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방대한 양에 해당하는 그의 주석을 자세히 검토해 본 사람이라면 칼빈의 박학다식한 지식의 바다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짐작이 갈 것이다.그는 1532년「세네카의 관용론 주석」(Commentary on Lucious Anneas Seneca’s Two Books on Clemency)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칼빈은 자신을 인문주의자로 소개하면서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였다. 이어 3가지 종교적인 질문, 곧 이교와 기독교, 미신과 진정한 종교의 차이점이 무엇이며, 인간 영혼의 기원과 성격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 통치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칼빈의 이와 같은 종교적인 질문은, 베틀즈 교수(Ford Lewis Battles)가 지적한 것처럼, 이미 그가 바른 종교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칼빈은 주석을 통해 학자들의 호평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돈을 만질 수 있게 되자, 신학을 연구하여 학자가 될 계획을 세웠다
2) 칼빈의 회심과 프랑스에서의 종교개혁칼빈의 생애에 있어서 회심의 중대한 전환점이 정확하게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시편 주석」(Commentary on the Psalms)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것으로 보아 갑작스럽게일어난 것으로보여진다.‘하나님께서는 나를 갑자기 회심시키셔서 나의 마음을 복종시키시고 보다 교훈하기에 쉽도록 인도하셨다. 당시 나는 어렸을 때보다 심정이 보다 강퍅한 상태에 있었다. 이처럼 진정한 신적 경건의 맛과 지식을 약간 음미하게 되자, 나는 즉시 이 방면에 보다 큰 진보를 이루고자 하는 갈망에 불타게 되었다. 내가 이전에 하던 공부를 아주 저버린 것은 아니었으나 열심은 식어가고 있었다.’칼빈은「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출판한 후 오를레앙 지방에 1년간 머물다가 1533년 8월에는 노용을 방문하고, 10월에는 파리로 돌아왔다. 만성절(All Saints Day) 날 그의 친구인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이 마튀렝(Mathurins)교회에서 파리 대학교 총장 취임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이 연설문을 칼빈이 초안하였다. 칼빈은 이 연설문에서 검이 아니라 말씀에 기초한 교회의 평화, 모든 학문의 유용성,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세상과 악한 자들은 신자들의 마음에 복음으로 순수하고 진지하게 침투하려는 자들을 이단, 미혹하는 자들, 악한 말을 하는 자들 그리고 사기꾼이라고 불러왔습니다…그러나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모든것을 태연히 견디는 자들은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 분은‘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콥의 학장 취임 연설은 왕실의 진노를 초래하였다. 대노한 프란시스 Ⅰ세는 12월 10일 의회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우리의 사랑하는 도시 파리, 우리 왕국의 수도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심히 불쾌합니다. 우리 왕국의 최고 대학에는 저주받을 루터파 이단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모든 대책을 강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칼빈과 콥은 당국의 소환 명령을 받았다. 소환에 응하면 처형될 것을 짐작한 콥은 바젤로 피신하였고, 칼빈은 경찰들이 갑작스럽게 그의 집을 포위하자 침대보를 꼬아서 옆 빌딩으로 도망한 후 피신할 수 있었다.19세기 칼빈 연구가 아우구스트 랑(August9Lang)의 저서 칼빈의 회심(Die Bekehrung Kalvins, 1897)에 의하면, 니콜라스 콥은 루터가 이미 1522년 만성절 설교에서 사용했던 본문(마 5:3)과 제목을 다시 사용하였다고 했다. 파리의 소르본느(Sorbonne) 신학부 교수진과 로마 카톨릭 고위 성직자들은 이 원고가 이단자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박해를 가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로마 카톨릭의 엄격한 전통에 매여 있으면서 성직록의 혜택으로 많은 신세를 져온 칼빈은 이 사건을 계기로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부패상을 등지고 조국과 고향을 떠나 한평생 종교개혁 운동에 몸바치면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칼빈은 1534년 노용에가서성직을 반납하였으며, 두 차례나 잠시 동안 투옥 당하는 경험을 맛보았으며, 파리에도 들르고 오를레앙과 포이티에르도 방문하였는데, 포이티에르 근처의 한 석굴 속에서 최초로 개혁주의 신조에 따른 성찬식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때 판판한 돌을 성찬상 대신 사용하였다.프랑스 내에서는 날로 긴장이 고조되어 가는 상태였던 차에 마침 발생한 플래카드 사건(the Affair of the placards)으로 드디어 문제는 폭발하게 되었다. 1534년 10월 18일 과격파 프로테스탄트들은‘교황제 아래서 실시되는 미사의 잘못된 사용에 관한 조문’으로 시작되는 벽보들을 파리 및 기타 다른 도시들에 붙이게 되었다. 그중 하나는 암보아즈(Amboise)에 있는 왕궁 안 왕의 침실 문 앞에까지 붙어 있는 형편이었다. 프란시스 1세는 이 사태를 더욱 극화시켜서, 이러한 더러움으로부터 다시 파리시를 정화시킨다는 의미로 촛불을 켜들고 노트르담 사원까지 엄숙한 행렬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주교의 저택에서 벌어진 향연에 참석한 국왕은 자기 영토에서 이러한 해독을 제거시키겠노라고 서약하기도 하였다. 그 후 발생한 일반 대중들의 폭발을 더욱 조장하듯이 수백 명의 프로테스탄트들을 투옥하고, 이중 35명을 화형에 처하였으며, 칼빈의 친형제 중 하나를 처형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교황 바오로 3세의 마음을 보다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자기 영토 내의 모든 이단들을 완전 섬멸하겠노라는 칙령을 반포하기도 하였다.이러한 상황 아래서도 칼빈은 그의 사촌 로베르 올리베땅(Robert Olivetan)이 번역한 성경의 서문을 썼다. 올리베땅의 성경은 1년 뒤인 1535년 뇌샤텔(Neuchchatel)에서 인쇄되어 출판되었다. 한편, 재침례교도에 의하여 영혼 수면설이 널리 유포되기 시작하자, 이단 사상의 폐해를 심각하게 인식한 칼빈은 1534년「영혼 수면설에 관하여」(Psycho pannychia)라는 책을 써서 영혼이 천국에서 육체의 부활 때까지 잠자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2) 칼빈의 회심과 프랑스에서의 종교개혁칼빈의 생애에 있어서 회심의 중대한 전환점이 정확하게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시편 주석」(Commentary on the Psalms)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것으로 보아 갑작스럽게일어난 것으로보여진다.‘하나님께서는 나를 갑자기 회심시키셔서 나의 마음을 복종시키시고 보다 교훈하기에 쉽도록 인도하셨다. 당시 나는 어렸을 때보다 심정이 보다 강퍅한 상태에 있었다. 이처럼 진정한 신적 경건의 맛과 지식을 약간 음미하게 되자, 나는 즉시 이 방면에 보다 큰 진보를 이루고자 하는 갈망에 불타게 되었다. 내가 이전에 하던 공부를 아주 저버린 것은 아니었으나 열심은 식어가고 있었다.’칼빈은「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출판한 후 오를레앙 지방에 1년간 머물다가 1533년 8월에는 노용을 방문하고, 10월에는 파리로 돌아왔다. 만성절(All Saints Day) 날 그의 친구인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이 마튀렝(Mathurins)교회에서 파리 대학교 총장 취임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이 연설문을 칼빈이 초안하였다. 칼빈은 이 연설문에서 검이 아니라 말씀에 기초한 교회의 평화, 모든 학문의 유용성,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세상과 악한 자들은 신자들의 마음에 복음으로 순수하고 진지하게 침투하려는 자들을 이단, 미혹하는 자들, 악한 말을 하는 자들 그리고 사기꾼이라고 불러왔습니다…그러나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모든것을 태연히 견디는 자들은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 분은‘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콥의 학장 취임 연설은 왕실의 진노를 초래하였다. 대노한 프란시스 Ⅰ세는 12월 10일 의회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우리의 사랑하는 도시 파리, 우리 왕국의 수도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심히 불쾌합니다. 우리 왕국의 최고 대학에는 저주받을 루터파 이단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모든 대책을 강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칼빈과 콥은 당국의 소환 명령을 받았다. 소환에 응하면 처형될 것을 짐작한 콥은 바젤로 피신하였고, 칼빈은 경찰들이 갑작스럽게 그의 집을 포위하자 침대보를 꼬아서 옆 빌딩으로 도망한 후 피신할 수 있었다.19세기 칼빈 연구가 아우구스트 랑(August9Lang)의 저서 칼빈의 회심(Die Bekehrung Kalvins, 1897)에 의하면, 니콜라스 콥은 루터가 이미 1522년 만성절 설교에서 사용했던 본문(마 5:3)과 제목을 다시 사용하였다고 했다. 파리의 소르본느(Sorbonne) 신학부 교수진과 로마 카톨릭 고위 성직자들은 이 원고가 이단자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박해를 가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로마 카톨릭의 엄격한 전통에 매여 있으면서 성직록의 혜택으로 많은 신세를 져온 칼빈은 이 사건을 계기로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부패상을 등지고 조국과 고향을 떠나 한평생 종교개혁 운동에 몸바치면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칼빈은 1534년 노용에가서성직을 반납하였으며, 두 차례나 잠시 동안 투옥 당하는 경험을 맛보았으며, 파리에도 들르고 오를레앙과 포이티에르도 방문하였는데, 포이티에르 근처의 한 석굴 속에서 최초로 개혁주의 신조에 따른 성찬식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때 판판한 돌을 성찬상 대신 사용하였다.프랑스 내에서는 날로 긴장이 고조되어 가는 상태였던 차에 마침 발생한 플래카드 사건(the Affair of the placards)으로 드디어 문제는 폭발하게 되었다. 1534년 10월 18일 과격파 프로테스탄트들은‘교황제 아래서 실시되는 미사의 잘못된 사용에 관한 조문’으로 시작되는 벽보들을 파리 및 기타 다른 도시들에 붙이게 되었다. 그중 하나는 암보아즈(Amboise)에 있는 왕궁 안 왕의 침실 문 앞에까지 붙어 있는 형편이었다. 프란시스 1세는 이 사태를 더욱 극화시켜서, 이러한 더러움으로부터 다시 파리시를 정화시킨다는 의미로 촛불을 켜들고 노트르담 사원까지 엄숙한 행렬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주교의 저택에서 벌어진 향연에 참석한 국왕은 자기 영토에서 이러한 해독을 제거시키겠노라고 서약하기도 하였다. 그 후 발생한 일반 대중들의 폭발을 더욱 조장하듯이 수백 명의 프로테스탄트들을 투옥하고, 이중 35명을 화형에 처하였으며, 칼빈의 친형제 중 하나를 처형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교황 바오로 3세의 마음을 보다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자기 영토 내의 모든 이단들을 완전 섬멸하겠노라는 칙령을 반포하기도 하였다.이러한 상황 아래서도 칼빈은 그의 사촌 로베르 올리베땅(Robert Olivetan)이 번역한 성경의 서문을 썼다. 올리베땅의 성경은 1년 뒤인 1535년 뇌샤텔(Neuchchatel)에서 인쇄되어 출판되었다. 한편, 재침례교도에 의하여 영혼 수면설이 널리 유포되기 시작하자, 이단 사상의 폐해를 심각하게 인식한 칼빈은 1534년「영혼 수면설에 관하여」(Psycho pannychia)라는 책을 써서 영혼이 천국에서 육체의 부활 때까지 잠자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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