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헬레니즘 시대의 윤리학
- 에피쿠로스 학파
- 스토아 학파
- 홉스
- 스피노자
- 에피쿠로스 학파
- 스토아 학파
- 홉스
- 스피노자
본문내용
이 나이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즉 신은 자연(신=자연)이라는 범신론적 주장이다. 신(=자연)의 두 가지 속성은 정신과 물질이다. 신의 속성은 정신, 물질 외에도 많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우리가 신에 대해 알 수 있는 속성은 정신 물질 두 가지 뿐이라고 말했다.
인간도 신의 정신적 속성과 물질적 속성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단, 우리가 신을 볼 때 속성이라는 것은 손바닥의 앞면과 뒷면과 비슷하다. 손바닥 앞면은 정신 이고 손바닥 뒷면은 물질이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에 독립된 실체이므로 서로 영향을 준다는 심신 상호작용론을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허벅지를 꼬집은 원인으로 아픔을 느낀다. 스피노자는 정신과 물질은 같은 것에서 존재하므로 같이 간다는 심신 병행론을 주장했다. 예를 들어 허벅지를 꼬집은 순간 아프다는 생각이 같이 떠오른다. 또 삼각형이라는 생각과 내각의 합은 180°라는 생각이 같이 간다는 것이다. 정신은 정신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논리적 사고의 법칙)은 놀리적 필연성이다 정당한 삼단논법으로 대던제, 소전제가 참이면 결론은 반드시 참이다. 물질은 물질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기계적 인과적 사고의 법칙)은 자연적 필연성이다. 작동 방식은 다르나 논리적 법칙과 인과적 법칙은 같이 간다 즉, 필연적이다. 이것은 세상은 필연적으로 돌아간다는 스토아학파와 같다. 인간의 자유는 없다 즉, 무원인적 자유는 없다.
<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
스피노자는 신 즉 자연이라고 하였는데, 신은 기독교적 관점의 인격적 존재가 아니고, 의지도 아니고, 지성도 아닌 인과적 필연성의 원리(단순한 자연성의 필연적 원리)로서만 존재한다고 했다. 도덕적 가치의 근원은 무엇인가? 유신론 입장은 도덕적 가치의 근원은 신의 의지라는 것이다. 신은 인격적 존재가 아니므로 도덕적 가치의 근원이 될 수 없다. 반드시 도덕적 가치의 근원을 유신론적 관점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궁극목적)으로 가치 근원을 설명했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 같이 목적론적 자연이 아니다. 겨룩ㄱ 스피노자는 가치의 근원을 우리의 주관에서 찾았다. 즉, 개인의 주관에 따른 목적에 따라 도덕적 가치가 결졍된다 보앗다. 스피노자는 도덕적 가치에 객관적 가치란 없다. 가치가 잇다면 그것은 오직 주관적 가치만이 존재한다고 했다. 문제점은 상대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주관에 의존한 가치만 있다면 내 주관에 의한 가치와 타인의 주관에 의한 가치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상대주의를 옹호하지 않았다 단지 가치라는 것을 주관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 상대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스피노자는 도덕적 가치의 근원은 주관(=욕구, 감정, 정서)과 관련해서 생각했다. 각각 개인의 욕구, 감정, 정서들은 상이하다.(목적의 다양성)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가 갖고 잇는 욕구, 감정, 정서들도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고 보았다. 이를 자기 보존의 욕구(conatus)라고 했다. ‘conatus’는 생물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에 적용되는 형이상학적 원리이다.
스피노자는 자기보존의 요구, 감정, 정서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다양성의 부분)이 있다고 보았다.
< 능동적, 수동적 감정들 >
능동적 감정 행위는 능동적 행위(내적인 원인에 의해 지배)→자유로운 행위→타당한 관념에 따라 행위 // 수동적 감정(오만, 질투) 행위는 수동적 행위(외적인 원인에 의해 지배)→부자유로운 행위 습관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과 타인이 밀어서 넘어지는 사람
<스피노자의 자유>
스피노자의 자유는 내적 원인에 의해서 행동할 때 그것이 자유롭다. 타당한 관념에 의해 행한 행위는 능동적 행위이다. 타당하지 않은 관념에 의해 행해진 행위는 수동적 행위이다. 예를 들어 두려움은 타당하지 않은 관념 때문에 하는 행위이낟. 이는 우리를 수동적 감정으로 만들어서 부자유하게 만든다.
<지식의 정도>
지식의 정도는 1. 표상지(억측) 2. 이성지(과학지) 3. 직관지가 있다.
1. 표상지는 억측으로 엉터리로 생각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물속에 나무가 반 쯤 잠겨 있을 때 나무가 구부러졌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2. 이성지는 개별자(모든 물체)의 속성을 반영하는 지식으로 예를 들어 과학적인 지식이다.
3. 직관지는 전체로서의 앎으로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다. 영원의 상에서 인식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경우 직관지는 도달하기 어려운 이상적인 지식이라 보앗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불행은 부분을 독립된 존재로 착각할 때 온다도 햇다. 부분을 전체의 한 부분으로 인식 못하고 전체에서 떨어진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는 것을 불행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나뭇잎을 나무의 한 부분으로 생각지 않고 하나의 전체로 생각하면 햇빛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비관은 전체의 나무는 문제 없음 나는 왜 부자가 아닌가?
타당한 관념은 전체의 부분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행이 있을 수 없다. 세상을 영원 속에서 보면 사건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타당한 관념에 따른 자유를 말한다.
< 스피노자의 문제점 >
스피노자는 몇 가지의 문제점을 가진다.
첫째, 일종의 체념의 윤리처럼 보인다.(체념론적 이고 숙명론적이다.) 현실을 의식 속으로 뒤바꿔 버릴 수 있는 문제가 있다.
둘째, conatus의 자기 보존을 강조하는데 (능동적,수동적 감정이 모두 conatus에서 나오지만) conatus에 위반되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몸을 해치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사람이 있다. 학문 밤새면서 연구하는 자 또는 모험가 “감정들 중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는 것을 능동적 감정이라 하였으나 이에 위반되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건강을 잃으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의 욕구(지나친 욕구)도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는 능동적 감정인가 명확하게 구별하기 어렵다.”
셋째, 능동적 관념을 갖는 것은 타당한 관념에 의한 것인데 ‘인식’만으로 될 수 있냐?는 것이다. 욕구가 불행한 삶을 개선하는데 도움 줄 수 있다. 스피노자는 조화보다는 아는 것만 강조 한다. 아는 것만 가지고 우리의 삶이 행복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이다.
인간도 신의 정신적 속성과 물질적 속성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단, 우리가 신을 볼 때 속성이라는 것은 손바닥의 앞면과 뒷면과 비슷하다. 손바닥 앞면은 정신 이고 손바닥 뒷면은 물질이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에 독립된 실체이므로 서로 영향을 준다는 심신 상호작용론을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허벅지를 꼬집은 원인으로 아픔을 느낀다. 스피노자는 정신과 물질은 같은 것에서 존재하므로 같이 간다는 심신 병행론을 주장했다. 예를 들어 허벅지를 꼬집은 순간 아프다는 생각이 같이 떠오른다. 또 삼각형이라는 생각과 내각의 합은 180°라는 생각이 같이 간다는 것이다. 정신은 정신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논리적 사고의 법칙)은 놀리적 필연성이다 정당한 삼단논법으로 대던제, 소전제가 참이면 결론은 반드시 참이다. 물질은 물질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기계적 인과적 사고의 법칙)은 자연적 필연성이다. 작동 방식은 다르나 논리적 법칙과 인과적 법칙은 같이 간다 즉, 필연적이다. 이것은 세상은 필연적으로 돌아간다는 스토아학파와 같다. 인간의 자유는 없다 즉, 무원인적 자유는 없다.
<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
스피노자는 신 즉 자연이라고 하였는데, 신은 기독교적 관점의 인격적 존재가 아니고, 의지도 아니고, 지성도 아닌 인과적 필연성의 원리(단순한 자연성의 필연적 원리)로서만 존재한다고 했다. 도덕적 가치의 근원은 무엇인가? 유신론 입장은 도덕적 가치의 근원은 신의 의지라는 것이다. 신은 인격적 존재가 아니므로 도덕적 가치의 근원이 될 수 없다. 반드시 도덕적 가치의 근원을 유신론적 관점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궁극목적)으로 가치 근원을 설명했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 같이 목적론적 자연이 아니다. 겨룩ㄱ 스피노자는 가치의 근원을 우리의 주관에서 찾았다. 즉, 개인의 주관에 따른 목적에 따라 도덕적 가치가 결졍된다 보앗다. 스피노자는 도덕적 가치에 객관적 가치란 없다. 가치가 잇다면 그것은 오직 주관적 가치만이 존재한다고 했다. 문제점은 상대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주관에 의존한 가치만 있다면 내 주관에 의한 가치와 타인의 주관에 의한 가치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상대주의를 옹호하지 않았다 단지 가치라는 것을 주관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 상대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스피노자는 도덕적 가치의 근원은 주관(=욕구, 감정, 정서)과 관련해서 생각했다. 각각 개인의 욕구, 감정, 정서들은 상이하다.(목적의 다양성)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가 갖고 잇는 욕구, 감정, 정서들도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고 보았다. 이를 자기 보존의 욕구(conatus)라고 했다. ‘conatus’는 생물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에 적용되는 형이상학적 원리이다.
스피노자는 자기보존의 요구, 감정, 정서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다양성의 부분)이 있다고 보았다.
< 능동적, 수동적 감정들 >
능동적 감정 행위는 능동적 행위(내적인 원인에 의해 지배)→자유로운 행위→타당한 관념에 따라 행위 // 수동적 감정(오만, 질투) 행위는 수동적 행위(외적인 원인에 의해 지배)→부자유로운 행위 습관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과 타인이 밀어서 넘어지는 사람
<스피노자의 자유>
스피노자의 자유는 내적 원인에 의해서 행동할 때 그것이 자유롭다. 타당한 관념에 의해 행한 행위는 능동적 행위이다. 타당하지 않은 관념에 의해 행해진 행위는 수동적 행위이다. 예를 들어 두려움은 타당하지 않은 관념 때문에 하는 행위이낟. 이는 우리를 수동적 감정으로 만들어서 부자유하게 만든다.
<지식의 정도>
지식의 정도는 1. 표상지(억측) 2. 이성지(과학지) 3. 직관지가 있다.
1. 표상지는 억측으로 엉터리로 생각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물속에 나무가 반 쯤 잠겨 있을 때 나무가 구부러졌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2. 이성지는 개별자(모든 물체)의 속성을 반영하는 지식으로 예를 들어 과학적인 지식이다.
3. 직관지는 전체로서의 앎으로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다. 영원의 상에서 인식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경우 직관지는 도달하기 어려운 이상적인 지식이라 보앗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불행은 부분을 독립된 존재로 착각할 때 온다도 햇다. 부분을 전체의 한 부분으로 인식 못하고 전체에서 떨어진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는 것을 불행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나뭇잎을 나무의 한 부분으로 생각지 않고 하나의 전체로 생각하면 햇빛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비관은 전체의 나무는 문제 없음 나는 왜 부자가 아닌가?
타당한 관념은 전체의 부분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행이 있을 수 없다. 세상을 영원 속에서 보면 사건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타당한 관념에 따른 자유를 말한다.
< 스피노자의 문제점 >
스피노자는 몇 가지의 문제점을 가진다.
첫째, 일종의 체념의 윤리처럼 보인다.(체념론적 이고 숙명론적이다.) 현실을 의식 속으로 뒤바꿔 버릴 수 있는 문제가 있다.
둘째, conatus의 자기 보존을 강조하는데 (능동적,수동적 감정이 모두 conatus에서 나오지만) conatus에 위반되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몸을 해치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사람이 있다. 학문 밤새면서 연구하는 자 또는 모험가 “감정들 중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는 것을 능동적 감정이라 하였으나 이에 위반되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건강을 잃으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의 욕구(지나친 욕구)도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는 능동적 감정인가 명확하게 구별하기 어렵다.”
셋째, 능동적 관념을 갖는 것은 타당한 관념에 의한 것인데 ‘인식’만으로 될 수 있냐?는 것이다. 욕구가 불행한 삶을 개선하는데 도움 줄 수 있다. 스피노자는 조화보다는 아는 것만 강조 한다. 아는 것만 가지고 우리의 삶이 행복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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