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최후의 날 종교 재판의 마지막 날 [오다페 소개, 종교 재판에 대한 마지막 기록, 이단법정, 처형을 주재하는 성 도미니크, 그레고리우스 9세, 인노켄티우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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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 속 최후의 날 종교 재판의 마지막 날 [오다페 소개, 종교 재판에 대한 마지막 기록, 이단법정, 처형을 주재하는 성 도미니크, 그레고리우스 9세, 인노켄티우스 4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서는 처음에는 관대한 태도를 보여 종교 개혁파와 대응 종교 개혁파의 협조를 강조하였으며 덕분에 바티칸은 광신의 파도를 피할 수 있었지만, 개신교의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가는 강경일변도로 인해 결국은 점차 종교 개혁 세력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1538년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가 자신을 "영국교회의 수장"이라고 선언한 《수장령》에 대해 파문 조치를 내려 개신교의 확산을 적극 배격하였다. 그리고 1542년 로마에 이단 심문소를 설치해 종교 재판을 실시,독일의 개신교도 제후(諸侯)를 토벌하기 위한 십자군을 파견으로 개신교 신도,유대인, 이슬람교도들이 박해를 받았다.
1540년 예수회의 설립을 승인하여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일대에 로마 가톨릭을 포교할 수 있는 길을 열었는데, 그가 승인한 예수회는 그리스도교 역사 최초로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또한 교회 개혁을 이루는 동시에 개신교의 공격에 정면으로 대응하기 위해 1545년부터 1563년까지 18년 동안 이탈리아 북부의 트리엔트에서 세리판도(G. Seriando), 소토(Dominicus de Soto), 라이네스(D. Lainez), 살메론(A Salmeron) 등 당대의 저명한 신학자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기독교의역사에 한 획을 긋는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라 일컬어지는 이 공의회는 ‘개신교의 종교 개혁에 대해 교회의 교도직으로 응답한 최고의 대답’이었다는 말처럼 종교 개혁파가 제기한 문제를 과감하게 수렴, 로마 가톨릭의 신앙과 교리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수립함으로써 당시 혼란스러웠던 교회를 바로 잡아 체계화 하고 교회 생활의 모든 분야를 쇄신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공의회를 통해 신앙 규범으로서의 성서의 역할, 정경, 의화, 성사, 원죄교의 등이 최종 확정됐고 개혁 규범 등도 선포됐다.
공의회를 소집한 바오로 3세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후세에게 ‘개혁 교황’이란 칭호와 함께 반동 종교 개혁의 첫 번째 교황 또는 처음으로 교회개혁을 진지하게 시도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더불어 종교가라기보다는 인문주의에 심취한 귀족에 가까웠던 바오로 3세는 사치스런 자신의 취향에 따라 예술과 학문, 사냥을 애호하였으며, 미켈란젤로를 ‘하느님이 보내 주신 사람’이라고까지 격찬하며 그를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 총감독으로 채용하여 ‘최후의 심판’ 등을 그리게 하였으며, 그 외 다른 예술가들의 재능도 충분히 발휘하게 하였다. 또한 유능한 학자들을 대거 로마 대학교에 초빙하고, 카스텔 산탄젤로를 프레스코화 장식으로 꾸미고, 바티칸 도서관을 충실(充實)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르네상스 최후의 교황으로 불리우며 르네상스 시대의 문예부흥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교황으로 눈부신 업적을 쌓게 된다.
1549년 11월 10일, 82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는데, 죽는 그 순간까지 그의 정신은 매우 맑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교황청은 점점 개신교에게 강경한 자세를 취하게 되고, 결국 교회는 결정적인 분열을 맞게 되고 만다. 실례로 로마 가톨릭은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전까지 개신교를 단죄했었다.
4.페르난도 7세 [― 七世, Fernando Ⅶ] (1784. 10. 14 ~1833. 9. 29 )
영)Ferdinand Ⅶ. 별칭은 열망왕 페르난도(Fernando el Deseado).
스페인의 왕(1808~33 재위).
나폴레옹 전쟁중에는 프랑스에 볼모로 붙잡혀 있었다. 카를로스 4세와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마누엘 데 고도이를 총신으로 두었는데, 고도이는 1795년 이후 바젤 평화조약으로 프랑스에 항복한 뒤 평화공(平和公)이라는 공허한 칭호를 갖고 있었다. 페르난도의 가정교사는 이 총신에 대한 질투를 부채질해 페르난도로 하여금 나폴레옹의 보호를 구하도록 부추겼다. 카를로스 4세는 페르난도를 체포하라는 경고를 받았지만 그를 용서해주었다. 고도이가 프랑스의 스페인 침입을 막지 못하자 카를로스는 1808년 3월 17일에 일어난 아란후에스 반란으로 퇴위하고 아들 페르난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계속 진격해와 마드리드를 점령했고 나폴레옹은 페르난도를 국경 너머로 불러들여 왕위를 다시 그의 아버지에게 돌려주도록 강요했다. 페르난도는 왕위를 나폴레옹에게 주었고 나폴레옹은 그의 형 조제프를 스페인 왕위에 앉힌 뒤 전쟁 동안 페르난도를 프랑스에 붙잡아 두었다.
스페인의 좌파들은 민중들에게 '열망왕'이라고 알려진 페르난도가 붙잡혀 있다는 명분을 내걸고 프랑스 침입자들에 저항하도록 했다. 1812년 독립 스페인인들은 카디스 헌법을 채택했으나, 1813년 12월 나폴레옹은 명백하게 이 헌법을 전복하겠다는 뜻을 나타내며 페르난도를 돌려보냈다. 그는 쇠락한 권력을 붙잡고 부분적으로 독립한 스페인령 아메리카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의 장관들은 아메리카의 군대를 강화하지도 못했고 영국정부를 설득해 재정복을 위한 협력이나 묵인도 얻어내지 못했다. 1820년 혁명이 일어나 1812년의 자유주의 헌법을 재건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1823년 프랑스의 루이 18세는 앙굴렘 공작이 지휘하는 대규모 군대를 보내 그를 급진적 장관들로부터 구제해주었다. 페르난도의 새 정부는 급진주의자들을 체포하거나 추방했다. 1826년경 아메리카의 스페인령 식민지가 모두 독립을 이루었다. 페르난도의 정부는 이제 왕당파 의용군인 민병대와 점령군인 프랑스군에 의존했다.그는 3번 결혼했으나 자식이 없었으므로 그를 지지하는 절대주의자들은 더욱 절대주의적인 그의 동생 카를로스(카를로스 마리아 이시드로 데 보르본)를 후계자로 추대했다. 1830년 그의 4번째 아내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장차 이사벨 2세가 될 딸을 낳았다. 페르난도가 병이 들자 돈 카를로스는 왕비를 설득해 자신의 권리를 확인받았으나, 페르난도는 회복되어 아우를 추방하고 어린 딸을 위해 온건 자유주의자를 물색했다. 1833년 9월 페르난도가 죽자 어린 딸이 여왕으로 선포되었으나 돈 카를로스가 포르투갈에서 돌아와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왕비는 자유주의자들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제1차 카를로스파 전쟁(1833~39)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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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5.28
  • 저작시기2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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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49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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