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용인의 현황
2. 용인의 변천사
3. 용인의 지리
4. 용인 지방에 전해오는 이야기
5. 용인의 산업
6. 용인의 교통
7. 용인의 문화·관광
8. 용인의 스포츠
9. 용인의 교육 기관
10. 용인의 문화재
2. 용인의 변천사
3. 용인의 지리
4. 용인 지방에 전해오는 이야기
5. 용인의 산업
6. 용인의 교통
7. 용인의 문화·관광
8. 용인의 스포츠
9. 용인의 교육 기관
10. 용인의 문화재
본문내용
리 산99-2
시 대 고려시대
동도사내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폐허가 된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63년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탑은 1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네 장의 판돌을 세워 면을 이루게 하고, 그 위로 판돌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네 면의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본 떠 새겨 두었으며, 윗면에는 별도의 판돌을 하나 더 두어 탑신의 1층 몸돌을 괴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다른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은 면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느린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새겼고, 처마는 수평으로 흐르다 네 귀퉁이에 이르러 날카롭게 위로 들려 경쾌함을 실었다. 3층 지붕돌 위에는 다른 유물에서 가져온 듯한 돌 몇장이 놓여 머리장식을 대신하고 있다. 전체에 흐르는 양식이나 조각솜씨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9) 정몽주선생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산3
시 대 고려시대
고려 후기의 충신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묘소이다. 공민왕 9년(1360)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예문관검열, 예부정랑, 대사성 등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5부 학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했으며, 일본에 가서 외교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커지면서 정도전 등이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끝까지 고려 왕실을 지키려다가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선생이 순절한 후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후에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으로 이장할 때,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자 앞의 명정(銘旌: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에 떨어져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묘비에는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의 시호를 쓰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묘역 입구에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정몽주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10) 처인성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44호
지 정 일 1977.10.13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 산43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에 있는 산성으로, 흙으로 성벽을 쌓아 올렸다. 이곳은 고려 때 처인부곡으로 불렸던 곳으로,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 때 고려의 승장 김윤후 장군이 살리타이 장군을 사살한 격전지이기도 하다. 야산의 끝자락인 구릉 위에 쌓은 평지성으로 오랜 세월동안 풍우에 훼손되어 흔적만이 남아 있는데, 잔존하는 성의 길이는 약 250m 정도이다. 주변보다 높은 지형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평면은 사다리꼴에 가까우며, 성을 쌓은 방법을 보면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다졌다. 지형의 높이를 고려하였기 때문에 성벽의 높이는 4.8∼6.3m로 차이가 난다. 이 성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말안장같은 야산이 있는데, 여기서 살리타이가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사장터’라고 부른다.
11) 용인 전음애 이자고택
종 목 경기도 민속자료 제10호
지 정 일 1997.12.26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297-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종 때 덕행 높은 이자(1480∼1533) 선생이 살던 곳이라고 전하는 옛집이다. 현재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아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되어 ㄷ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는데 별도로 사당을 짓는 일반 양반집과 달리 이 집에는 사당을 따로 두지 않았다. 다만 본채 북서쪽에 청방을 두고 단청을 하여 이곳을 제사 공간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내외가 사용하는 공간을 구분하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경기지역의 중류주택이다.
12) 양지향교
종 목 문화재자료 제23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양지리 379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양지향교는 조선 중종 18년(1523)에 처음 지었으며,최근까지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그 뒤쪽 내삼문 안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부리 모양으로 짜맞춘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공포의 형태나 가구 수법을 보아 17세기 건물로 보이는데 대성전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명륜당과 대성전만을 갖춘 조선 후기 작은 규모의 향교 형식을 보여주는 건축이다.
13) 용인 공세리 오층석탑
종 목 문화재자료 제42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기홍구 공세동 264
시 대 고려시대
이름을 알 수 없는 옛 절터에 불상과 함께 보존되어 있는 탑으로, 1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연꽃을 장식한 바닥돌 위로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한 4장의 판돌을 사방에 세워 만들었는데, 현재 2장이 없어졌다. 탑신부의 몸돌은 1층에 비해 2층 몸돌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그 위층은 거의 줄지 않았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두툼한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가 경쾌하게 위로 들려있어 날렵한 멋을 풍긴다. 기단의 맨윗돌이 탑의 전체 비례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규모로 되어 있지만, 지붕돌이 위층으로 갈수록 적절하게 줄어들어 안정감을 준다.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시 대 고려시대
동도사내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폐허가 된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63년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탑은 1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네 장의 판돌을 세워 면을 이루게 하고, 그 위로 판돌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네 면의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본 떠 새겨 두었으며, 윗면에는 별도의 판돌을 하나 더 두어 탑신의 1층 몸돌을 괴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다른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은 면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느린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새겼고, 처마는 수평으로 흐르다 네 귀퉁이에 이르러 날카롭게 위로 들려 경쾌함을 실었다. 3층 지붕돌 위에는 다른 유물에서 가져온 듯한 돌 몇장이 놓여 머리장식을 대신하고 있다. 전체에 흐르는 양식이나 조각솜씨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9) 정몽주선생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산3
시 대 고려시대
고려 후기의 충신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묘소이다. 공민왕 9년(1360)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예문관검열, 예부정랑, 대사성 등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5부 학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했으며, 일본에 가서 외교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커지면서 정도전 등이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끝까지 고려 왕실을 지키려다가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선생이 순절한 후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후에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으로 이장할 때,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자 앞의 명정(銘旌: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에 떨어져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묘비에는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의 시호를 쓰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묘역 입구에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정몽주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10) 처인성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44호
지 정 일 1977.10.13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 산43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에 있는 산성으로, 흙으로 성벽을 쌓아 올렸다. 이곳은 고려 때 처인부곡으로 불렸던 곳으로,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 때 고려의 승장 김윤후 장군이 살리타이 장군을 사살한 격전지이기도 하다. 야산의 끝자락인 구릉 위에 쌓은 평지성으로 오랜 세월동안 풍우에 훼손되어 흔적만이 남아 있는데, 잔존하는 성의 길이는 약 250m 정도이다. 주변보다 높은 지형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평면은 사다리꼴에 가까우며, 성을 쌓은 방법을 보면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다졌다. 지형의 높이를 고려하였기 때문에 성벽의 높이는 4.8∼6.3m로 차이가 난다. 이 성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말안장같은 야산이 있는데, 여기서 살리타이가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사장터’라고 부른다.
11) 용인 전음애 이자고택
종 목 경기도 민속자료 제10호
지 정 일 1997.12.26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297-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종 때 덕행 높은 이자(1480∼1533) 선생이 살던 곳이라고 전하는 옛집이다. 현재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아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되어 ㄷ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는데 별도로 사당을 짓는 일반 양반집과 달리 이 집에는 사당을 따로 두지 않았다. 다만 본채 북서쪽에 청방을 두고 단청을 하여 이곳을 제사 공간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내외가 사용하는 공간을 구분하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경기지역의 중류주택이다.
12) 양지향교
종 목 문화재자료 제23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양지리 379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양지향교는 조선 중종 18년(1523)에 처음 지었으며,최근까지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그 뒤쪽 내삼문 안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부리 모양으로 짜맞춘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공포의 형태나 가구 수법을 보아 17세기 건물로 보이는데 대성전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명륜당과 대성전만을 갖춘 조선 후기 작은 규모의 향교 형식을 보여주는 건축이다.
13) 용인 공세리 오층석탑
종 목 문화재자료 제42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기홍구 공세동 264
시 대 고려시대
이름을 알 수 없는 옛 절터에 불상과 함께 보존되어 있는 탑으로, 1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연꽃을 장식한 바닥돌 위로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한 4장의 판돌을 사방에 세워 만들었는데, 현재 2장이 없어졌다. 탑신부의 몸돌은 1층에 비해 2층 몸돌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그 위층은 거의 줄지 않았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두툼한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가 경쾌하게 위로 들려있어 날렵한 멋을 풍긴다. 기단의 맨윗돌이 탑의 전체 비례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규모로 되어 있지만, 지붕돌이 위층으로 갈수록 적절하게 줄어들어 안정감을 준다.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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