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사회의 계층 - 귀족과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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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봉건사회의 계층 - 귀족과 기사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 리 말
Ⅱ. 귀족
(1) 귀족의 개념
(2) 중세 귀족의 기원과
역사가들의 견해
Ⅲ. 기사
(1) 기사 서임식
(2) 중세 봉건사회에서 보여진
기사들의 일상생활
(3) 기사도


Ⅳ. 중세 귀족의 변천
(1) 카롤링조 귀족과
봉건시대 귀족의 관계
(2) 신인들의 상향유동
양상과 원인
(3) 귀족과 기사의 일체화
Ⅴ. 맺 음 말

본문내용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적어도 12세기 중반까지는 기사와 귀족을 구분해야 한다고 한다. 즉 기사들은 원래 백이나 성주의 무장 수행원으로 근무하던 자들로서, 귀족과 명백하게 구별된다는 것이다. 반복하여 말하자면, 귀족들이 자기가 좋아서 기사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하여 귀족이 기사 일 수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기사는 귀족이 아니었다. 초기의 기사는 단지 말을 타고 전투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기사들이 비자유민 출신자들이었다.
한편, 12세기 후반에 독립적이었던 성주령이 영역제후령으로 통합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 결과 방(ban)권에 기초한 중소 귀족들의 권력이 영역제후들에 의해 잠식되었다. 이 시기 농민공동체의 저항 역시 귀족들의 권력 약화에 일조 했다. 게다가 이 시기 경제조건도 귀족들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화폐가치의 하락으로 고정된 지대에 의존하고 있던 귀족들의 수입이 감소했다. 상속재산의 분할을 막으려고 차남 이하의 아들들을 결혼시키지 않는 등의 상속전략에도 불구하고 분할 상속에 완전히 제동을 걸 수는 없었고, 교회 기진의 관행도 귀족의 빈곤화에 일조했다. 그래서 귀족들 가운데 재산을 상실하는 자도 속출하였다.
반면에 기사들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는 11세기 이후 꾸준히 높아졌다. 그들은 영역제후나 고위 성직자에 대한 봉사를 조건으로 토지를 부여받아 봉건가신이 되었다. 영역제후들은 독립적인 성주들을 약화시키면서 이들이 가졌던 방권의 일부를 자신의 기사들에게 양도하였던 것이다.
교회에서는 ‘가난한 자’들을 ‘무식하고 무자비한’ 전사들의 약탈과 공격에서 보호하자는 <신의 평화> 신의 휴전 [神─休戰], 중세 유럽에서 교회의 주도(主導)로 이루어졌던 특정기간 동안의 전투행위 금지.
운동으로 기사들의 무력행사를 제한하고 일정한 규범을 따르도록 하였고, 더욱이 기사들은 무기를 가지고 신에 봉사하는 신성한 역할을 하는 집단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기사는 ‘가난한 자’와 교회를 위해 싸우는 신의 전사 역할이 되었다. 이렇게 교회에 의해 기사들의 사회적 위신이 강화됐다. 그리하여 12세기가 되면 왕들조차도 기사의 칭호를 취하였고, 귀족들은 자신들의 무덤을 기사의 모습을 한 모습으로 장식하였다.
11세기부터 명확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 교회의 이데올로기인 ‘세 위계론’도 기사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데 영향을 끼쳤다. 주교 아달베롱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이 이데올로기는 세속인을 태생이나 혈통이 아니라 직능에 따라 구분한다. 이전에 세속인은 일반적으로 자유민과 예속민, 혹은 귀족과 평민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세 위계에서 귀족의 자리는 찾아볼 수 없다. 세속인 중에는 ‘싸우는 자’와 ‘일하는 자’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귀족은 기사와 더불어 ‘싸우는 자’에 속하게 되었고, 기사의 가치와 생활양식을 점차 채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기사와 귀족들의 구분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고, 13세기말이 되면 귀족과 기사가 거의 동일시되었다.
Ⅴ. 맺 음 말
귀족은 여러 문명권에서도 널리 발견되는 사회집단으로 예속민에 대한 지배권을 갖는 특권적 지위가 혈통을 통해서 세습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귀족의 권능은 삼신분 이론에 의해 근거가 설정되서 18세기 까지 지속되었지만 이론적인 구상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된다. 중세 귀족의 기원에 관해서는 역사가들의 여러 견해가 불일치 되는데, 대표적 견해로 블로크의 단절설과,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속설이 있다. 그밖에 모든 기사들이 귀족이라는 전통적 견해와 이와 반대되는 견해가 있다.
기사는 수습 기사에서 일정한 수련기간이 끝난 후 서임식을 통해 된다. 기사는 주로 전투에 열중했으므로 교육을 받을 여유가 없었고, 대체로 무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 교양을 쌓고 기사도와 같은 일정한 생활이념과 행동규칙을 갖고 있었다.
기사와 귀족이 통합되는 과정은 대체적으로 12세기말부터 13세기사이에 크고, 작은 사회변동으로 인하여 발생하는데, 이때 기사와 귀족의 구분이 점차 줄어들게 되었고, 13세기말 기사신분을 매개로 지배층이 일체화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참고문헌
브라이언 타이어니, 시드니 페이터(이연규 역), 『西洋 中世史』, 집문당, 1993.
서양중세사학회, 『서양중세사 강의』, 느티나무, 2003.
만프레트 라이츠(이현정 옮김), 『중세 산책』, 플래닛미디어, 2006.
차하순, 『서양사 총론』, 탐구당, 2008.
강일휴, 「중세 프랑스 귀족의 기원과 변천」, 『서양중세사연구』, vol. 14, 37-66,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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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13.05.28
  • 저작시기2013.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49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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