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해양팽창과 근대의 형성>
위그노 해적의 심성사 1523-1565
- 위그노 해적과 기독교적 심성과의 연관성 탐구 -
I. 서론 : 해적과 기독교
II. 위그노 해적의 심성사
1) 위그노 해적?
2) 위그노 해적의 활동 양상
3) 이들은 해적인가 종교의 수호자인가?
4) 신교와 구교의 교리적 차이
5) 폭력성과 기독교적 죄의식의 문제
6) 종교적 상징과 해적의 상징
7) 해적으로서의 한계
8) 위그노 해적의 종말
III. 결론 : 종교적 관념의 소멸과 근대성, 그리고 폭력성
※ 참고문헌
위그노 해적의 심성사 1523-1565
- 위그노 해적과 기독교적 심성과의 연관성 탐구 -
I. 서론 : 해적과 기독교
II. 위그노 해적의 심성사
1) 위그노 해적?
2) 위그노 해적의 활동 양상
3) 이들은 해적인가 종교의 수호자인가?
4) 신교와 구교의 교리적 차이
5) 폭력성과 기독교적 죄의식의 문제
6) 종교적 상징과 해적의 상징
7) 해적으로서의 한계
8) 위그노 해적의 종말
III. 결론 : 종교적 관념의 소멸과 근대성, 그리고 폭력성
※ 참고문헌
본문내용
상을 띠게 되었으며, 버커니어 해적의 지도자들은 대체로 영국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영국 해적들은 위그노 해적들과는 달리 종교적 심성을 전혀 배경으로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졸리 로저의 모습을 한 해적으로 심성적 변모를 거쳤다고 말할 수 있다. 위그노 해적이 소멸하며 해적의 종교적 심성 역시 사실상 소멸했다. Ibid.
III. 결론 : 종교적 관념의 소멸과 근대성, 그리고 폭력성
유럽 대륙과 멀리 신대륙 근방의 바다에서 구교도와 신교도는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이들의 전쟁에서 종교는 정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이해타산이 결부되어 있는 것이었으며,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절대적인 면모를 지닌 체계라고 할 수 있는 종교체계의 내면화는 이들에게 사명감을 고취시킴으로써 상대에 대한 적대감을 오히려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결과는 무자비한 폭력과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었다. 이는 기독교의 근본정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종교적 심성이 폭력을 부채질하였다는 데서 종교는 긍정적이라기보다는 부정적이다.
이런 종교를 표방한 폭력의 모습은 이후 서구 세력이 아메리카 및 아시아로 끊임없이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이들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기독교의 근본정신이라는 사랑과 용서, 평등한 속죄와 구원의 논리는 현실의 가혹함을 포장하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유럽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기독교는 정치적 영향력을 서서히 잃고 지배적 관념의 역할을 상실하게 된다. 그 빈자리에 근대적 이성이 들어와 유럽인의 정신세계에 서서히 내면화하게 되었다. 구교를 반대하여 나온 신교 역시 폭력과 배타성에서는 구교 못지않았던 점은 앞에서 제시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Peter Earle,, St. Martin's Press, 2005, p.92 "Whether Catholic or Protestant, the privateers themselves were motivated by lust for loot, love of adventure and an abiding hatred of Spaniards."
신교든 구교든 표면적 논리 뒤에는 현실적 욕망이 짙게 감추어져 있었고 신교는 구교의 모순에 대한 대안으로 결코 기능할 수 없었다. 이 빈자리는 서구의 근대 이성이 대체하였으나, 근대 이성도 그 근원적 폭력성만큼은 숨길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후 역사에서 보여준 서구의 폭력적 식민 제국주의가 잘 웅변해주고 있다.
결국 서구의 폭력성은 여러 가지 껍데기를 쓰고 이후 세계를 지배하면서 많은 비극을 야기하였다. 위그노 해적은 종교성과 해적의 본질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 이러한 유럽 전근대성과 근대성, 폭력성이 겹쳐 드러나는 사례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해적들의 세계에서 종교적 면모가 소멸되고 폭력성만이 남는 것은 근대 유럽인들의 심성 변화와 그 맥을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참고문헌
주경철, <대항해시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1997,
앵거스 컨스텀, 이종인 역, <해적의 역사>, 가람기획, 2003,
강남수, <프랑스 종교 개혁사>, 그리심, 2000
유요한, <종교적 인간, 상징적 인간>, 이학사, 2009,
앨리스터 맥그레스, 박규태 역,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국제제자훈련원, 2009,
마커스 레디커, 박연 역,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에서>, 까치, 2001,
Peter Earle,, St. Martin's Press, 2005,
영국 해적들은 위그노 해적들과는 달리 종교적 심성을 전혀 배경으로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졸리 로저의 모습을 한 해적으로 심성적 변모를 거쳤다고 말할 수 있다. 위그노 해적이 소멸하며 해적의 종교적 심성 역시 사실상 소멸했다. Ibid.
III. 결론 : 종교적 관념의 소멸과 근대성, 그리고 폭력성
유럽 대륙과 멀리 신대륙 근방의 바다에서 구교도와 신교도는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이들의 전쟁에서 종교는 정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이해타산이 결부되어 있는 것이었으며,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절대적인 면모를 지닌 체계라고 할 수 있는 종교체계의 내면화는 이들에게 사명감을 고취시킴으로써 상대에 대한 적대감을 오히려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결과는 무자비한 폭력과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었다. 이는 기독교의 근본정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종교적 심성이 폭력을 부채질하였다는 데서 종교는 긍정적이라기보다는 부정적이다.
이런 종교를 표방한 폭력의 모습은 이후 서구 세력이 아메리카 및 아시아로 끊임없이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이들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기독교의 근본정신이라는 사랑과 용서, 평등한 속죄와 구원의 논리는 현실의 가혹함을 포장하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유럽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기독교는 정치적 영향력을 서서히 잃고 지배적 관념의 역할을 상실하게 된다. 그 빈자리에 근대적 이성이 들어와 유럽인의 정신세계에 서서히 내면화하게 되었다. 구교를 반대하여 나온 신교 역시 폭력과 배타성에서는 구교 못지않았던 점은 앞에서 제시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Peter Earle,
신교든 구교든 표면적 논리 뒤에는 현실적 욕망이 짙게 감추어져 있었고 신교는 구교의 모순에 대한 대안으로 결코 기능할 수 없었다. 이 빈자리는 서구의 근대 이성이 대체하였으나, 근대 이성도 그 근원적 폭력성만큼은 숨길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후 역사에서 보여준 서구의 폭력적 식민 제국주의가 잘 웅변해주고 있다.
결국 서구의 폭력성은 여러 가지 껍데기를 쓰고 이후 세계를 지배하면서 많은 비극을 야기하였다. 위그노 해적은 종교성과 해적의 본질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 이러한 유럽 전근대성과 근대성, 폭력성이 겹쳐 드러나는 사례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해적들의 세계에서 종교적 면모가 소멸되고 폭력성만이 남는 것은 근대 유럽인들의 심성 변화와 그 맥을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참고문헌
주경철, <대항해시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1997,
앵거스 컨스텀, 이종인 역, <해적의 역사>, 가람기획, 2003,
강남수, <프랑스 종교 개혁사>, 그리심, 2000
유요한, <종교적 인간, 상징적 인간>, 이학사, 2009,
앨리스터 맥그레스, 박규태 역,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국제제자훈련원, 2009,
마커스 레디커, 박연 역,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에서>, 까치, 2001,
Peter Ear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