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기독교인(크리스찬, 크리스천)의 기본원칙
1. 복종의 의무
2. 저항의 권리
Ⅲ. 기독교인(크리스찬, 크리스천)과 목회자
Ⅳ. 기독교인(크리스찬, 크리스천)과 이데올로기
Ⅴ. 기독교인(크리스찬, 크리스천)의 개혁적 사고
참고문헌
Ⅱ. 기독교인(크리스찬, 크리스천)의 기본원칙
1. 복종의 의무
2. 저항의 권리
Ⅲ. 기독교인(크리스찬, 크리스천)과 목회자
Ⅳ. 기독교인(크리스찬, 크리스천)과 이데올로기
Ⅴ. 기독교인(크리스찬, 크리스천)의 개혁적 사고
참고문헌
본문내용
통해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종교개혁은 세속화를 초래하는 발판이 되었다. 즉 비신격화가 확산되면서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이 시대사조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으며 자신의 의지 이성 지식에 의해 우주의 모든 신비를 알아낼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모든 비이성적 신앙은 불필요하게 된다. 사회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인본주의자들은 같은 이성의 원리를 적용하여 개혁을 주장했다.
사회의 모든 갈등은 부조리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성의 힘을 활용하여 불합리한 요소들을 제거하기만 하면 사회는 안정 속에서 발전한다고 본다. 이성의 힘이 확장되어 사회제도가 개조됨으로써 역사의 진보는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발전할 것으로 그들은 보고 있다.
이에 반해 히브리인은 자연을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로 보았다. 따라서 피조물로서의 자연에는 신적 특성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자연의 운행질서도 하나님이 섭리한다. 하나님이 만든 자연질서라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나 목적에 의해 변경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세계관이다. 따라서 하나님 중심 세계관은 자연 또는 인본주의적 세계관과 상당 부분 대립하거나 모순 된다. 기독교적 개혁이란 하나님 중심 세계관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하나님을 벗어나서 잘못되고 왜곡된 사상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기독교적 개혁이란 탈세속화라 말할 수 있다. 인류의 문화는 다양한 세계관의 영향에 의해 혼합되거나 변질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인류의 문화가 항상 기독교와 대립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개인뿐만 아니라 문화를 구제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주장은 세속적인 문화를 죄악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현재의 구조나 문화를 인정하되 기독교적 입장에서 재평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된 것은 고치고 뒤틀린 것을 다시 폄으로써 문화를 구속하는 것이다.
세계관은 문화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다. 그러면서도 문화의 여타 모든 부분은 모두 구제될 수 있다. 이처럼 기독교인에게 있어 개혁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세계관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것을 한마디로 탈세속화의 과정이라 지칭할 수 있다. 신앙적으로는 이것을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역사와 문화가 구속되는 개혁이 가능해진다.
개혁은 각자의 소명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 개혁이 형식적이거나 거창하게 이루어져야 할 필요도 없다. 개혁은 작은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아주 구체적이며 일상적인 것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현재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 여기에서 개혁과 소명의 불가분성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우연한 산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필연적인 산물로 보고 있다. 즉 존재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렇게 예정된 인간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려는 소명을 받았다(창 1:26).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한 인간으로서 일반적으로 실현할 소명을 주셨다. 또 일을 통해 특별하게 이루고자 하는 소명을 주셨다.
일반적 소명이란 한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동의 선 다시 말해 공의를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가 지향하는 두 가지 최고의 덕목은 사랑과 공의이다. 사랑이 없다면 어떠한 사회적 정의도 울리는 꽹과리와 같을 것이다. 반면 공의가 없다면 사랑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되지 못한다. 공의 즉 공정하고 공평한 의가 실현되지 않고서는 사랑이 있더라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불법과 탈법이 있는 곳에 늘 기독교인이 끼어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이 주관적이라면 공의는 객관적이다.
참고문헌
김경숙(2011), 기독교인의 자녀교육을 위한 결정적 시기와 부모역할에 관한 연구, 호남신학대학교
임향진(2008), 목회자 자녀의 기독교적 자아정체감 형성을 위한 기독교교육 방향 고찰, 연세대학교
안광현 외 1명(2012), 기독교인들의 한국교회에 대한 인식현황 분석, 한국실천신학회
이향숙(2011), 기독교인의 성인애착과 하나님애착 관계, 성결대학교
정원조(2011), 기독교인의 종교정향과 신앙성숙도 및 자아탄력성의 관계, 전북대학교
최성하(2008), 기독교인들의 스트레스와 기독교적 제 요소와의 상관관계 연구, 총신대학교
이제 인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으며 자신의 의지 이성 지식에 의해 우주의 모든 신비를 알아낼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모든 비이성적 신앙은 불필요하게 된다. 사회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인본주의자들은 같은 이성의 원리를 적용하여 개혁을 주장했다.
사회의 모든 갈등은 부조리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성의 힘을 활용하여 불합리한 요소들을 제거하기만 하면 사회는 안정 속에서 발전한다고 본다. 이성의 힘이 확장되어 사회제도가 개조됨으로써 역사의 진보는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발전할 것으로 그들은 보고 있다.
이에 반해 히브리인은 자연을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로 보았다. 따라서 피조물로서의 자연에는 신적 특성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자연의 운행질서도 하나님이 섭리한다. 하나님이 만든 자연질서라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나 목적에 의해 변경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세계관이다. 따라서 하나님 중심 세계관은 자연 또는 인본주의적 세계관과 상당 부분 대립하거나 모순 된다. 기독교적 개혁이란 하나님 중심 세계관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하나님을 벗어나서 잘못되고 왜곡된 사상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기독교적 개혁이란 탈세속화라 말할 수 있다. 인류의 문화는 다양한 세계관의 영향에 의해 혼합되거나 변질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인류의 문화가 항상 기독교와 대립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개인뿐만 아니라 문화를 구제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주장은 세속적인 문화를 죄악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현재의 구조나 문화를 인정하되 기독교적 입장에서 재평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된 것은 고치고 뒤틀린 것을 다시 폄으로써 문화를 구속하는 것이다.
세계관은 문화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다. 그러면서도 문화의 여타 모든 부분은 모두 구제될 수 있다. 이처럼 기독교인에게 있어 개혁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세계관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것을 한마디로 탈세속화의 과정이라 지칭할 수 있다. 신앙적으로는 이것을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역사와 문화가 구속되는 개혁이 가능해진다.
개혁은 각자의 소명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 개혁이 형식적이거나 거창하게 이루어져야 할 필요도 없다. 개혁은 작은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아주 구체적이며 일상적인 것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현재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 여기에서 개혁과 소명의 불가분성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우연한 산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필연적인 산물로 보고 있다. 즉 존재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렇게 예정된 인간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려는 소명을 받았다(창 1:26).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한 인간으로서 일반적으로 실현할 소명을 주셨다. 또 일을 통해 특별하게 이루고자 하는 소명을 주셨다.
일반적 소명이란 한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동의 선 다시 말해 공의를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가 지향하는 두 가지 최고의 덕목은 사랑과 공의이다. 사랑이 없다면 어떠한 사회적 정의도 울리는 꽹과리와 같을 것이다. 반면 공의가 없다면 사랑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되지 못한다. 공의 즉 공정하고 공평한 의가 실현되지 않고서는 사랑이 있더라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불법과 탈법이 있는 곳에 늘 기독교인이 끼어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이 주관적이라면 공의는 객관적이다.
참고문헌
김경숙(2011), 기독교인의 자녀교육을 위한 결정적 시기와 부모역할에 관한 연구, 호남신학대학교
임향진(2008), 목회자 자녀의 기독교적 자아정체감 형성을 위한 기독교교육 방향 고찰, 연세대학교
안광현 외 1명(2012), 기독교인들의 한국교회에 대한 인식현황 분석, 한국실천신학회
이향숙(2011), 기독교인의 성인애착과 하나님애착 관계, 성결대학교
정원조(2011), 기독교인의 종교정향과 신앙성숙도 및 자아탄력성의 관계, 전북대학교
최성하(2008), 기독교인들의 스트레스와 기독교적 제 요소와의 상관관계 연구, 총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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