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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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제가에 대해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초정 박제가

Ⅱ. 박제가의 생애와 학풍

Ⅲ. 박제가의 예술성과 성품

Ⅳ. 정조의 인재등용관과 북학파

Ⅴ. 조선 시대의 신분제에 대한 박제가의 견해

Ⅵ. 18세기 학풍과 북학의의 의의

Ⅶ. 박제가와 북학의

Ⅷ. 박제가가 제시한 상공업 진흥책과 소비 이론

Ⅸ. 박제가의 개혁안의 한계점


<참고문헌>

본문내용

."는 주장을 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론에 그치고 행동으로 연결하지 못한 점이다.
※ 중상주의와 중농주의의 차이
중농주의 실학자
중상주의 실학자
학 파
경세치용 학파, 성호학파
이용후생 학파, 북학파
목 표
자영농 육성
상공업 육성, 기술 혁신
신 분
남인 계열(농촌)
노론 계열(도시)
계 보
유형원→이익→정약용
유수원→홍대용→박지원→박제가
차이점
토지분배의 관심
지주제 반대
화폐사용이 부정적(이익)
생산력 증대의 관심
지주제 찬성
화폐사용 강조(박지원)
영 향
한말 애국계몽사상가
흥선대원군 세력
일제시대 국학자
한말 개화사상가(박규수, 김옥균 등)
공통점
부국강병, 민생안정
농업 진흥
문벌제도, 자유상공업 비판
Ⅸ. 박제가의 개혁안의 한계점
일전이었다면 “우리나라에 산업혁명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 한참 궁리를 하다가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이다."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서양에서는 이미 200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영국은 1760년대에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으니 우리보다 200년 앞섰고, 이웃나라 일본은 1890년대에 산업혁명을 시작했으니 우리보다 70년을 앞섰다. 하지만 박제가에 대해서 조사하며 기존의 생각이 바뀌었다. 앞서 나온 박제가의 ‘우물론’을 살펴보자.
"대개 재물은 샘물과 같으니, 샘물은 퍼내면 다시 가득 차지만 버려두면 말라버린다. 같은 이치로 비단옷을 입지 않으면 나라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게 되어 여공이 적어질 것이고, 깨진 그릇을 버리지 않고 멋 부리는 일을 좋아하지 않으면 수공업자와 도자기 기술자의 일이 없어져서 마침내 그 기술과 재주가 사라지게 된다. 또 농사가 황폐해서 농사짓는 법을 잊어버리고 장사에 이익이 적어서 상업이 사라지면, 모든 백성들은 가난해져서 서로 서로 돕는 모습이 사라질 것이다."
이 글의 요지는 소비를 해야 생산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즉 생산을 하면 그것을 소비한다는 자급자족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소비가 증가할 때 소비자를 상대로 한 상품 생산이 활발해 진다는 말이다. 상품생산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가장 큰 특징이니, 박제가는 이미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주장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처럼 박제가는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진행될 즈음에 우리도 산업혁명을 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박제가의 주장은 당시 사회에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박제가가 북학의를 쓸 무렵, 조선의 지배계층은 화이론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었다. 화이론에서는 중국을 통일한 한족(漢族)이 중화이며 그 밖의 모든 나라는 오랑캐라는 사고방식으로, 이에 따르면 이 당시 중국을 지배하는 청나라는 만주족이므로 오랑캐의 나라가 된다. 그래서 조선만이 유일할 중화이므로 청을 멸시하고 배척해야 한다는 사상이 만연되어 있었다(이를 소중화 의식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박제가는 청 문물 수입을 주장한 것이다. 박제가의 상공업 진흥론과 청 문물 수입론은 지구촌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대단한 내용이 아닐 수도 있으나, 지금부터 200년 전인 조선 후기사회에서는 당시 지배층이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획기적인 제안이었던 것이다. 한층 더 중요한 것은 박제가의 사상이 근대 지향적이라는 점이다. 동시대에 살았고 실학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받는 정약용이 제시하는 개혁안이 농본주의에 기초했던데 비하여, 박제가의 주장은 근대적 상공업 진흥책이었다. 이 점에서 박제가는 근대 자본주의 지향의 사상가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박제가의 주장은 지나친 데가 있었다. 그는 중국의 문물을 흠모한 나머지 거의 무조건적인 문물 수입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중국의 문물을 쉽게 수용하기 위하여 우리말을 폐기하고 중국어를 쓰자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청의 문물이 박제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외국의 문물을 수용한다고 하면 "내가 수용한다"는 것이므로 반드시 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주체를 상실한 문물 수용은 수용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소멸인 것이다. 박제가의 이러한 자세는 개항 후 개화파에서도 나타난다.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하여 서양 문물 수입과 서양식 개혁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을 끝까지 도와줄 것으로 믿는 오류를 범했다. 이런 점에서 박제가나 개화파들의 자세는 외래 문물 수용에 대한 바른 태도에 대하여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청 문물 지나친 숭상, 균형감의 부재” 결과적으로 이 문장하나로 일축할 수 있다. 박제가는 분명 시대를 앞서 간 실학자였다. 그러나 박제가는 중국 문명에 지나치게 동화된 측면이 있었다. ‘그들이 일상 내뱉는 말 자체가 바로 문자이고 그들이 사는 집은 금벽(金碧)이 휘황찬란하다. 다닐 때는 수레를 타고 그들에게서는 향기가 난다. 그들의 도읍과 성곽, 음악은 번화하고 화려하며... 아아 그들은 모두 앞으로 우리나라의 학문을 이끌고 우리 백성을 다스릴 사람들이다.’(『북학의』, 북학변)와 같은 위험한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그의 이러한 확신에는 지나치게 청의 문화만을 숭상하는 신념이 깔려 있었다. 북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의 수용에 가장 선구적인 역할을 했지만, ‘균형감각’이라는 점에서는 후한 점수를 줄 수 없는 대목이다. 스승인 박지원처럼 조선의 문화에 대해 보다 애정을 가지면서 중국의 선진 문명을 수용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참고문헌>
서자 출신 지식인 등용으로 노론의 특권 카르텔에 맞서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전유각전서 貞閣全書 (하), 여강출판사, 1986
박제가의 '북학론', 민생을 위한 시대사상, 신병주,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
북학파 박제가의 시와 산문 완역한 정민 교수, 18세기 지식인을 되살려내다>편
이선주, 북학의 박제가 그에게 조선은 너무 갑갑한 땅이었다 편, 길진숙 수유+너머 강원연구원
[경제역사로 본 인물] 조선의 실학자 박제가, 조선은 왜 가난한가를 고민한 대표적인 실학자 편
정치경제학과 경제학 분야를 개척한 스코틀랜드 철학자 애덤스미스 편, 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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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1.22
  • 저작시기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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