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정조
2. 생애
3. 용주사 정조대왕의 효심
4. 아버지를 받드는 정조대왕의 효심 호성전의 주련
5. 학문적 치적
6. 정치적 문제와 천주교
7. 왕권 강화책
8. 만년
2. 생애
3. 용주사 정조대왕의 효심
4. 아버지를 받드는 정조대왕의 효심 호성전의 주련
5. 학문적 치적
6. 정치적 문제와 천주교
7. 왕권 강화책
8. 만년
본문내용
여 아버지의 묘소인 수은묘를 처음에는 영우원으로 격상켰다가, 다시 양주에서 수원으로 천장하여 현륭원이라 이름짓고 정기적으로 참배하였다. 또한, 현륭원 주변인 수원에 과학적인 성채인 화성을 건립하고 그 안에는 행궁을 만들었다. 정조는 암행어사를 비밀리에 자주 파견하여 지방 사회의 문제점을 직접 파악하고 해결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써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하고 백성들에 대한 정부의 통치력이 강화되었다. 또한 왕실 직속 친위대인 장용위를 신설하였는데, 초반에는 5위와 비슷한 위로 출발하였으나 곧 장용영으로 격상시켰다. 장용영의 설치를 통해 친위대 설치는 물론 각 군영의 독립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군사권을 장악함으로써 임금의 최고 통수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장용영 설치는 군대를 장악한 노론을 견제하려는 정책이었다. 1782년 정조는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박팽년을 추모하여 노량진에 조선육신 이라는 신도비를 세워주었다. 1791년에는 신해통공을 실시해 상인들의 상업 활동의 자유를 크게 넓히고, 수령 등의 가혹한 형벌을 제한하였다. 한편 노론의 거점인 한성에서 벗어나고자 수원으로의 천도를 계획하여 정약용 등을 통해 수원성 축성을 단행하였으나 천도계획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8. 만년
1793년 정조는 이순신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1794년 직접 이순신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6] 1795년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유고 전집을 간행할 것을 명했다. 또한 정조 때인 1797년 영국 군함 프로비던스 호가 부산 용당포에 표착하여 동래 부사와 교섭하였다. 의술에 상당한 조예가 있던 정조는 재위 24년인 1800년 음력 6월 14일 직접 처방을 내리기도 했다. 소요산에 황금, 황련을 추가해 사용하고, 음력 6월 16일에는 사순청량음, 금련차, 웅담고를 투약했으며 다시 가감소요산 세 첩과 금련차를 쓴다. 음력 6월 20일에는 유분탁리산(乳粉托裏散)과 삼인전라고(三仁田螺膏)를 사용한다. 정조 스스로 가미소요산 처방을 내리기도 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1800년 음력 6월 49살의 나이에 병이 악화되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그가 추진해 온 개혁은 대부분 무산되고 말았다. 그 뒤 조선에는 외척 가문이 주도하는 세도 정치가 전개된다. 한편, 정조의 죽음에는 독살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사료는 아직 없다.
8. 만년
1793년 정조는 이순신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1794년 직접 이순신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6] 1795년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유고 전집을 간행할 것을 명했다. 또한 정조 때인 1797년 영국 군함 프로비던스 호가 부산 용당포에 표착하여 동래 부사와 교섭하였다. 의술에 상당한 조예가 있던 정조는 재위 24년인 1800년 음력 6월 14일 직접 처방을 내리기도 했다. 소요산에 황금, 황련을 추가해 사용하고, 음력 6월 16일에는 사순청량음, 금련차, 웅담고를 투약했으며 다시 가감소요산 세 첩과 금련차를 쓴다. 음력 6월 20일에는 유분탁리산(乳粉托裏散)과 삼인전라고(三仁田螺膏)를 사용한다. 정조 스스로 가미소요산 처방을 내리기도 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1800년 음력 6월 49살의 나이에 병이 악화되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그가 추진해 온 개혁은 대부분 무산되고 말았다. 그 뒤 조선에는 외척 가문이 주도하는 세도 정치가 전개된다. 한편, 정조의 죽음에는 독살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사료는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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