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세계의 건축 예술의 대하여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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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슬람 세계의 건축 예술의 대하여 조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이슬람의 건축
2. 카바 사원
3. 바위의 돔
4. 다마스쿠스 모스크
5. 므샤타 궁전의 스투코 장식
6. 사마라 모스크의 미나렛
7. 미흐랍
8. 술탄 하산의 모스크
9. 다양한 미나렛
10. 사만조의 영묘
11. 쿠트브 미나렛
12. 구르 이 아미르
13. 결론 및 시사점

본문내용

도의 가장 위대한 도시를 정복했다. 오스만 제국이 그 위용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스만의 술탄들은 자신의 위세에 걸맞는 건축물을 원했다. 세 대륙의 정복자, 지상에 드리운 신의 그림자, 두 성도의 보호자의 직위에 걸맞는 도시를 가지길 원했으며 그런 건물을 가지기를 원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함으로써 도시는 얻었으나, 아직 건물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런 건물을 가지는데 도움이 될만한건 얻었지만.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완공 후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다!' 라고 외쳤던만큼, 이 건물은 비잔티움의 최대 자랑거리였다. 오스만 술탄들도 이점을 인정했고, 이 건물에 매료되었다. 그 후 오스만의 주요 모스크는 죄다 하기아 소피아의 영향을 받았고, 죄다 이와 비슷한 모양이었으니까. 일단 메흐메드 2세에게는 건물보다는 도시를 활성화시키는게 필요했다. 1463년 그는 이스탄불 한 구역에 거대한 복합단지 건설을 명령했다. 7년간 건설한 이 복합단지는 12채의 건물로 되었고 280개의 상점과 110개의 마구시장, 마구간, 등자와 편자를 만드는 작업장, 숙박소, 초등학교, 도서관, 병원등이 있었다. 1489~1490년 지출은 150만 악체에 달했고 이 수입은 도시내의 12개의 목욕탕과 지즈야와 트라키아 주변의 50개 마을에서 들어온 소득에서 충당되었다. 직원은 총 383명을 두었는데 모스크에 102명, 마드라사에 168명, 숙박소에 45명, 병원에 30명, 재정담당이 21명, 인부17명이었다.. 가난한 학자와 상이군인에게 재정지원을 해주었고, 1200여명에게 매일 두끼 3300개의 빵을 배급해 주는 곳이었다. 엄청난 규모였다! 메흐메드의 이런 투자로 이스탄불은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이 복합단지는 이스탄불의 한 구역을 당당히 차지하게 되었다. 다만 그 후 오스만이 약화된 후 일어난 폭동, 지진으로 인해 지금은 거의 파괴되었지만. 그 뒤를 이은 화려한 황제 술레이만은 한술 더 떴다. 자신의 선임자의 궁전은 남겨두지 않는다!의 압바스 칼리프는 아니었지만 메흐메드보다 더 큰 복합단지를 건설했다. 이번에는 유능한 건설가도 있었겠다, 제국의 수입은 더 늘었겠다, 한번 해보자는 심정이었을 거다.
13. 결론 및 시사점
1631년, 무굴의 황제 샤 자한의 아내 뭄타즈 마할이 세상을 떠나자 황제는 영묘 건설을 지시했다. 공사는 무려 26년이나 계속되었고, 2000명의 일꾼과 1000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었다. 공사자금에 대해서는 2200만 루피와 500만 루피라는 두 가지 정보를 얻었는데 어느쪽이 맞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평가를 받은 무굴제국의 대 프로젝트인만큼 재료와 재료의 수입처도 화려한데, 흰 대리석은 라자스탄에서, 벽옥은 펀잡에서, 옥과 크리스탈은 중국에서, 터키석은 티베트에서, 청금석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홍옥수는 아랍에서 들여왔다. 건설 총 책임자인 우스타드 이사가 맡았으며 델리, 카나우지, 라호르, 물탄, 바그다드, 시라즈, 부하라, 오스만 지역의 기술자들이 찾아와서 돔과 조각, 서예등을 담당했다. 유럽의 기술자도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돔의 직경은 35m. 높이는 7m에 달하고 양 옆의 미나렛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끝에 발코니가 있으며 높이는 40m에 달한다. 영묘의 팔각형 모양은 페르시아의 영묘 모양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샤 자한의 슬픔은 이런 화려한 공사로 달래졌으려나. 그러나 정작 그는 호전적인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유폐, 타지마할이 보이는 아그라 강가의 요새에서 사망하고 만다. 아우랑제브는 화려한 건축에는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고, 결국 무굴 제국의 화려한 건축물들은 그렇게 사라지게 된다. 1842년, 술탄 압둘메지드 1세는 새로운 궁전을 건설할 것을 명령한다. 뭐, 그건 딱히 문제될 게 없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이야 나락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스만제국은 술탄의 제국이었고, 술탄의 말이 곧 법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 지으라는 궁전이었다. 술탄이 원하는것은 토프카피도, 첨탑도, 이완도, 돔도 아니었다. 유럽식 궁전이었다. 1853년 보스포루스 해협 인근의 돌마바흐체는 완전한 서구식 궁전이었다. 한때 '기독교도의 적'으로 불리우기도 했으며 '지상에 드리운 신의 그림자' '두 성도의 보호자'가 다스리는 제국의 수도 한복판에 서구식 궁전이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은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뭐, 칼리프제와 술탄제를 폐기해버린 지금의 터키 정부로서야 관광 수입이 늘어서 좋은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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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0.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10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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