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강화도의 지정학적 위치
Ⅲ. 강화도의 역사
Ⅳ. 강화도의 관광일정
Ⅴ. 강화도의 특산품과 시장
1. 강화 화문석과 인삼
2. 우리옥
3. 대선정
4. 강화읍의 토산품 판매점과 인삼센터
5. 풍물시장
6. 강화 5일장
Ⅵ. 강화도의 주요 명소
1. 보문사
2. 갑곶진
3. 선원사지
4. 광성보
5. 초지진
6. 전등사
7. 이건창 생가
8. 마니산
9. 고인돌
10. 연무당
11. 고려궁지
12. 외규장각
13. 용흥궁
14. 덕포진
Ⅶ. 강화도와 마니산
Ⅷ. 강화도의 전설
1. 삼랑성 전설
2. 나부상 전설
3. 마니산의 전설
4. 은행나무 전설
참고문헌
Ⅱ. 강화도의 지정학적 위치
Ⅲ. 강화도의 역사
Ⅳ. 강화도의 관광일정
Ⅴ. 강화도의 특산품과 시장
1. 강화 화문석과 인삼
2. 우리옥
3. 대선정
4. 강화읍의 토산품 판매점과 인삼센터
5. 풍물시장
6. 강화 5일장
Ⅵ. 강화도의 주요 명소
1. 보문사
2. 갑곶진
3. 선원사지
4. 광성보
5. 초지진
6. 전등사
7. 이건창 생가
8. 마니산
9. 고인돌
10. 연무당
11. 고려궁지
12. 외규장각
13. 용흥궁
14. 덕포진
Ⅶ. 강화도와 마니산
Ⅷ. 강화도의 전설
1. 삼랑성 전설
2. 나부상 전설
3. 마니산의 전설
4. 은행나무 전설
참고문헌
본문내용
다.
전설의 땅 강화도(江華島), 그 남단에 정족산(鼎足山)이란 산이 있고, 산등성이를 따라 성(城)이 있으니, 이를 불러 삼랑성(三郞城)이라 한다.
2. 나부상 전설
전등사 현판이 걸려 있는 대조루(對潮樓) 아래를 통과하여 법당 뜰 앞에 서면 처마 선을 상쾌하게 치올린 대웅보전이 보인다. 보물 제 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품위 있는 볼거리이지만 무엇보다 처마 네 귀퉁이에서 힘겹게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살색의 나녀상(裸女像)이 시선을 끈다. 이것이 바로 나부상의 전설이 서린 조각물이다.
전등사의 대웅전은 여러 차례 중건을 하였는데 자세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 절을 중수할 때의 일이다.
전등사 대웅전 건립에 참여한 도편수가 공사 중에 우연히 마을의 어느 여인과 사랑에 빠져 둘은 틈틈이 사랑을 나누었다. 이 도편수는 공사가 끝나면 그 여인과 살림을 차릴 결심으로 공사 노임을 모두 그 여인에게 맡기었다. 그러나 공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여인은 마음이 변해 도편수의 돈을 갖고 다른 남자와 도망쳐 버렸다. 도편수는 실의에 빠져 한동안 공사를 진행하지 못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 지었는데, 대웅보전의 네 귀퉁이에 그 여인의 나체상을 조각해 넣어 무거운 지붕을 떠받들게 했다. 지금도 전등사에 가면 그 여인의 나체상을 볼 수 있는데, 그곳에 나체상을 조각해 넣은 도편수의 심정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그 여인에게 무거운 지붕을 받치고 있어야 하는 억겁의 고통을 주고 싶은 증오의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그런 불사(佛事)를 지게 함으로써 여인의 업을 씻어주고픈 용서의 마음이었을까. 아마 그 해답은 조각상을 보는 사람들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으리라.
3. 마니산의 전설
마니산엔 재미있는 전설 하나가 전해진다. 『옛날 나무꾼 3명이 산속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노인 2명이 바둑을 두는 것을 재미있게 지켜보았다. 그러자 노인들은 바둑에 빠져 있던 나무꾼들에게 술을 권했다. 그런데 나무꾼들이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이미 세월은 3백년이 흘러 같이 살던 동네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는 이야기다.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도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는 참성단에서 전국체육대회 성화를 처음 채화한 것은 1955년 제 36회 대회. 앞서 일제시대를 거치며 열었던 전국체전을 감안하면 민족의식의 고취와 함께 마니산과 참성단이 새롭게 민족의 성지로 거듭난 사실을 알 수 있다. 전국체전 성화를 채화한 계기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2년 후인 55년 체전에 앞서 당시 화도면 출신 국회의원 윤재근씨가 『체전의 성화를 민족의 성전이요, 구국의 성전인 참성단에서 채화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이뤄졌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각계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 때만 해도 체전성화에 대해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시기여서 더욱 그랬다. 그러다 당시 대한체육회 성화부장이었던 이상백박사와 신익희 국회의장 등이 적극 나서면서 비로소 결실을 거두게 된다. 강화군은 그 때부터 해마다 전국체전 주경기장을 밝힐 성화 행사를 위해 칠선녀와 성화주자들을 뽑아 의식을 치르는 등 정성을 다하고 있다.
4. 은행나무 전설
경기도 강화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전등사에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 노승나무, 동승나무라 부르기도 하고 암컷 수컷이라 하여 애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정성을 드리기도 하는 이 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신기한 나무들에 관하여 내려오는 한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 배불숭유의 정책으로 불교는 매우 탄압 받았다. 유생들 혹은 관원들이 마음만 먹으면 탄압을 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승려들은 이에 저항하지 않았다.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여도 종교적 인내로 다 견디었던 것이다.
어느 날 전등사에 관가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아주 어려운 요구를 하였다. 절에 있는 은행나무의 은행이 열릴 쯤 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열매를 회수해 갔는데 이번에는 은행열매를 스무 가마니만큼 요구하였다. 그런데 그 은행나무에서 열리는 은행의 양은 열 가마니 정도였다. 관가에서는 수확량의 두 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절의 한 동자승이 이 사실을 노승에게 알렸다.
그는 동자승에게 그들을 미워하지 말라 타일렀지만 곧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열 가마니 이상 나오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한들 나라에 대한 반항이라며 탄압의 근거로 삼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저런 고민 끝에 노승은 백련사의 추송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추송스님은 도술이 뛰어나니 어떻게 해볼 수 있으시겠지.\' 그는 동자승을 추송스님에게 보냈다. 동자승과 함께 도착한 추송스님은 은행나무가 더 열리게 하는 3일기도를 하기로 하고 곧 기도에 착수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모이고 군관도 찾아 왔다. 그리고는 불가능함을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그 직후 갑자기 멀쩡하던 군관의 눈이 맞은 듯 부어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3일째 되는 날 늦은 오후 은행나무에서 3일정성의 막바지에 다다라 염불소리가 멎었을 때 추송스님이 축원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축원의 내용은 두 그루 나무의 열매를 앞으로 맺지 않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뜻밖의 축원에 모인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축원이 끝나자 먹구름이 몰려와 뇌성과 함께 때 아닌 비가 무섭게 내렸고 사람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렸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스님도 노승도 동자승 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말들 하였고 이후 전등사에 대한 탄압은 없어졌다 하였다. 전등사에는 지금도 그 은행나무만이 그 사연을 안은 채 서있다.
참고문헌
1. 강화사편찬위원회(1988), 江華史, 강화문화원
2. 미술문화 편집부(2012), 강화나들길 답사 수첩, 미술문화
3. 송슨진(2011), 춘우의 아름다운 우리나라, 성안당
4. 신서원(2002), 역사의 섬 강화도, 신서원
5. 이동미(2004), 강화도, 김영사
6. 최정규(2010),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마로니에북스
전설의 땅 강화도(江華島), 그 남단에 정족산(鼎足山)이란 산이 있고, 산등성이를 따라 성(城)이 있으니, 이를 불러 삼랑성(三郞城)이라 한다.
2. 나부상 전설
전등사 현판이 걸려 있는 대조루(對潮樓) 아래를 통과하여 법당 뜰 앞에 서면 처마 선을 상쾌하게 치올린 대웅보전이 보인다. 보물 제 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품위 있는 볼거리이지만 무엇보다 처마 네 귀퉁이에서 힘겹게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살색의 나녀상(裸女像)이 시선을 끈다. 이것이 바로 나부상의 전설이 서린 조각물이다.
전등사의 대웅전은 여러 차례 중건을 하였는데 자세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 절을 중수할 때의 일이다.
전등사 대웅전 건립에 참여한 도편수가 공사 중에 우연히 마을의 어느 여인과 사랑에 빠져 둘은 틈틈이 사랑을 나누었다. 이 도편수는 공사가 끝나면 그 여인과 살림을 차릴 결심으로 공사 노임을 모두 그 여인에게 맡기었다. 그러나 공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여인은 마음이 변해 도편수의 돈을 갖고 다른 남자와 도망쳐 버렸다. 도편수는 실의에 빠져 한동안 공사를 진행하지 못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 지었는데, 대웅보전의 네 귀퉁이에 그 여인의 나체상을 조각해 넣어 무거운 지붕을 떠받들게 했다. 지금도 전등사에 가면 그 여인의 나체상을 볼 수 있는데, 그곳에 나체상을 조각해 넣은 도편수의 심정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그 여인에게 무거운 지붕을 받치고 있어야 하는 억겁의 고통을 주고 싶은 증오의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그런 불사(佛事)를 지게 함으로써 여인의 업을 씻어주고픈 용서의 마음이었을까. 아마 그 해답은 조각상을 보는 사람들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으리라.
3. 마니산의 전설
마니산엔 재미있는 전설 하나가 전해진다. 『옛날 나무꾼 3명이 산속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노인 2명이 바둑을 두는 것을 재미있게 지켜보았다. 그러자 노인들은 바둑에 빠져 있던 나무꾼들에게 술을 권했다. 그런데 나무꾼들이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이미 세월은 3백년이 흘러 같이 살던 동네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는 이야기다.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도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는 참성단에서 전국체육대회 성화를 처음 채화한 것은 1955년 제 36회 대회. 앞서 일제시대를 거치며 열었던 전국체전을 감안하면 민족의식의 고취와 함께 마니산과 참성단이 새롭게 민족의 성지로 거듭난 사실을 알 수 있다. 전국체전 성화를 채화한 계기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2년 후인 55년 체전에 앞서 당시 화도면 출신 국회의원 윤재근씨가 『체전의 성화를 민족의 성전이요, 구국의 성전인 참성단에서 채화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이뤄졌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각계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 때만 해도 체전성화에 대해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시기여서 더욱 그랬다. 그러다 당시 대한체육회 성화부장이었던 이상백박사와 신익희 국회의장 등이 적극 나서면서 비로소 결실을 거두게 된다. 강화군은 그 때부터 해마다 전국체전 주경기장을 밝힐 성화 행사를 위해 칠선녀와 성화주자들을 뽑아 의식을 치르는 등 정성을 다하고 있다.
4. 은행나무 전설
경기도 강화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전등사에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 노승나무, 동승나무라 부르기도 하고 암컷 수컷이라 하여 애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정성을 드리기도 하는 이 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신기한 나무들에 관하여 내려오는 한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 배불숭유의 정책으로 불교는 매우 탄압 받았다. 유생들 혹은 관원들이 마음만 먹으면 탄압을 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승려들은 이에 저항하지 않았다.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여도 종교적 인내로 다 견디었던 것이다.
어느 날 전등사에 관가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아주 어려운 요구를 하였다. 절에 있는 은행나무의 은행이 열릴 쯤 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열매를 회수해 갔는데 이번에는 은행열매를 스무 가마니만큼 요구하였다. 그런데 그 은행나무에서 열리는 은행의 양은 열 가마니 정도였다. 관가에서는 수확량의 두 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절의 한 동자승이 이 사실을 노승에게 알렸다.
그는 동자승에게 그들을 미워하지 말라 타일렀지만 곧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열 가마니 이상 나오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한들 나라에 대한 반항이라며 탄압의 근거로 삼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저런 고민 끝에 노승은 백련사의 추송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추송스님은 도술이 뛰어나니 어떻게 해볼 수 있으시겠지.\' 그는 동자승을 추송스님에게 보냈다. 동자승과 함께 도착한 추송스님은 은행나무가 더 열리게 하는 3일기도를 하기로 하고 곧 기도에 착수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모이고 군관도 찾아 왔다. 그리고는 불가능함을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그 직후 갑자기 멀쩡하던 군관의 눈이 맞은 듯 부어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3일째 되는 날 늦은 오후 은행나무에서 3일정성의 막바지에 다다라 염불소리가 멎었을 때 추송스님이 축원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축원의 내용은 두 그루 나무의 열매를 앞으로 맺지 않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뜻밖의 축원에 모인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축원이 끝나자 먹구름이 몰려와 뇌성과 함께 때 아닌 비가 무섭게 내렸고 사람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렸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스님도 노승도 동자승 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말들 하였고 이후 전등사에 대한 탄압은 없어졌다 하였다. 전등사에는 지금도 그 은행나무만이 그 사연을 안은 채 서있다.
참고문헌
1. 강화사편찬위원회(1988), 江華史, 강화문화원
2. 미술문화 편집부(2012), 강화나들길 답사 수첩, 미술문화
3. 송슨진(2011), 춘우의 아름다운 우리나라, 성안당
4. 신서원(2002), 역사의 섬 강화도, 신서원
5. 이동미(2004), 강화도, 김영사
6. 최정규(2010),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마로니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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