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敎材 및 單元名---------------------------------------p.2
1.敎材------------------------------------------------p.2
2.大單元名--------------------------------------------p.2
3.小單元----------------------------------------------p.2
4.本時單元--------------------------------------------P.2
Ⅱ. 中學校 漢文科 敎育目標------------------------------p.2
Ⅲ. 單元 槪觀-------------------------------------------p.2
1.大單元名--------------------------------------------p.2
2.大單元 學習目標-------------------------------------p.2
3.大單元 槪觀-----------------------------------------p.2
4.大單元 指導內容-------------------------------------p.3
Ⅳ. 本時學習의 槪觀------------------------------------p.3
1.小單元 學習目標------------------------------------p.3
2.本時學習 準備物------------------------------------p.3
3.本時學習 指導上의 留意點---------------------------p.3
Ⅴ. 本時學習 指導案------------------------------------p.4
Ⅵ. 形成評價-------------------------------------------p.10
1.敎材------------------------------------------------p.2
2.大單元名--------------------------------------------p.2
3.小單元----------------------------------------------p.2
4.本時單元--------------------------------------------P.2
Ⅱ. 中學校 漢文科 敎育目標------------------------------p.2
Ⅲ. 單元 槪觀-------------------------------------------p.2
1.大單元名--------------------------------------------p.2
2.大單元 學習目標-------------------------------------p.2
3.大單元 槪觀-----------------------------------------p.2
4.大單元 指導內容-------------------------------------p.3
Ⅳ. 本時學習의 槪觀------------------------------------p.3
1.小單元 學習目標------------------------------------p.3
2.本時學習 準備物------------------------------------p.3
3.本時學習 指導上의 留意點---------------------------p.3
Ⅴ. 本時學習 指導案------------------------------------p.4
Ⅵ. 形成評價-------------------------------------------p.10
본문내용
文集)이다. 『삼봉집』은 조선의 건국이념 및 한국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과제
-정도전에 관한 보충자료 읽어오기!
-본문 5번 씩 써오기!
-신습한자(文, 樂) 써보기!
▶보충자료 읽기
역성혁명론을 실천한 풍운아 정도전
조선의 개국은 역성혁명론의 결정체였으며, 이러한 논리를 고려왕조에 대입한 사람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 물리력으로 왕조를 교체할 수 있다는 맹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정도전은 이미 국운이 기울어가던 고려왕조를 폐하고 성리학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한 새로운 왕조를 꿈꾸었다.
정도전은 고려 말에 개혁을 꿈꾸던 일군의 성리학자들이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 정공미는 고을의 아전격인 호장으로 있었으며, 대대로 미미한 벼슬을 유지해오다가 아버지 정운경에 이르러서 비로소 직제학이라는 중앙관리로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서얼 출신의 노비였다. 이런 출신 배경은 정도전의 출세에 엄청난 걸림돌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동문수학했던 벗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주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 외톨박이 생활이 정도전으로 하여금 역성혁명을 꿈꿀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작용했던 것이다.
정도전은 이성계보다 2년 늦은 1337년에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운경이 이색의 아버지 이곡과 친구였던 덕으로 이색의 문하에서 글을 배울 수 있었으며, 거기에서 정몽주, 이숭인 등과 교분을 가졌다. 24세가 되던 1360년(공민왕 9년)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는 진사시에 붙어 충주사록, 전교주부, 통례문지후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성균관의 박사로 있으면서 동갑내기인 정몽주 등과 함께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유학을 강론했으며, 1371년에는 태상박사에 임명되어 5년간 전선을 관장했다.
1375년(우왕 1년) 권신, 이인임, 경복흥 등의 친원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에 유배되었으며, 2년 뒤에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로는 낙향하여 4년간 칩거하다가 한양으로 가서 삼각산 밑에 초가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주변 유학도들의 방해로 서재를 철거당하고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이렇게 유랑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1383년 이성계를 찾아간다. 이때 이성계는 나하추 부대를 격퇴시킨 후 각종 전쟁에서 승전을 거듭하여 고려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었으며, 고려 변방 동북면의 도지휘사를 맡고 있었다.
이성계와 인연을 맺은 정도전은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에 오른다. 이후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에 성공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 등과 함게 전제개혁안을 건의하고,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하여 이성계가 조정을 장악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듬해 정몽주 등과 함께 우왕의 아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좌명공신에 봉해지고,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 총제사가 되어 병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다음 해 봄 이성계가 사냥 중에 낙마하여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정몽주, 김진양 등의 탄핵을 받아 또다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정몽주 등이 그를 탄핵한 주된 이유는 “가풍이 부정하고 가계가 불명확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을 탄핵한 실제 목적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몽주 일파의 정치적 공략에 위기감을 느낀 이방원은 급기야 정몽주를 살해하는 등의 극단적인 조치를 단행한다. 이방원에 의해 정몽주가 격살당하자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그해 7월에 조준, 남은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마침내 조선을 개국하였다.
조선의 개국은 정도전의 역성혁명론의 실천임과 동시에 그가 염원하던 유교적 왕도정치의 실습장이었다. 정도전은 꿈에도 그리던 새 왕조 주창에 성공하자 성리학적 이념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매진했다. 우선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새로운 법제도의 틀을 닦았으며, 도읍을 옮겨 새 왕조의 면모를 높였고, 『경제문감』을 저술하여 재상,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확립했다. 또한 명의 공물 요구가 거세지자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군량 미확보, 진법 훈련, 사병 혁파 등을 적극 추진해 병권집중 운동을 펼쳐나간다.
이러한 하부조직에 대한 개혁 작업뿐 아니라 『경제문감별집』을 저술해 왕이 나아갈 길을 밝혔으며,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숭유억불 정책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의 이 같은 노력은 사병 혁파에 위기를 느낀 이방원의 무력 동원으로 중도에서 좌절되고 만다. 정도전의 세력이 날로 강해지자 이방원은 자신의 형제들과 힘을 합쳐 그를 제거해버렸던 것이다. 정도전은 어린 세자 방석을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꿈꾸었지만, 왕권과 자신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이방원은 사병을 이끌고 내습하여 그를 살해하고 더불어 세자 방석도 죽여버렸다. 이때가 1398년으로 정도전의 나이 62세였다.
정도전은 자신을 한나라의 장량에 비유하여 조선의 개국에 자신의 공이 가장 컸음을 공공연하게 자랑하곤 했다. 그리고 한 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해 한나라를 세웠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했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지나친 자부심이 결국 그의 죽음을 자초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조선에 끼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역성혁명이론에 입각해 이성계로 하여금 조선을 개국하게 했고, 한 나라의 근본이 되는 법제를 확립하고, 민심을 수습키 위해 천도를 단행했다. 그뿐 아니라 조선의 개국 이념인 유교사상을 사회 속에 확립시켰고,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정치를 내세워 왕의 바른 길을 가르쳤다. 또한 명의 공물 요구가 지나치자 요동 정벌론으로 맞서며 정치적 독립을 실행했고, 병권집중화 운동으로 군권을 안정시켰다.
이렇듯 정치, 경제, 사상, 병법 등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조선 개국을 이끌었던 그가 후대에 이르러 오히려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로 또는 단지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인식된 것은 태종의 권력 집착에서 비롯된 정권 찬탈을 미화시키려는 조선왕도의 외도적인 매도 때문일 것이다.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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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성혁명론을 실천한 풍운아 정도전
조선의 개국은 역성혁명론의 결정체였으며, 이러한 논리를 고려왕조에 대입한 사람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 물리력으로 왕조를 교체할 수 있다는 맹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정도전은 이미 국운이 기울어가던 고려왕조를 폐하고 성리학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한 새로운 왕조를 꿈꾸었다.
정도전은 고려 말에 개혁을 꿈꾸던 일군의 성리학자들이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 정공미는 고을의 아전격인 호장으로 있었으며, 대대로 미미한 벼슬을 유지해오다가 아버지 정운경에 이르러서 비로소 직제학이라는 중앙관리로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서얼 출신의 노비였다. 이런 출신 배경은 정도전의 출세에 엄청난 걸림돌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동문수학했던 벗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주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 외톨박이 생활이 정도전으로 하여금 역성혁명을 꿈꿀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작용했던 것이다.
정도전은 이성계보다 2년 늦은 1337년에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운경이 이색의 아버지 이곡과 친구였던 덕으로 이색의 문하에서 글을 배울 수 있었으며, 거기에서 정몽주, 이숭인 등과 교분을 가졌다. 24세가 되던 1360년(공민왕 9년)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는 진사시에 붙어 충주사록, 전교주부, 통례문지후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성균관의 박사로 있으면서 동갑내기인 정몽주 등과 함께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유학을 강론했으며, 1371년에는 태상박사에 임명되어 5년간 전선을 관장했다.
1375년(우왕 1년) 권신, 이인임, 경복흥 등의 친원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에 유배되었으며, 2년 뒤에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로는 낙향하여 4년간 칩거하다가 한양으로 가서 삼각산 밑에 초가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주변 유학도들의 방해로 서재를 철거당하고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이렇게 유랑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1383년 이성계를 찾아간다. 이때 이성계는 나하추 부대를 격퇴시킨 후 각종 전쟁에서 승전을 거듭하여 고려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었으며, 고려 변방 동북면의 도지휘사를 맡고 있었다.
이성계와 인연을 맺은 정도전은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에 오른다. 이후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에 성공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 등과 함게 전제개혁안을 건의하고,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하여 이성계가 조정을 장악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듬해 정몽주 등과 함께 우왕의 아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좌명공신에 봉해지고,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 총제사가 되어 병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다음 해 봄 이성계가 사냥 중에 낙마하여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정몽주, 김진양 등의 탄핵을 받아 또다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정몽주 등이 그를 탄핵한 주된 이유는 “가풍이 부정하고 가계가 불명확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을 탄핵한 실제 목적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몽주 일파의 정치적 공략에 위기감을 느낀 이방원은 급기야 정몽주를 살해하는 등의 극단적인 조치를 단행한다. 이방원에 의해 정몽주가 격살당하자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그해 7월에 조준, 남은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마침내 조선을 개국하였다.
조선의 개국은 정도전의 역성혁명론의 실천임과 동시에 그가 염원하던 유교적 왕도정치의 실습장이었다. 정도전은 꿈에도 그리던 새 왕조 주창에 성공하자 성리학적 이념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매진했다. 우선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새로운 법제도의 틀을 닦았으며, 도읍을 옮겨 새 왕조의 면모를 높였고, 『경제문감』을 저술하여 재상,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확립했다. 또한 명의 공물 요구가 거세지자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군량 미확보, 진법 훈련, 사병 혁파 등을 적극 추진해 병권집중 운동을 펼쳐나간다.
이러한 하부조직에 대한 개혁 작업뿐 아니라 『경제문감별집』을 저술해 왕이 나아갈 길을 밝혔으며,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숭유억불 정책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의 이 같은 노력은 사병 혁파에 위기를 느낀 이방원의 무력 동원으로 중도에서 좌절되고 만다. 정도전의 세력이 날로 강해지자 이방원은 자신의 형제들과 힘을 합쳐 그를 제거해버렸던 것이다. 정도전은 어린 세자 방석을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꿈꾸었지만, 왕권과 자신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이방원은 사병을 이끌고 내습하여 그를 살해하고 더불어 세자 방석도 죽여버렸다. 이때가 1398년으로 정도전의 나이 62세였다.
정도전은 자신을 한나라의 장량에 비유하여 조선의 개국에 자신의 공이 가장 컸음을 공공연하게 자랑하곤 했다. 그리고 한 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해 한나라를 세웠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했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지나친 자부심이 결국 그의 죽음을 자초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조선에 끼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역성혁명이론에 입각해 이성계로 하여금 조선을 개국하게 했고, 한 나라의 근본이 되는 법제를 확립하고, 민심을 수습키 위해 천도를 단행했다. 그뿐 아니라 조선의 개국 이념인 유교사상을 사회 속에 확립시켰고,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정치를 내세워 왕의 바른 길을 가르쳤다. 또한 명의 공물 요구가 지나치자 요동 정벌론으로 맞서며 정치적 독립을 실행했고, 병권집중화 운동으로 군권을 안정시켰다.
이렇듯 정치, 경제, 사상, 병법 등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조선 개국을 이끌었던 그가 후대에 이르러 오히려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로 또는 단지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인식된 것은 태종의 권력 집착에서 비롯된 정권 찬탈을 미화시키려는 조선왕도의 외도적인 매도 때문일 것이다.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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