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1920년대의 신간회
Ⅱ. 1920년대의 태을교
Ⅲ. 1920년대의 도일
Ⅳ. 1920년대의 노동운동조직
1. 노동공재회
2. 조선노동연맹회, 남선노농총동맹, 조선노농총동맹
3. 쟁의 발생건수
4. 1922.12 경성양화직공 파업
5. 1923.7 경성고무 여직공 파업
Ⅴ. 1920년대의 문화정치
Ⅵ. 1920년대의 조선공산당
Ⅶ. 1920년대의 식민지한국사회
참고문헌
Ⅱ. 1920년대의 태을교
Ⅲ. 1920년대의 도일
Ⅳ. 1920년대의 노동운동조직
1. 노동공재회
2. 조선노동연맹회, 남선노농총동맹, 조선노농총동맹
3. 쟁의 발생건수
4. 1922.12 경성양화직공 파업
5. 1923.7 경성고무 여직공 파업
Ⅴ. 1920년대의 문화정치
Ⅵ. 1920년대의 조선공산당
Ⅶ. 1920년대의 식민지한국사회
참고문헌
본문내용
능력은 오로지 당시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 달려있었다.
Ⅶ. 1920년대의 식민지한국사회
1920년대 초반에 사회주의 사상을 한국에 전파하는 역할을 한 잡지는 開闢 이외에도 新天地, 新生活, 朝鮮之光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잡지들은 모두 신문지법에 의한 허가를 받고 사회시사 문제들을 취급할 수 있었으나, 구체적인 비판에 대해서는 일제로부터의 상당한 제약을 감수해야 했다. 그 중 新生活은 식민지에서의 경제사회적 문제들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여 결국 창간 이후 1년도 되지 않아 폐간당하면서 좌익사상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開闢의 기고가 중의 한 사람이자 新生活의 편집장이었던 이성태는 한국 사회의 객관적 조건을 분석하면서, 특정의 구조와 문화는 각 역사적 시기를 성격 짓게 된다고 주장하고 당시 사회의 불확실성과 고통을 현대문화에 뒤따르는 경제적 변화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본주의 경제구조가 한국에서 고통과 불확실성을 창출한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오로지 그 체제를 지지해주는 상응하는 이데올로기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현 체제를 지탱해주는 진부하고도 타협적인 철학을 버리고, 장래를 보장해주는 사상에 매달려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新生活의 설립자의 한 사람이었던 김명식은 사회구조가 어떻게 변화의 맥락으로 작용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문화적 변화도 무의미해진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옛 것 대신 새로운 문화로 대치하자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지평의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봉건 귀족에서 자본가로의 문화의 흐름은 전적으로 동일한 지평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소수의 문화이며 따라서 구문화였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문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 새로운 문화는 민중정신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전체문화요 대중문화인 것이다.
이들이 소개하던 사회주의는 당시 일본 사상계의 사회주의, 사회개량주의, 무정부주의, 인도주의, 톨스토이주의, 인본주의, 국가주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등 다양한 형태였다. 그 공통점은 당시 시대적 경향인 ‘개조’문제에 대해 ‘비사회주의적 지식인’들이 이를 ‘인격적 개조’로 파악했다면, ‘사회주의적 지식인’은 사회의 변혁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상이 얼마나 정확하고 깊이 있게 소개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대체로 사회주의의 초기 수용양상은 일제의 식민지라는 역사적 조건 하에서 사회주의 그 자체의 논리보다는 제국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진보사상으로서 혁명적 행동을 수용하기에 보다 적합한 이념으로 파악되고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사회주의 사상의 독자성이 제고되기 시작한 것은 이광수가 1922년 5월에 開闢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면서 민족주의운동 진영 내에서 논쟁이 촉발되면서부터였다. 앞 장에서 언급되었던 이광수 등의 ‘사회개량론자’들은 식민지적인 특수성을 외면한 채, 일본을 통한 구미 신문화의 수용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적 차원의 문화발전 추세에 발맞추려는 것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하에서 정치권력의 뒷받침이 없는 경제적 실력양성운동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결국 일제의 정치적 지배를 인정하면서 자치권 등 일정한 정치적 권리를 추구하는 타협적인 자세로 이념적 변용을 겪으면서 민족운동의 분화를 촉진시킨 것이다.
반면에 開闢의 사회주의 지식인들은 식민지적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이를 대중단체, 사상단체 등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인물로 볼 수 있다. 이들이 사회주의자로서 지녔던 자본주의 붕괴의 신념은 서구의 발전과정을 모방하려는 민족주의계열의 사회진화론적 사고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계급분석을 통한 독립문제에의 접근은 앞 장에서 살펴본 부국강병론적 국가중심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민’의 역할과 가능성에 대한 본격적인 의미부여라는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남정원, 1920년대 후반 신간회 대구지회의 설립과 활동, 계명대학교, 2005
박상석, 1920년대 노동운동의 성격에 대한 연구, 중앙대학교, 1987
박찬승, 1920년대 도일유학생과 그 사상적 동향, 한국역사연구회, 2004
성주현, 1920년대 초 태을교인의 민족운동,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1
이재진 외 1명, 1920년대 일제 문화정치 시기의 법치적 언론통제의 폭압적 성격에 대한 재조명, 한국언론학회, 2006
조춘호, 1920년대 후반 만주정세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자치운동, 한중인문학회, 2010
Ⅶ. 1920년대의 식민지한국사회
1920년대 초반에 사회주의 사상을 한국에 전파하는 역할을 한 잡지는 開闢 이외에도 新天地, 新生活, 朝鮮之光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잡지들은 모두 신문지법에 의한 허가를 받고 사회시사 문제들을 취급할 수 있었으나, 구체적인 비판에 대해서는 일제로부터의 상당한 제약을 감수해야 했다. 그 중 新生活은 식민지에서의 경제사회적 문제들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여 결국 창간 이후 1년도 되지 않아 폐간당하면서 좌익사상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開闢의 기고가 중의 한 사람이자 新生活의 편집장이었던 이성태는 한국 사회의 객관적 조건을 분석하면서, 특정의 구조와 문화는 각 역사적 시기를 성격 짓게 된다고 주장하고 당시 사회의 불확실성과 고통을 현대문화에 뒤따르는 경제적 변화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본주의 경제구조가 한국에서 고통과 불확실성을 창출한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오로지 그 체제를 지지해주는 상응하는 이데올로기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현 체제를 지탱해주는 진부하고도 타협적인 철학을 버리고, 장래를 보장해주는 사상에 매달려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新生活의 설립자의 한 사람이었던 김명식은 사회구조가 어떻게 변화의 맥락으로 작용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문화적 변화도 무의미해진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옛 것 대신 새로운 문화로 대치하자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지평의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봉건 귀족에서 자본가로의 문화의 흐름은 전적으로 동일한 지평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소수의 문화이며 따라서 구문화였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문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 새로운 문화는 민중정신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전체문화요 대중문화인 것이다.
이들이 소개하던 사회주의는 당시 일본 사상계의 사회주의, 사회개량주의, 무정부주의, 인도주의, 톨스토이주의, 인본주의, 국가주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등 다양한 형태였다. 그 공통점은 당시 시대적 경향인 ‘개조’문제에 대해 ‘비사회주의적 지식인’들이 이를 ‘인격적 개조’로 파악했다면, ‘사회주의적 지식인’은 사회의 변혁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상이 얼마나 정확하고 깊이 있게 소개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대체로 사회주의의 초기 수용양상은 일제의 식민지라는 역사적 조건 하에서 사회주의 그 자체의 논리보다는 제국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진보사상으로서 혁명적 행동을 수용하기에 보다 적합한 이념으로 파악되고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사회주의 사상의 독자성이 제고되기 시작한 것은 이광수가 1922년 5월에 開闢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면서 민족주의운동 진영 내에서 논쟁이 촉발되면서부터였다. 앞 장에서 언급되었던 이광수 등의 ‘사회개량론자’들은 식민지적인 특수성을 외면한 채, 일본을 통한 구미 신문화의 수용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적 차원의 문화발전 추세에 발맞추려는 것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하에서 정치권력의 뒷받침이 없는 경제적 실력양성운동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결국 일제의 정치적 지배를 인정하면서 자치권 등 일정한 정치적 권리를 추구하는 타협적인 자세로 이념적 변용을 겪으면서 민족운동의 분화를 촉진시킨 것이다.
반면에 開闢의 사회주의 지식인들은 식민지적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이를 대중단체, 사상단체 등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인물로 볼 수 있다. 이들이 사회주의자로서 지녔던 자본주의 붕괴의 신념은 서구의 발전과정을 모방하려는 민족주의계열의 사회진화론적 사고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계급분석을 통한 독립문제에의 접근은 앞 장에서 살펴본 부국강병론적 국가중심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민’의 역할과 가능성에 대한 본격적인 의미부여라는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남정원, 1920년대 후반 신간회 대구지회의 설립과 활동, 계명대학교, 2005
박상석, 1920년대 노동운동의 성격에 대한 연구, 중앙대학교, 1987
박찬승, 1920년대 도일유학생과 그 사상적 동향, 한국역사연구회, 2004
성주현, 1920년대 초 태을교인의 민족운동,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1
이재진 외 1명, 1920년대 일제 문화정치 시기의 법치적 언론통제의 폭압적 성격에 대한 재조명, 한국언론학회, 2006
조춘호, 1920년대 후반 만주정세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자치운동, 한중인문학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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