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21:20-23)
이야기 전달자는 사랑 받는 제자의 미래의 역할로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 베드로의 질문을 사용했다. 예수의 대답은 지금까지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으며, 이 본문은 처음 독자들 역시 예수의 대답 때문에 당혹스러워 했음을 보여준다. 예수가 대답한 말의 의미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데, 예수의 대답은 분명히 오해 때문에 두 번씩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 형제들”(NRSV에서는 “공동체”로 되어 있음)은 이 사랑 받는 제자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가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또다시 죽음의 인식에 대한 오해, 그리고 예수의 뜻을 앞질러 간파하려는 데서 비롯된 오해가 나타난다. 이야기 전달자는 이 잘못된 인식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가 정말로 무슨 의도로 “내가 ...원한다면”(if it is my will)이라는 말을 하였는지를 깊이 생각하도록 만든다. 만일 독자들이 그 구절을 이해한다면 그들은 이 대표되는 제자와 사랑 받는 제자의 운명을 이해할 것이다.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자.
“내가 ...원한다면”(문자적으로는, “만일 내 뜻이라면”)이라고 말한 분은 “나는...생명이다.”라고 선언했던 분이다. 여기서 형제들의 오해는 11장의 두 자매들의 오해와 똑같다: 즉, “만일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궁극적인 결정은 “내가 ...원한다면”이라고 말하는 생명이신 예수에게 달려 있었다. 여기서 사랑 받는 제자가 “머물게 한다”는 것은 단지 육체적인 생존만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5:9-10)
거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21장의 제자가 예수가 사랑했던 제자임을 잊어서는 안 되며, 그의 거함, 혹은 머무는 것은 주인의 뜻과 그의 사랑과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요한복음의 다른 곳에서는 이런 거함이 하느님의 말씀(로고스)을 지키는 것, 메시야의 집에 사는 것,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인 예수의 살을 먹는 것을 뜻한다. 이 생명의 반대는 하느님의 분노 안에 머무는 것이며, 어두운 곳에 머무는 것이며, 하느님의 심판 아래 죄로 인한 죽음 안에 머무는 것이었다. 만일 21:22에서 그것이 단지 예수가 사랑 받는 제자의 육체적 생존만을 의미했다면 참으로 이상한 것일 것이다. 이 거함은 또한 “내가 올 때까지”라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도록 도와준다.
“내가 올 때까지”라는 구절을 어떤 묵시론적인 우주적 사건에다 적용시키는 것은 무리이다. 확실히 이 문맥의 기본적인 힘은 승천한 주님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 즉 그의 이름으로 세상을 사랑하도록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람들 사이의 상호 결합에 있다. 오는 “나”는 “생명”이신 주인이며, 그 분이 만나러 오시는 사람들은 그를 사랑했고 그를 영접한 사람들로서 “그의 사람들”이다. 이 오는 것의 본질에 대한 가장 좋은 실마리는 아마도 14:3의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는 말씀일 것이다. 그의 가심과 그의 오심, 이 둘은 모두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의 오심의 목적은 재결합으로서, 사랑 받는 제자들이 “내가 있는 곳에” 있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있는 곳”의 공간과 시간은 하느님 아버지의 임재에 의해서, 하느님에 대한 비전과 지식에 의해서, 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에 의해서 정의되어진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 분의 오심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그리고 진리의 영을 준 사람들에게만(14:22) 오신다는 계시임을 깨달았다. 그가 아버지께로 가심은 그들의 기쁨의 근거가 되었고, 그것은 또한 그의 적대자, 즉 “이 세상의 통치자”가 오는 것을 나타냈다. “가는 것”에 의해서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했으며 그 적대자에 대하여 승리하였다(14:30-31). 따라서 그의 “오심”은 제자들의 편에서 이와 유사한 사랑, 복종, 투쟁, 승리 등을 나타낸다(14:21). 그의 오심에 대한 이런 이해는 그의 오심을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복종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올 때까지”라는 말은 “너희들이 너희의 사명을 완성할 때까지”라는 말과 사실상 똑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사명이란 단지 그의 사명을 확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21:23에서 예수의 예언을 그 공동체가 잘못 이해한 것을 읽을 때, 우리는 그런 오해의 긴 연결 고리를 기억해야만 한다. 즉, 니고데모가 “위로부터 태어나는 존재”에 대해 오해한 것,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야의 강림의 시간을 인식하지 못한 것, 마르다가 부활을 단지 미래의 사건으로만 오해한 것, 그리고 베드로가 계속해서 자신의 신실함을 잘못 생각한 것 등이다. “내가 올 때까지”라는 말은 세상의 달력에 있는 어떤 날짜나 어떤 제자의 죽음의 날짜까지를 뜻한 것이 아니라, 제자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성취할 때까지를 뜻한다. “만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무르게 한다면”이란 말은 이 사랑하는 제자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11:26)라는 뜻이다. 요한복음서 기자의 의도는 이 이야기의 독자들이 마르다에게 하신 예수의 두 가지 약속이 성취된 것을 자신들도 믿을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이 전체 이야기가 끝난다는 점이다. 어떤 제자들은 베드로처럼 순교자가 될 것이며, 어떤 제자들은 사랑 받는 제자처럼 순교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모든 신실한 제자들에게 “부활과 생명”을 줌으로써 예수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성시킬 것이다.
이야기 전달자는 사랑 받는 제자의 미래의 역할로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 베드로의 질문을 사용했다. 예수의 대답은 지금까지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으며, 이 본문은 처음 독자들 역시 예수의 대답 때문에 당혹스러워 했음을 보여준다. 예수가 대답한 말의 의미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데, 예수의 대답은 분명히 오해 때문에 두 번씩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 형제들”(NRSV에서는 “공동체”로 되어 있음)은 이 사랑 받는 제자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가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또다시 죽음의 인식에 대한 오해, 그리고 예수의 뜻을 앞질러 간파하려는 데서 비롯된 오해가 나타난다. 이야기 전달자는 이 잘못된 인식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가 정말로 무슨 의도로 “내가 ...원한다면”(if it is my will)이라는 말을 하였는지를 깊이 생각하도록 만든다. 만일 독자들이 그 구절을 이해한다면 그들은 이 대표되는 제자와 사랑 받는 제자의 운명을 이해할 것이다.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자.
“내가 ...원한다면”(문자적으로는, “만일 내 뜻이라면”)이라고 말한 분은 “나는...생명이다.”라고 선언했던 분이다. 여기서 형제들의 오해는 11장의 두 자매들의 오해와 똑같다: 즉, “만일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궁극적인 결정은 “내가 ...원한다면”이라고 말하는 생명이신 예수에게 달려 있었다. 여기서 사랑 받는 제자가 “머물게 한다”는 것은 단지 육체적인 생존만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5:9-10)
거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21장의 제자가 예수가 사랑했던 제자임을 잊어서는 안 되며, 그의 거함, 혹은 머무는 것은 주인의 뜻과 그의 사랑과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요한복음의 다른 곳에서는 이런 거함이 하느님의 말씀(로고스)을 지키는 것, 메시야의 집에 사는 것,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인 예수의 살을 먹는 것을 뜻한다. 이 생명의 반대는 하느님의 분노 안에 머무는 것이며, 어두운 곳에 머무는 것이며, 하느님의 심판 아래 죄로 인한 죽음 안에 머무는 것이었다. 만일 21:22에서 그것이 단지 예수가 사랑 받는 제자의 육체적 생존만을 의미했다면 참으로 이상한 것일 것이다. 이 거함은 또한 “내가 올 때까지”라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도록 도와준다.
“내가 올 때까지”라는 구절을 어떤 묵시론적인 우주적 사건에다 적용시키는 것은 무리이다. 확실히 이 문맥의 기본적인 힘은 승천한 주님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 즉 그의 이름으로 세상을 사랑하도록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람들 사이의 상호 결합에 있다. 오는 “나”는 “생명”이신 주인이며, 그 분이 만나러 오시는 사람들은 그를 사랑했고 그를 영접한 사람들로서 “그의 사람들”이다. 이 오는 것의 본질에 대한 가장 좋은 실마리는 아마도 14:3의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는 말씀일 것이다. 그의 가심과 그의 오심, 이 둘은 모두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의 오심의 목적은 재결합으로서, 사랑 받는 제자들이 “내가 있는 곳에” 있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있는 곳”의 공간과 시간은 하느님 아버지의 임재에 의해서, 하느님에 대한 비전과 지식에 의해서, 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에 의해서 정의되어진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 분의 오심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그리고 진리의 영을 준 사람들에게만(14:22) 오신다는 계시임을 깨달았다. 그가 아버지께로 가심은 그들의 기쁨의 근거가 되었고, 그것은 또한 그의 적대자, 즉 “이 세상의 통치자”가 오는 것을 나타냈다. “가는 것”에 의해서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했으며 그 적대자에 대하여 승리하였다(14:30-31). 따라서 그의 “오심”은 제자들의 편에서 이와 유사한 사랑, 복종, 투쟁, 승리 등을 나타낸다(14:21). 그의 오심에 대한 이런 이해는 그의 오심을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복종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올 때까지”라는 말은 “너희들이 너희의 사명을 완성할 때까지”라는 말과 사실상 똑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사명이란 단지 그의 사명을 확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21:23에서 예수의 예언을 그 공동체가 잘못 이해한 것을 읽을 때, 우리는 그런 오해의 긴 연결 고리를 기억해야만 한다. 즉, 니고데모가 “위로부터 태어나는 존재”에 대해 오해한 것,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야의 강림의 시간을 인식하지 못한 것, 마르다가 부활을 단지 미래의 사건으로만 오해한 것, 그리고 베드로가 계속해서 자신의 신실함을 잘못 생각한 것 등이다. “내가 올 때까지”라는 말은 세상의 달력에 있는 어떤 날짜나 어떤 제자의 죽음의 날짜까지를 뜻한 것이 아니라, 제자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성취할 때까지를 뜻한다. “만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무르게 한다면”이란 말은 이 사랑하는 제자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11:26)라는 뜻이다. 요한복음서 기자의 의도는 이 이야기의 독자들이 마르다에게 하신 예수의 두 가지 약속이 성취된 것을 자신들도 믿을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이 전체 이야기가 끝난다는 점이다. 어떤 제자들은 베드로처럼 순교자가 될 것이며, 어떤 제자들은 사랑 받는 제자처럼 순교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모든 신실한 제자들에게 “부활과 생명”을 줌으로써 예수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성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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