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빈(1509~1564)의 생애와 개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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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캘빈(1509~1564)의 생애와 개혁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캘빈(1509~1564)의 생애
1)캔빈의 언어별 이름
2. 캘빈의 개혁운동 시작
1)기독교 강요
2)망명
3) 첫 번째 제네바 체류 시절(1536년-1538년)
4) 슈트라스부르크 체류 시절(1538년-1542년)
5) 두 번째 제네바 체류 시절(1542년-1564년)
3 캘빈의 말년
1). 복음주의로의 전향
2). 교회개혁과 장로제도의 창시
3). 신학사상과 그 영향

본문내용

부터 그의 건강은 쇠약해져 갔다. 엄청난 노력과 그의 동생 앙뚜완느의 도움으로 <기독교 강요>의 새로운 판을 준비할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칼빈은 1558년-1559년의 겨울 동안 심하게 앓았다.
155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칼빈은 제네바 시민권을 얻었다. 1559년 6월 5일 #제네바 아카데미가 개원할 때 그는 어느 정도 회복되어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했지만 1564년 초에 그의 좋지 않은 건강 탓에 그 활동 중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1564년 2월 2일에 에스겔서를 인용하며 칼빈은 마지막 강의를 했고 2월 6일 마지막 설교를 했다. 4월 27일에 칼빈은 시 장관들과 소의회의 의원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칼빈이 자신들에게 오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칼빈의 집으로 찾아 갔다. 칼빈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여 담소를 나누었다. 칼빈은 그들의 우정에 감사를 표했으며 비록 자신이 부족한 점이 있기는 했어도 하나님께 봉사하며 이 도시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자신의 결점을 참아 준 그들의 인내에 감사한다고 말하고 그가 실패한 일들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칼빈은 그들에게 공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추구하라고 당부했다. 그런 후 개인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다음날 자신을 대신할 사람으로 선택된 베자를 추천하면서 칼빈은 목사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 후 칼빈은 다수의 친구들과 주요 인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5월 2일에 마지막 이별의 짧은 편지를 보낸 연로한 파렐도 칼빈을 방문했다. 5월 19일에 목사들이 그의 집에서 정기적인 주간 모임을 가졌을 때 칼빈도 마지막으로 그들과 함께 했다.
1564년 5월 27일에 그는 사망하였고 다음 날 매장되었다. 칼빈은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고 숭배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그의 무덤조차 알기 어렵다.
1). 복음주의로의 전향
변호사의 아들로 일찍부터 우수한 교육을 받았다. 파리대학에서 가톨릭 성직자를 목표로 스콜라학을 공부하였으나 뒤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으로 전환하여 부르주·오를레앙대학에서 공부하였다. 당시 인문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프랑스 국내의 교회개혁운동을 맞게 되었고, 아버지 사망 후에는 파리로 돌아가 고전 연구에 몰두하였다. 1533년 처녀작으로 L.A. 세네카의 《관용론주해(寬容論註解)》를 출판하였다. 칼뱅 자신이 <갑작스런 회심(回心)>이라고 하였던 복음주의(프로테스탄트)로의 전향이 언제 어떠한 경과로 일어났는지는 아직까지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1533년 가을에는 분명히 신앙상의 이유로 프랑스로부터 망명해야 하였고, 각지를 전전하는 사이에 취리히와 스트라스부르 등지의 개혁자들과 알게 되었다. 1535년부터 스위스 바젤에 머물고 있는 동안 복음주의 변증을 목적으로 집필한 《그리스도교요강(要綱)》은 프랑스왕에게 바칠 말을 첨부하여 이듬해 봄 공간(公刊)되었다. 이 책은 1559년 최종판까지 라틴어판·프랑스어판 등으로 증보·보완되어 프로테스탄트신학의 집대성으로서 오늘날까지 고전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2). 교회개혁과 장로제도의 창시
칼뱅 자신은 학문 연구에 뜻을 두었으나, 우연한 인연으로 G. 파렐의 요청에 의하여 제네바의 교회개혁에 관계하게 되었고, 그 뒤 죽을 때까지 제네바의 종교와 정치 및 시민생활 전반에 걸쳐 복음주의적 개혁에 헌신하였다. 한편 당시의 가톨릭교회의 악폐와 오류를 바로잡음과 동시에 시참사회(市參事會)라는 세속권력의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적 교회의 형성을 목표로 삼았으나, 그의 시도는 시민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1538년 봄에는 스트라스부르로 망명하였다. 이 고장의 개혁자 M. 부처와의 교유로 많은 것을 배운 칼뱅은 정세의 변화로 말미암아 3년 반 뒤에 다시 제네바로 불려가 생 피에르교회 목사 및 제네바학원의 신학교수로서 연간 몇 백 차례의 설교와 강의를 계속하였고 복음주의 교리와 윤리를 분명하게 밝히는 노력을 거듭하였다. 주요 저서 외에도 《구약성서》 《신약성서》 주해와 각종 논쟁문·설교·서한 등 방대한 저술은 《종교개혁저작집》 가운데 《칼뱅저작전집》 60여 권에 수록되어 있고, 아직도 속간 중이다. 칼뱅은 교회권의 자율성을 확보하여 규율 있는 교회훈련을 실시하기 위하여 독자적인 신정정치 형태로서 평신도 대표도 참가하는 장로제도를 창시하였다. 그것은 전단(專斷)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감독제도 아니고 무질서에 빠질 우려가 있는 회중제(會衆制)도 아닌 제3의 길, 즉 대표제의 의사결정 수단이 되었다. 그것은 정치의 국면에도 전용되었고, 근대민주주의 형성에도 도움이 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계획이 단번에 실현된 것은 아니다. 외부로부터의 가톨릭 국가들의 압력 그리고 내부로부터는 종래 시민계층의 비판과 불만이 많았다. 특히 1553년 칼뱅이 삼위일체론에 반대하고 범신론적인 언동을 하던 M.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하자, 이 조치에 대해서 격렬한 비난이 일어났으며 이것은 칼뱅지도력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520년에 걸친 노력은 차츰 열매를 맺었고, 1560년 무렵부터 제네바는 복음주의의 아성으로 유럽 각지로부터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3). 신학사상과 그 영향
신학사상으로는 복음주의의 <오직 신앙뿐> <오직 성서뿐>이라는 2대원리를 견지하고 인간의 구원이 선행(善行)이라는 공적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은총에 대한 믿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정론>을 주창하였다. 이와 같은 신앙을 보증하는 것은 성서이고 그 주해에 대해서는 본문에 입각하여 비판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중심적인 의미를 읽어내고자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교리는 이 세상의 직업을 하느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부응하는 적극적 삶의 방식이라는 새로운 직업윤리를 탄생시켰다. 이것과 자본주의의 정신, 나아가 근대 산업사회 형성과의 관계는 지금도 계속 거론되고 있다. 그의 가르침은 프랑스(위그노파)·네덜란드·스코틀랜드·독일 등으로부터 다시 신대륙 쪽으로 확대되었고, 오늘에도 장로·개혁파교회로서 프로테스탄트의 일익을 형성하고 있다.

키워드

캘빈,   칼뱅,   생애
  • 가격2,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0.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99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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