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게오로그 루카치의 사고
Ⅲ. 게오르그 루카치의 마르크시즘(막시즘)
Ⅳ. 게오르그 루카치의 문제설정
Ⅴ. 게오르그 루카치의 자기비판
Ⅵ. 게오르그 루카치의 작품 소설의 이론
참고문헌
Ⅱ. 게오로그 루카치의 사고
Ⅲ. 게오르그 루카치의 마르크시즘(막시즘)
Ⅳ. 게오르그 루카치의 문제설정
Ⅴ. 게오르그 루카치의 자기비판
Ⅵ. 게오르그 루카치의 작품 소설의 이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활동적인 경험을 분리시키는 거리에의 두려움을 해석한다. 경험과 희망 사이를 매개하는 소설의 아이러니한 언어는 형태의 복합적인 패러독스 안에서 이상과 현실을 구성한다. 이 형태는 동종적이고 유기체적인 형태의 자연과 일반적인 관계가 없다. 그것은 의식의 행동에 토대가 되어지지 자연적 대상의 모방에 기초되어지지 않는다. 소설에서 “....... 전체에 대한 부분의 관계는 비록 그것이 유기적인 관계의식의 존재에 가능한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지라도 사실, 진실한 유기적 하나가 아니라 미리 중지된 개념적 관계이다” 루카치는 이런 종류의 진술에서 소설의 시작에 대해 진실한 해석학의 핵심과 매우 가깝다.
그러나 그 자신의 분석은 다른 직접성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에세이의 두 번째 부분은 언어의 해석학적 이론과 같이하는 어떤 본질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적 거부를 담고있다. 그의 에세이에 최근 제문제에 대해 추가한 1961년 서문에서 그는 비웃음으로 “오른쪽 -날개 인식론”으로써의 현상학적 접근을 언급했다. 그것은 왼쪽-날개의 윤리학으로 나아간다. 이 비평은 독창적 텍스트에서 이미 명백하다. 그가 소설에서의 동시대 발전을 매우 상세히 다루었을 때 그리고 소설 그 자체가 사실성향을 인식하게 되던 순간에 주장에 변화가 발생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잘못된 유토피아적 리얼리즘에로의 소설의 회피를 이끌 수 있는 것이 어떤 본질인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처음부터, 그 자신의 패배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유토피아” 환멸의 낭만적 소설(Desillusions-romantik)은 장르 왜곡의 한 예이다. 그 때문에 소설은 경험적 사실성과의 관계를 잃어버렸다. 루카치는 노발리스를 생각한다. 그는 초기 저서인 영혼과 형식이란 에세이에서 똑같은 이유로 공격했다. 루카치는 또한 야콥슨의 “Niels Lyhne”와 곤차로프의 “ Oblomov”로부터 그 예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그 보기들이 환멸의 동일 주제로 분명히 존재하고 그는 그것을 할 수도, 떠나기를 바랄 수도 없는 유럽소설의 다른 발전들을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은 물론 거의 강박관념을 가진 본질의 부정성을 극복함으로 진실한 근대소설을 모양짓는 가장 두드러진 예이다. 루카치 자신의 판단에서 그것은 19세기 장르의 최고 높은 형태를 재현한다.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에 다른 후기-낭만적 소설의 본질과 함께 비난되어지는 것으로부터 도움을 주는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루카치는 지금까지 정확히 언급되어지지 않은 요소를 소개한다. 시간성(temporality). 1961년 서문에서 그는 시간 범주의 독창적인 사용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프루스트 소설이 대중에게 아직 알려지기 않았던 순간을 지적한다. 퇴폐적이고 때늦은 낭만적임 때문에 시간은 순수한 부정성으로써 경험된다. 소설의 내부운동은 희망이 없는 “시간의 침식력에 대한 전투”이다. 그러나 루카치에 따르면 플로베르에선 그것은 정확한 경우가 아니다. 영웅의 지속적인 폐배와 실망에도 불구하고 감정교육에서 능동적인 원리로써 시간은 승리한다. 왜냐면 플로베르는 베르그송적인 지속적 시간(duree)이 인물들의 유동적이며 저항할 수 없는 감정을 탈환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승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의 저지할 수 없고 억제할 수 없는 흐름은 모아지지 않는 부분들에게 동일성을 주는 결합의 원리이다. 관계의식에 그것을 넣음으로써 비록 비이성적이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성의 하나이다. 시간은 인간의 동요에 질서를 주고 유기적 성장의 출현에 질서를 제공한다.......” 사실의 일시적인 경험의 수준에서 아이러니한 불연속은 사라지고 시간 자체들의 다름은 플로베르에선 더이상 아이러니가 아니다.
우리는 루카치가 감정교육의 일시적인 구조에 대한 해석에 동의할 수 있는가?. 티바우데트와의 논쟁적인 변환에서 프루스트가 시간성의 용어로 플로베르의 스타일을 이야기할 때 그가 강조한 것은 동종성이 아니라 정확히 반대말이었다. 긴장의 사용에서 플로베르의 태도는 그에게 불연속성들, 죽음의 기간과 순수기원의 순간을 대체하는 부정적 시간, 지라르의 “de nerval in sylvie ”에서 성취된 것과 필요되는 기억의 구조들에서의 복합성을 창조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미비한 지속적 시간(duree)의 하나의 직접적인 흐름은 불연속성을 드러내는 반대적일 수 있는 운동의 복합적 병렬과 시간성의 폴리리듬적 성질에 의해 바뀌어질 수 있다. 그러나 직선이 아닌 시간성의 비종결이 그것의 진실한 자신을 대면하는 의식의 본질이 감소되는 순간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순간은 정확히 주체와 객체 사이의 유추적 분석이 있는 그것이 그 자신을 오류로 드러낸다.
그가 아이러니를 그것이 인도하는 구조적 원리로 만들 때 소설의 형태를 제한한 루카치의 기능주의는 시간의 외양인 그림으로 다시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에세이에서 시간은 루카치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본 유기적 전체에 현재한다. 그러므로 연속적인 사건으로써 소설의 발전을 말하는 필요성으로부터 주어진 활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상주의적인 개념으로써 고대 그리스 서정시의 몰락 형태로 취급되었다. 소설에 대한 루카치의 이론의 후기 발전(플로베르로부터 후퇴에서 발자크로 돌아가기, 도스토예프스키에서 톨스토이의 다소 간단한 전망으로, 해석으로써의 예술이론으로부터 반영된 모방(wiederspiegelung)으로써의 예술이론으로)은 소설의 이론의 마지막에서 분명히 증거된 시간성의 이론은 구체화된 이데아로 돌아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참고문헌
김효중 : 루카치의 역사인식과 문학관, 대구가톨릭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03
리히트하임 저, 김태웅 역 : 루카치: 사상과 생애, 한마당, 1984.
이재근 : 루카치에 있어서 계급의식과 역사발전, 연세대학교, 1985
조항구 : 루카치와 마르크스 소외론, 대한철학회, 1999
전변상출 : 루카치 유물론에서 \'매개\'의 위상, 대구대학교 현대사상연구소, 2009
혜정 : 루카치 리얼리즘론의 현실인식, 숙명여자대학교, 2003
그러나 그 자신의 분석은 다른 직접성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에세이의 두 번째 부분은 언어의 해석학적 이론과 같이하는 어떤 본질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적 거부를 담고있다. 그의 에세이에 최근 제문제에 대해 추가한 1961년 서문에서 그는 비웃음으로 “오른쪽 -날개 인식론”으로써의 현상학적 접근을 언급했다. 그것은 왼쪽-날개의 윤리학으로 나아간다. 이 비평은 독창적 텍스트에서 이미 명백하다. 그가 소설에서의 동시대 발전을 매우 상세히 다루었을 때 그리고 소설 그 자체가 사실성향을 인식하게 되던 순간에 주장에 변화가 발생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잘못된 유토피아적 리얼리즘에로의 소설의 회피를 이끌 수 있는 것이 어떤 본질인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처음부터, 그 자신의 패배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유토피아” 환멸의 낭만적 소설(Desillusions-romantik)은 장르 왜곡의 한 예이다. 그 때문에 소설은 경험적 사실성과의 관계를 잃어버렸다. 루카치는 노발리스를 생각한다. 그는 초기 저서인 영혼과 형식이란 에세이에서 똑같은 이유로 공격했다. 루카치는 또한 야콥슨의 “Niels Lyhne”와 곤차로프의 “ Oblomov”로부터 그 예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그 보기들이 환멸의 동일 주제로 분명히 존재하고 그는 그것을 할 수도, 떠나기를 바랄 수도 없는 유럽소설의 다른 발전들을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은 물론 거의 강박관념을 가진 본질의 부정성을 극복함으로 진실한 근대소설을 모양짓는 가장 두드러진 예이다. 루카치 자신의 판단에서 그것은 19세기 장르의 최고 높은 형태를 재현한다.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에 다른 후기-낭만적 소설의 본질과 함께 비난되어지는 것으로부터 도움을 주는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루카치는 지금까지 정확히 언급되어지지 않은 요소를 소개한다. 시간성(temporality). 1961년 서문에서 그는 시간 범주의 독창적인 사용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프루스트 소설이 대중에게 아직 알려지기 않았던 순간을 지적한다. 퇴폐적이고 때늦은 낭만적임 때문에 시간은 순수한 부정성으로써 경험된다. 소설의 내부운동은 희망이 없는 “시간의 침식력에 대한 전투”이다. 그러나 루카치에 따르면 플로베르에선 그것은 정확한 경우가 아니다. 영웅의 지속적인 폐배와 실망에도 불구하고 감정교육에서 능동적인 원리로써 시간은 승리한다. 왜냐면 플로베르는 베르그송적인 지속적 시간(duree)이 인물들의 유동적이며 저항할 수 없는 감정을 탈환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승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의 저지할 수 없고 억제할 수 없는 흐름은 모아지지 않는 부분들에게 동일성을 주는 결합의 원리이다. 관계의식에 그것을 넣음으로써 비록 비이성적이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성의 하나이다. 시간은 인간의 동요에 질서를 주고 유기적 성장의 출현에 질서를 제공한다.......” 사실의 일시적인 경험의 수준에서 아이러니한 불연속은 사라지고 시간 자체들의 다름은 플로베르에선 더이상 아이러니가 아니다.
우리는 루카치가 감정교육의 일시적인 구조에 대한 해석에 동의할 수 있는가?. 티바우데트와의 논쟁적인 변환에서 프루스트가 시간성의 용어로 플로베르의 스타일을 이야기할 때 그가 강조한 것은 동종성이 아니라 정확히 반대말이었다. 긴장의 사용에서 플로베르의 태도는 그에게 불연속성들, 죽음의 기간과 순수기원의 순간을 대체하는 부정적 시간, 지라르의 “de nerval in sylvie ”에서 성취된 것과 필요되는 기억의 구조들에서의 복합성을 창조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미비한 지속적 시간(duree)의 하나의 직접적인 흐름은 불연속성을 드러내는 반대적일 수 있는 운동의 복합적 병렬과 시간성의 폴리리듬적 성질에 의해 바뀌어질 수 있다. 그러나 직선이 아닌 시간성의 비종결이 그것의 진실한 자신을 대면하는 의식의 본질이 감소되는 순간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순간은 정확히 주체와 객체 사이의 유추적 분석이 있는 그것이 그 자신을 오류로 드러낸다.
그가 아이러니를 그것이 인도하는 구조적 원리로 만들 때 소설의 형태를 제한한 루카치의 기능주의는 시간의 외양인 그림으로 다시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에세이에서 시간은 루카치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본 유기적 전체에 현재한다. 그러므로 연속적인 사건으로써 소설의 발전을 말하는 필요성으로부터 주어진 활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상주의적인 개념으로써 고대 그리스 서정시의 몰락 형태로 취급되었다. 소설에 대한 루카치의 이론의 후기 발전(플로베르로부터 후퇴에서 발자크로 돌아가기, 도스토예프스키에서 톨스토이의 다소 간단한 전망으로, 해석으로써의 예술이론으로부터 반영된 모방(wiederspiegelung)으로써의 예술이론으로)은 소설의 이론의 마지막에서 분명히 증거된 시간성의 이론은 구체화된 이데아로 돌아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참고문헌
김효중 : 루카치의 역사인식과 문학관, 대구가톨릭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03
리히트하임 저, 김태웅 역 : 루카치: 사상과 생애, 한마당, 1984.
이재근 : 루카치에 있어서 계급의식과 역사발전, 연세대학교, 1985
조항구 : 루카치와 마르크스 소외론, 대한철학회, 1999
전변상출 : 루카치 유물론에서 \'매개\'의 위상, 대구대학교 현대사상연구소, 2009
혜정 : 루카치 리얼리즘론의 현실인식, 숙명여자대학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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